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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삶이란 ... "싸는 물 이시민 드는 물 이신 거" (2)

어머니는 여섯 살 즈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큰 오라버니 집에 얹혀서 살았다. 대여섯 살 때부터 밭고랑에 앉아서 김을 맸지만, 늘 먹을 것이 부족하였다. 밭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땅강아지처럼 밭고랑에 붙어 앉아서 하루 종일 김매는 일은, 자유가 없는 지루한 노동이었다. 이따금 친구들과 물때에 맞춰서 보말을 잡으러 가는 일이, 노는 것 마냥 그렇게도 좋았다.

 

당시 대포마을 여자 아이들은 웬만하면 예닐곱 살 때부터 바다에 가서 물질을 배웠다. ‘하나 둘 셋’ 하고 다 같이 들어가서 ‘누가 더 오래 물속에서 숨을 참고 견디나, 누가 먼저 돌멩이를 빨리 집어서 나오나, 누가 저 바위까지 빨리 헤엄쳐서 갔다 오나’ 하는 게 훈련이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물질을 익히게 되었고, 열 한 두 살이 되자 언니가 테왁을 만들어 주었다. 소중이를 입고, ᄌᆞᆨ은 안경을 쓰고, 머리에는 수건을 졸라맸다. 소라를 잡아서 망실이에 넣고는, ‘호오이, 호오잇’ 하고 숨비소리를 질러보았다. 드디어 해녀가 된 것이다. 대포 바다가 모두 자기 것인 양 그날은 온종일을 숨비질로 보냈다.

 

열일곱 살이 되자 부산 근처에 있는 미포로 초용(첫 번째 원정물질)을 떠났다. 3월에 나가서 8월 추석쯤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전주(錢主)가 어리다고 데려가지 않으려 해서 애기업개를 한다며 따라붙었다. 하지만 정작은 돈을 벌어야 했으므로 현지에 도착해서는 해녀들과 함께 물질을 하였다.

 

비교적 수심이 얕은 곳에서 우미를 ᄌᆞ무는 일이었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그저 욕심 있고 부지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간혹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는 난바르에는 해녀들이 노를 저으면서 구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칠성판을 등에 지고, 혼백상자를 머리에 이고, 목숨 걸고 이 물질 해서, 어느 남편 먹여 살릴 건가?’ 대부분 혼자 된 몸이라 육지물질을 나온 해녀들의 설움에, 어머니도 왠지 마음이 서글퍼져서 같이 훌쩍이곤 하였다.

 

그 물질을 끝으로 어머니는 더 이상 원정물질을 나가지 않았다. 육지 사람들이 어머니를 보고서, ‘밥통을 주웠다’며 며느리로 들이려 하였다. ‘제주도 여자가 며느리로 들어오면 온 집안을 먹여 살린다’는 소문이 일 정도로 해녀들의 물질은 억척스럽고 돈이 되었다.

 

그 해 겨울, 어머니는 한 동네에 사는 미남 총각과 중매결혼을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2남 7여를 낳았다. 증조할머니가 같이 살았으므로 12명이 대가족을 이루어서, 노상 먹을 것이 부족했다.

 

 

항상 동 트기 전에 일어나서 커다란 말치솥에 보리쌀을 삶아놓고, 여분으로 고구마나 감자를 쪄놓고서 어둠을 밟으며 밭으로 나갔다. 남의 밭까지 병작을 했으므로 밤낮으로 일을 해야 하였다. 달 밝은 밤에도 보리타작을 하거나, 볏짚을 묶거나, 말린 고구마를 줍는 일들은 가능했다. 가을이면 겨울 내내 소가 먹을 촐(꼴)을 배기 위해 한라산에 있는 마을목장으로 올라갔다. 오가는 시간을 아끼려고 아예 2∼3일씩 야영을 하며 밤낮으로 일했다. 그 사이 집안일과 웬만한 밭일은 딸들이 도맡았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것이 우리 집의 가훈이었다.

 

해가 긴 여름철이 어머니에게는 가장 고단한 계절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밭으로 나가 일을 하다가, 햇볕이 뜨거워질 때쯤 태왁을 지고서 바다로 내달렸다. 오후 네 다섯 시가 되면 다시 밭으로 돌아와서 일을 하다가, 어둠이 짙어지면 집으로 향했다.

 

아침밥과 저녁밥은 딸들이 당번을 정해서 돌아가며 지었다. 어머니는 언제 아침과 점심을 먹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름이 지나면 어머니는 마치 거미처럼 앙상하고 새까맣게 말라 있었다. 어쩌면 한 여름 내내 진액이 빠지도록 울어 제치다가 가을이 되면 낙엽처럼 말라서 사라지는 매미와도 같았다. 사실 어머니의 노래도 매미의 울음처럼 같은 가사가 후렴으로 반복되는 타령조였다. ‘물로 뱅뱅 돌아진 섬에, 삼시 굶엉 요 물질 해영, ᄒᆞᆫ푼 두푼 모여논 금전, 이여 싸나 이여도 싸나’

 

여름에는 동생과 나도 어머니를 따라서 바다로 나갔다. 이상스레 나와 동생은 바다를 똑같이 좋아했다. 물때가 되면 둘이서 상군이나 된 듯이 애기바당을 일대를 신바람나게 주름잡았다. 우리는 여느 애들처럼 보말을 잡지 않았다. 어머니가 만들어 준 소중이를 입고, 태왁을 짚고, 수경을 쓰고서 소라·오분작·문어를 잡았다.

 

어느 여에 가면 소라가 많은지, 오분작 바당은 어디인지, 어떤 곳에 문어가 출몰하는지를 손바닥 보듯 꿰차고 있었다. 가끔은 하군들이 ᄀᆞᆺ물질하는 곳에 들어가 은근히 수심을 재보기도 하였다. 우리가 잡은 물건을 보면서 지나가는 해녀들이 탄성을 질렀다. “아이고, 우리 동네에 상군 나신게!”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던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더 깊은 곳으로 숨비질 해 들어갔다.

 

어머니는 우리 동네에서 일등 가는 상군이었다. 잠수회장도 하셨다. 하지만 늘 당신은 ‘이등 좀수’라고 우겨댔다. 우리가 보기에는 어머니가 제일 먼저 물에 들어서 가장 나중에야 나오는 억척해녀인데 말이다. 어머니의 망실이는 언제나 배가 불룩하니 튀어나왔고, 먼 바다에서 몇 년씩 묵어서 껍질이 두껍고 색깔이 시벌건 문둥구제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거의 매일 한 두 개의 문어들이 팔 다리를 있는 힘껏 벌려서 망실이에서 비어져 나오려는 소라들을 엉겨 붙으며 떠받쳤다.

 

나도 어머니를 닮았는지, 문어 하나는 기막히게 잘 잡았다. 숨이 길어서, ‘물속에서 소라로 젓갈을 담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나를 두고서 어머니는 ‘물질을 타고 난 것 같다’며 추겨주셨다. 동시에 ‘물 소굽에선 ᄒᆞ나라도 더 잡젠 욕심 부리민 안 된다. 물 배낕뜨레 나올 시간을 재여그네 ᄒᆞᆫ 숨 먼저 나오라 이. 숨이 그차정 물숨 먹으민 바로 그 자리가 저세상이여(물 속에서는 하나라도 더 잡으려고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물 밖으로 나올 시간을 가늠해서 한 숨 먼저 나와라. 숨이 끊어져서 물숨을 먹으면 바로 그 자리가 저 세상이 되는 거다)’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우리는 저녁을 먹은 후 나란히 누워서 그 날의 물질담을 나누곤 하였다. 더러 얼룩지고 색이 바랜 천장을 바다 삼아, 마치 장군의 무용담인 양 그날의 물질현장을 일일이 되짚었다. 동생은 언제나 자기가 잡다 놓친 문어가 얼마나 컸었는지를 자랑했고, 나는 늘 내가 잡은 문어가 더 크다고 우겨댔다. 오늘보다 더 나은 수확을 꿈꾸며 천장 지도에다 내일의 작전을 그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르르 잠속에 빠져든 우리를, 어머니는 ‘언제까지 물질을 시킬 것인지’ 고민하며 지켜보셨다.

 

고등학생이 되자 어머니는 내게 물질을 금하였다. 해녀는 사람이 할 게 못 된다는 거였다. 사실 물질이란 숨을 참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목숨이 끊어지도록 바당밭을 긍파는(샅샅이 뒤지는) 일이다. 그러다가 사고사가 발생하는 일은,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처럼 해녀에겐 예고된 일상 중 하나였다.

 

어머니의 사촌인 종택이 어멍과 조카 제이, 웃동네 달문이 각시가 물숨을 먹었다. 대포 일등 처녀가 그물에 발이 걸려서 목숨을 잃은 날은, 약혼자의 울음이 파도소리처럼 세상천지를 울렸다. 온 동네가 슬픔에 잠긴 며칠 동안 동네 해녀들은 물질을 가지 않았다. 그 후로도 대포에는 구린질 종손 딸, 영준이 각시, 웃동네 영자 등이 물질 중에 사고사를 당했다.

 

보이지 않는 바다 속은 보이는 육지와 지형이 비슷하다. 대포 바다는 비교적 설덕이 많고 수심이 깊어서 물질이 쉽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해녀들의 물질 사고가 잊을 만하면 이어졌다. 사고가 날 적마다 자식들은 나이든 어머니에게 ‘바다에 나가지 말라’고 윽박지르며 하소연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예순이 넘으면서는 물질 나간 어머니가 늘 걱정거리였다. 그러던 중 미국 간 아들이 ‘아이들을 돌봐 달라’며 부모님을 초청했다. 그쯤 들어 어머니의 물질 욕심을 심각하게 염려하던 아버지가, 과감하게 이민을 결정하셨다.

 

어머니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조카 제이는 ‘고모님 어신 대포바당서 누겔 의지해영 물질허코(고모님 없는 대포 바다에서 누굴 의지하여 물질할까)?’ 하면서 울었다. 그렇게 해서 17년을 지내게 된 미국은, 해녀가 삶이었던 어머니에겐 잃어버린 세월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는 나를 따라 한국으로 오셨다. 하지만 서귀포 도심의 삶은 낯설기가 미국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집을 나서면 길을 읽어버리기 십상이었다. 어머니는 아예 방안에 박혀서 바깥세상을 잊은 듯이 지냈다. 무표정한 얼굴에선 삶의 의욕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파트 속이 갑갑해서 숨쉬기가 곤란하다며 한밤중에 집을 나가기도 하였다. 그 어머니를 찾지 못해서 결국 119에 신고해 보면, 집 앞 공원의 나무덤불 속에 웅크려 있곤 하였다. 그렇게 6개월을 보내는 사이 어머니는 시나브로 시들어 갔고, 형제들은 어머니가 오래 살기 힘들 거라며 애간장을 끓였다.

 

어느 날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바다로 가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어쩌면 바다가 어머니에게 살아갈 기운을 줄 수도 있지 않겠냐면서. 아니나 다를까, 바다를 본 어머니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몇 차례 하더니, ‘이제 좀 살 것 같다’며 빙그레 웃으셨다. 죽기를 바라던 어머니에게 그 바다가 치열했던 삶의 추억을 되살려 준 것일까.

 

얼마 없어 동생은 어머니를 모시고 바닷가로 이사를 하였다. 섶섬이 보이는 보목마을, 마당이 바다인 집이었다. 어머니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물때마다 바다에 나가서 보말을 잡았다. 팔십이 넘은 몸 어디에서 그런 기운이 나오는 걸까. 이따금 문어도 잡고, 남들은 구경도 못한다는 오분작도 캐셨다. 다시 해녀의 기질을 회복하신 게 분명했다. 어머니는 다시 머정(운) 좋은 해녀할망이 되었다.

 

 

거의 매일 어머니는 섶섬이 보이는 바닷가 길을 부지런히 걸었다. 비록 보행기에 의지하긴 했지만, 기세만은 예전의 밤바르로 나가던 용사의 걸음이었다. 지나가던 사진사가 보무당당한 어머니의 걸음걸이를 작품으로 찍었다. 이중섭 화백이 그려서 유명해진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 배경으로 한몫을 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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