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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 요양보호사는 ‘국민건강효도자격증’

“어머니, 어디 가십디강?” 이른 아침 어머니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고 보니, 어머니가 주무시면서 잠꼬대를 하신다. 꿈을 꾸셨나 보다. 103세 어머니가 꿈속에서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시다니....

 

어머니 임하용님은 1880년 명치 13년에 출생, 43세에 막둥이 딸을 낳으셨다. ‘성춘(成春)’이라 부르실 적에 ‘네 인생에 봄을 이루어라’ 기원하셨을 할머니를 생각해 본다. 살아 계시다면 146세가 넘으셨을 터. 그래도 꿈속에서 만난 어머니는, 생생한 땀 냄새에서 달콤한 살 내음이 느껴지는 제주 여인이 아니었을까?

 

초등학교 때 일이다. 어머니가 클방(정미소)에서 쌀을 한 짐 지고 오셨다. 아, 그 껍질을 갓 벗겨낸 쌀(곤쌀)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라니.... 우리는 그때 쌀을 일컬어 ‘고운 쌀’이라고, ‘곤쌀’이라 불렀다. 그 투명하게 기름기가 흐르는 쌀 한 줌을 입에 털어 넣고서 씹고 또 씹으면 흘러나오던 달짝지근한 맛, 그 비몽사몽의 감미로움이여!

 

어머니가 쌀 구덕을 난간에 부려놓자마자, 나는 얼른 팔을 뻗어서 쌀 한 줌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혹시나 꾸중이 날아 올까 봐 얼른 달아날 태세를 취하였다. 그러자 막 머릿수건을 벗어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던 어머니가 쌀 한 줌을 듬뿍 집더니, 내 와개(윗저고리)의 개왁숙(호주머니)에 깊이 넣어주셨다.(아마 이런 단어들은 일제의 잔재 같은데, 그 시절 우리들의 가난과 궁상을 표현하기에 더 적합한 우리말은 없는 것 같다. 그때까지도 우리의 삶에는 일제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서, 재일교포들이 고향을 방문하면서 중고 옷가지들을 가져오면, 그 빛나는 일제가 아이들에게 적당히 나눠지는 게 미풍양속이었다.)

 

나는 그때의 어머니 내음을 잊지 못한다. 도시 여인들이 풍기는 화장품과 다른,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자연의 향기여! 그 냄새는 어디로 가든지 나를 따라다녔다. 특히 육지로 나가서 남의 집 가정교사를 하면서 소위 고학을 할 때는 “힘내!, 기죽지 마!, 사랑해!’라고 내 편이 되어주었다.

 

그 어머니가 이제는 3살 아기가 되어 자나 깨나 내 옷자락을 붙들고서 심금을 울린다. 지금은 눈가에 고인 눈물이 내 가슴을 적신다. 조금만 움직이면 얼굴에 패인 고랑을 따라서 논물이 흘러가듯 흘러내릴 태세다. 가늘어진 목을 따라 앙상하게 드러난 가슴을 지나, 아무도 그 속 모를 마음을 적시며 하염없이 흐르리라. 당신이 평생 땀 흘리며 노동해 온 밭고랑처럼 깊어진 주름들. 이제는 주름투성이가 된 어머니의 몸이, 마치 언덕 위의 빌레왓(돌짝밭) 처럼 무심하게 누워 있다. 가엽고 쓸쓸해 보여서 가슴이 저려온다.

 

요즘 들어 어머니의 치매 증상이 한두 가지 더 늘었다. 침을 아무 데나 뱉는 것은 치매의 시작, 아주 작은 증상에 불과했다. 사뭇 아기처럼 우스운 행동은 기저귀를 벗어서 카바(겉면)를 찢은 다음 솜을 꺼내 찢으면서 마구마구 날려 보내는 것이다. 어쩌면 목화를 재배해서 송이들이 하얗게 벌어지면 일일이 따다가 가게에 가서 솜 틀기를 하던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모양새다. 뭉게구름처럼 몽실몽실 밀려 나오는 솜덩이를 안고서 ‘이추룩만 복시럽게 살아가게 해줍서’라고 기도하던 그 시절의 가난을. ‘남의 집 아이를 봐주면서라도 대학은 가야 한다’라며 부산으로 올라간 딸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솜이불’을 만들어 등에 지고 오르던 그 겨울의 대티고개가 떠올라서 신이 났는지도.

 

요즘은 딸인 내가 엄하게 보이는지 아주 공손한 표정으로 ‘선생님’이라 부를 때가 간혹 있다. ‘선생님, 제가 잘못했어요. 잘 모르고 틀렸어요’라고. 그 서툰 표준말을 애쓰며 구사할 때는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져 소리치고 싶어진다. “어머니, 날 잘 뵈려 봅서 예! 난 어머니 선생이 아니고 똘이라 마씸. 어머니 6번째 똘, 정옥이!” 그리고 어머니를 부둥켜안으면, 얼른 아기처럼 내 품에 안겨든다.

 

어느새 이렇게 작아졌을까? 어미 품에 안겨드는 병아리 마냥 파닥거리는 느낌이 서러워서 그랬을까? 아프도록 어머니를 억세게 끌어안던 날 정색을 하고서 “정옥아, 야코(기) 죽지 마라. 호다(부디) 실망허지 말곡. 호루(하루)민 호루 다 일해야 산다. 모음(마음)만 든든히 먹고 살라, 이! 경(그렇게) 허민 하늘이 도와! 모든 건 모음에 이신다!”라고 유언처럼 하시던 말씀. 요즘 들어 치매가 심해진 듯 기억력을 잃어버린 나는 어머니의 주옥같은 말씀을 메모장에 일일이 적어 놓는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펼쳐보리라 다짐하면서.

 

사실 어머니를 모시고 한 방에서 같이 잠을 자 온 지가 어언 13년. 언젠가도 언급했던 것처럼 그 사이에 야기된 ‘수면 부족이 불러오는 기억력 저하’의 문제가 대단히 심각해졌다. 92세 어머니가 ‘혼자 자는 게 무섭다’면서 아기처럼 베개를 안고 우리 방으로 들어오실 때부터 드리워진 ‘노노케어’의 그림자. 그날부터 하룻밤에도 두세 번씩 이동 변기를 여닫는 소리에 잠을 설치던 나. 여차하면 일어나려고 의식적으로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 요양보호의 이면. 아니 본질적인 문제는 서너 달이면 끝날 줄 알고 시작했던 요양보호의 길이, 어느새 3년을 지나도 끝이 안 보이게 아득해 보이는 절망이 아닌가 싶다.

 

사실 2002년쯤 직장을 마치고 나와서 어머니를 모실 때만 해도 내 마음은 파란 하늘이었다. 92세부터 어머니를 돌보아 주던 주간보호센터에서 ‘더 이상 어머니를 돌보아드릴 수 없으니 요양원을 찾아 보라’는 얘기에 ‘효도’를 떠올렸으니까. 그런데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리에 병원으로 모시고 가면, ‘노환’이라면서 영양제를 넣은 수액을 주사해 주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경험 있는 주위 분들이 ‘서 넉 달’을 예고하는 시한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최선을 다해 어머니의 마지막 삶을 보듬어 드리는 것 뿐. 그러는 사이에 마치 전쟁을 앞둔 군인처럼 작심을 하고서, ‘국민건강효도자격증’이라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2남7녀를 키우시느라 고생만 하신 어머니를 위해 내가 당연히 해드려야 할 일의 시작이었다. 어쩌다 천사가 내 마음을 어루만질 때면, ‘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투자라 이거지!’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요양보호사 생활이 1년을 지나면서, 어머니는 눈에 띄게 좋아지셨다. 시간은 어머니 편이었는지 어느새 세월이 흘러서 103세가 되셨다. 오늘도 어머니는 습관처럼 ‘건강, 건강...’을 기도처럼 읊조리고 계신다. 그 사이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나서 ‘일자리를 찾아보리라’던 내 꿈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이제 곧 가을이 되면 만 65세, 이른바 UN이 규정한 노인이 된다. 어쩌면 노인이 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요양보호사일 터. 그러니까 그동안 재취업의 길을 제대로 닦아 온 셈이 아닌가. 그런데 솔직히 내 마음속에는 진정한 기쁨이 없다. 이따금 어머니를 무거운 짐으로 여기면서 다른 형제들을 바라볼 때가 있다. 가장 비참해지려는 순간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햇살 같은 글귀를 만났다. ‘재취업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님과의 시간이다’라는 어느 퇴직자의 고백이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와 함께 호스피스 병원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병원에서 지내기란 예상보다 힘겨웠다. 그렇지만 그런 불편이 무슨 대수랴. 나는 오직 어머니에게만 집중했다. 24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지쳐 갔다. 무엇보다 잠이 부족해 너무 고달팠다.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정신은 몽롱했다. 더욱이 언제부터인가 병원에만 처박혀 있는 내 신세가 무척이나 처량하게 느껴졌다. 훗날 사회로 나갔을 때의 모습이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지난해 연말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집 근처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암이었다. 게다가 암 말기라니. 한평생 고생만 하셨던 어머니의 일생이 스쳐 가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어머니를 모신 병원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퇴직자가 여럿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50대 후반의 김모 씨였다. 김 씨는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스스로 직장을 정리했다 하였다. 그는 퇴직을 자기 주변을 돌아보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반면에 나는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내 자리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눈에 보이는 성과물을 쫓는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설 연휴가 고비라던 어머니가 아직은 괜찮으시다. 요즘이 내겐 선물처럼 느껴진다. 여느 해보다 풍성한 카네이션 앞에서 조용히 웃으시는 어머니를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어머니와의 어버이날을 보내면서, 나는 생각했다. 비록 멈춰 있는 이 시간은 내 이력서 어디에도 남지 않겠지만 내 생애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라고(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동아일보, 2025.5.12.).'

 

내게도 어머니와 보내는 이 시간들이 재취업보다 중요할까? 정오쯤에 눈을 뜨신 어머니가 나를 쳐다보면서 “허태행씨, 나 손 잡아 주세요”라고 하신다. 아, 얼마나 아버지가 그리우면 저러실까? 아니, 얼마나 외로우시면 내가 그저 아버지로 보일까? 2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저 하늘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면 무어라고 하실까? 이후에 천국 가서 아버지를 만나면, “정옥아, 수고 했다. 참 고맙다”라고 말씀해 주실까?

 

그런데 어머니가 불쑥 일어나시더니, 나를 덥썩 안으신다. “아고, 이 좋은 똘! 니 은혜를 뭐로 갚으코 이?” 세상에! 어머니는 보지 않아도 내 마음을 다 보고 계신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처럼, 오늘따라 우리 집 앞 ‘섶섬이 보이는 풍경’ 너머의 저 바다가 한없이 파랗다. 5월의 하늘과 맞닿아서 사이좋게 웃는다.

 

어머니 얼굴로 미소가 번진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무엇을 더 바라랴. 65세인 나에게 103세 어머니가 계신데 말이다. 섶섬 너머 하늘이 바다를 안은 듯 편안하다. 어머니 가슴에서 카네이션이 웃는다. ‘신의 사랑을 상징한다’는 꽃말처럼, 어머니의 얼굴에도 사랑이 담뿍하다. 102번째 봄날에 활짝 핀 어머니의 인생을 축복합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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