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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어머니의 장수비결 10가지 중 두가지 ... 자녀와 기도

1923년 3월 22일. 어머니의 생신이다. 막내딸 이름을 성춘(成春)이라 지으시면서, 외할아버지는 ‘봄처럼 눈부시고 희망차라’고 기원하셨을까. 다섯 살에 함경환사건1)으로 아버지를 여읜 어머니는, 오는 3월이면 만 나이로 백 세가 되신다.

이웃들이 묻는다. 어머니의 장수비결이 무엇이냐고. 혹시 집안이 장수하는 가문이냐고..... 유전은, 아니다. 어머니는 4남2녀의 막내인데, 형제분들 중 가장 오래 사신 경우가 80대 중반이다. 요컨대, 장수혈통은 아니란 얘기다.

그럼, 무엇이 장수의 비결일까? 어머니와 함께 산 지 20년, 같은 방을 쓴 지가 10년 째다. 룸메이트로서 내가 경험하고, 관찰하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장수비결을, 10가지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일, 2) 식사, 3) 병원, 4) 자녀, 5) 기도, 6) 바다, 7) 잠, 8) 딸, 9) 긍지, 10) 감사 등이다.

 

지난 번 일기에서 1) 일, 2) 식사, 3) 병원을 다뤘으니, 이번에는 4) 자녀, 5) 기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4) 자녀

어머니는 10명을 낳으셔서 2남 7녀를 키워내셨다. 어머니의 아픈 손가락인 첫 번째 딸은, 생후 두 달만에 어머니 품을 떠났다. 실은, 아기가 몹시 열이 나서 호흡이 곤란할 지경에 이르자, 할머니가 무당을 불러서 큰굿을 하였단다. 병원도 약방도 없던 그 시절에는, 돈을 들여 굿을 하는 정성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아버지가 부재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집을 떠나 모슬포에서 병원의 조수 일을 하던 아버지가 집에 왔을 때는, 아기가 거의 축 늘어진 상태였다. 열이 펄펄 끓는 아기는, 아버지가 보기에 폐렴이었다. 얼른 들쳐 안고 중문으로 달려가는 사이에 아기는 그만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기를 집 앞의 양지 바른 땅에 고이 묻었다. 어머니가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집을 오갈 때마다 아기 무덤을 쓰다듬으며 울던 어머니는, 다시 딸을 낳은 후에야 눈물을 멈췄다. 이어서 딸, 아들을 낳은 후 딸, 딸, 딸, 딸, 딸, 아들을 낳고서 출산을 그쳤다. 2남7녀였다.

 

어머니는 딸을 많이 나은 것이, 아버지에게 미안하였다. 아버지가 딸 바보처럼, 이모가 타박하는 ‘똘만씩헌 것’들을 위해 손수 옥편을 찾으며 이름을 지을 때마다 몸 둘 바를 몰랐단다. 아버지는 곧을 정(貞)을 택해서 ‘정열(기쁠 悅), 정복(복 福), 정희(기쁠 喜), 정숙(맑을 淑), 정심(마음 心), 정옥(구슬 玉), 정례(예도 禮)’라 지었다. 일곱 번째 딸의 이름에 ‘경의를 표하다’고 지으신 아버지. 그 아버지는 모든 딸들로부터 진심으로 경의를 받으셨다.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 번 더 경의를 표한다.

 

그리운 아버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우리 아버지의 이름은 태행(太行), 그야말로 큰 길을 가는 분이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이름들이 더 사랑스럽고 다정스러운 게, ‘우리 딸들은 하나 같이 모두가 예쁘더라’는 진심이 그대로 담긴 연유이리라. 집에서 손수 어머니의 출산을 맡으셨던 아버지의 손길,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웃음이, 마치 그 자리를 지켜본 듯 눈에 선히 스쳐간다. 내리 연속 네 번째 딸로 아버지 앞에 등장한 나에게도, 아버지는 그 환한 웃음으로 덥석 맞아서 “웰컴 투 대포리!!!”로, 환영 의식을 치뤄주셨으리라. 연속하여 볼을 날리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변함없이 사랑 넘치는 남편이었다.

 

그 당시, 이웃마을 강정에는 아들을 일곱이나 두신 분이 계셨다. 아버지와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인지, 아버지만 보면 늘 하는 소리가, ‘나는 밭갈 쇠가 일곱이라’ 하는 자랑이었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숙이는 어머니에게, “두고 봐 게. 우리는 똘들 덕분에 밭 갈 쇠가 필요 어실거라. 사위들이 이녁만씩 쇠를 몰앙 왕, 돌려들엉 이밭 저 밭 갈아줄거 아니라게!” 라며 큰 소리로 웃으셨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벚꽃처럼 파안대소(破顔大笑)를 날리시던 아버지의 그 웃음이 그립고 또 그리운 봄날이다.

 

이렇게 자녀들이 많으니, 어머니 아버지는 밤 낮 없이 일을 하셔야만 하였다. 가을이 되어 중산간에 올라가 쇠 촐(꼴)을 할 때는 아예 2〜3일 동안 캠핑을 하실 정도였다. 두 분은 일의 호흡이 너무도 잘 맞아서 말이 필요 없는 커플이었다. 눈 빛만 보고, 손끝만 스쳐도 손 발이 척척 맞았다고나 할까. 특히 아버지는 동네에서 일 잘 하기로 소문 난 장정이었다. 밭을 갈아도 남보다 두 배, 담을 쌓아도 남보다 두 배로 잘하셨단다. 그야말로 동네에서 제일 가는 무적의 탱크였다.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논이나 밭을 경작해 달라고 맡기는 이들이 많았다. 당시 우리집은 소작농이었다.

 

농번기가 되면 소가 없는 동네분들이 아버지에게 밭갈이를 부탁하였다. 우리 집에는 소문나게 일을 잘하는 얼룩소가 있었다. 게다가 생긴 모습이 세련되고 얼룩 무늬가 독특해서 사람들은 ‘미국소’라 불렀다. 약속이나 한 듯이 얼룩이는 해마다 새끼를 낳아서 온 동네의 부러움을 한껏 끌었다. 그런 얼룩이를 아버지는 소중하게 아꼈다. 일요일이 되어서 아버지가 쉴 때에는 아웃에서 아무리 소를 빌려달라 사정해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럴 때의 얼룩이는, 아버지가 어머니 다음으로 사랑하는 애인처럼 보였다. 얼룩이는 늘 아버지의 등 뒤를 따라서 그림자처럼 밀착 구도로 걸었다.

 

이따금 아버지가 동네 분들의 밭을 갈아주러 갈 때면, 아버지의 식탁에 참기름과 계란이 올라왔다. 아, 아버지가 발휘하는 힘의 비결은 어머니의 내조였다. ‘속이 든든해야 남의 집 일을 더 잘 해줄 수 있다’는 어머니의 속 깊은 정성이여! 어쩌다가 이 글이 삼천포로 빠졌을까. 어쨌든 온 동네에 소문난 2남7녀를 위하여, 어머니와 아버지는 남보다 일을 두 배 세 배로 하셨다. 특히나 물질까지 하면서 밤낮없이 소처럼 일을 하신 어머니. 술 담배를 안하시는 대신 이따금 과자나 빵을 사오시던 아버지. 그 덕분에 우리집의 큰언니와 둘째 언니는 대포마을 최초의 여고생이 되어서 제주시로 유학을 떠났다. 그 다음 선수인 아들은 아예 중학교 때부터 제주시로 진출했다.

 

그러므로 아버지 어머니가 벌어들이는 유채·보리.고구마 농사는 늘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다. 게다가 소작이라는 게 소출의 절반을 주인과 나누는 것이므로, 남보다 두 배로 일을 해야 남만큼 살 수 있는 구조였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힘에 겨운 일들을 더 효율적으로 해내기 위해서, 두 분은 팀워크를 발휘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결코 큰소리 나게 다투는 법이 없었다. 자녀들은 두 분 인생의 무거운 과제였지만, 그 때문에 더 사이좋게 슬기롭게 일을 헤쳐나가야 하는 푯대가 되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신 것 같다.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니네 아방은 대포에서 일등 가는 청년이었져!’라는 게, 어머니의 사랑고백처럼 들리니까 말이다. 어쩌면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만큼 남편에게 아버지의 정까지도 느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 게 인생이라면, 어머니는 여느 여인만큼은 행복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어머니에게 매달린 2남7녀는 인생의 무거운 짐인 동시에 사랑의 결실이요 행복의 씨앗이었을 테니까. ‘어느 자식도 내게는 짐이 아니라 복이었다. 하늘이 내려주신 은혜였다’는 어머니의 지금 고백이, 백 년을 살아 온 어머니의 인생 결산서가 아닐까.

 

5) 기도

세상에 근심 없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 없는 집이 어디 있을까? 그러기에 성경에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였으리라.

 

나는 가끔 걱정이나 근심이 있으면 어머니에게 털어놓는다. 백세 어머니는 행동이나 생활에는 한 살 아기와 같지만, 인생의 무거운 과제 앞에서는 돌연히 담대한 어른이 되신다. 예를 들면, ‘왜 일하러 가지 않느냐? 이렇게 놀고 먹어도 되느냐’는 어머니에게, ‘경 안해도 일 헐 디가 어선 걱정이우다게. 이추룩 놀아도 살아지카 예?’라고 응수하면, 당장 표정이 달라지신다. 그저 어머니가 어떻게 반응하시나 보려는 은근한 장난임에도 불구하고, 금새 전형적인 어머니의 얼굴이 되시는 거다.

 

진지한 표정으로 정색을 하시고, 내 손을 단단히 붙잡고서는 자신있게 말씀하신다. “우리 주님이 다 마련하고 있어요. 우리 주님이 걱정하고 있어요!”라고. 어디에서 저런 표준말을 배우셨을까 싶게 품격 있는 언어가, 땅 속으로 꺼져가는 분위기를 당장에 하늘 위로 띄워 올리신다. 그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나와서, 초상집 같은 분위기를 잔칫집으로 역전시킨다.

 

사실 어머니의 담대함은 오래된 기도에서 나오는 영적인 카리스마다. 자식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만은, 우리 어머니의 기도는 특별한 데가 있다. 하루는 어머니가 일하는 밭으로 무작정 찾아간 적이 있다. 점심 때가 되었으니, 모시고 나가서 국수나 먹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집에서 어른 걸음으로 10분 거리에 있는 마을 안의 밭은, 어머니가 놀이 삼아 일할 만큼의 아주 조그만 과수원이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좀처럼 장난이나 놀이에 관심이 없는 내게, 그날은 이상스레 어머니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밭은 마을 안의 동산 위에 위치해 있어서 길가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게 한 눈에 들어오는 구조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왠일이지 싶어서 조심스레 밭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몸을 구푸려서 이구석 저구석을 살펴보는데...., 세상에! 어머니가 돌담 밑의 우묵한 곳에 무릎을 땅에 꿇고서 기도하고 계시는 게 아닌가.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게 어머니의 습관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밭에서까지 그렇게 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줄은 몰랐다. 아, 어머니는 무슨 사연이 저리도 많아서 땀흘리며 일하다가도 저렇게 신실한 모습으로 기도를 하시는 걸까? 하기야 미국에 두고 온 두 아들을 위한 기도일 수도 있고,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남의 일도 돌아보아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당부대로, 아프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중보기도일 수도 있으리라.

 

한참을 기다린 후에, 무릎을 펴신 어머니가 다시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막 도착한 것처럼 소프라노 음성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개구쟁이처럼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기도하다 들킨 게 어색하신 지, ‘뭐하러 밭에까지 왔느냐’고, ‘니가 손 댈 것도 없이 작은 밭’이라며 손사레를 치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있었다. “어머니, 오늘은 검질 그만 매곡, 나영 곹이 국수 먹으래나 가게 마씸!” 하고 어머니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국수’라는 말에 금새 얼굴이 화안해지신 어머니는, 어느새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가 되었다. 국수는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고, 면 종류라면 무엇이나 즐겨 드시는 어머니가, 우리에겐 모시기 편한 식사 손님이었다. 다행히 보목동의 중국집은 짬뽕이 유명해서 이따금 어머니의 입을 즐겁게 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곤 한다.

 

보목마을에 이사왔을 때, 섶섬 앞의 바닷가 길들은 비포장이었다. 구두미 포구의 볼레낭이 우거진 곳에는 움막 같은 것이 지어져 있었다. 보아하니 해녀 할머니들이 보름과 초하루를 정해 기도하는 곳 같았다. 이따금 치성을 드린 떡이나 과일 같은 것들이 바닷가 돌담 틈에 끼여 있기도 하였다. 지금은 깨끗이 정비된 자리에 올레꾼을 상대로 음료와 간식거리를 파는 포장마차가 자리해 있다. 어스름한 새벽에 조용히 찾아들어 기도하던 할머니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그 간절한 기도들을 드리시고 계실까?

 

어머니의 일생을 회고해 보니, 기도야 말로 어머니를 견디게 하고, 기다리게 하고, 울고 웃게 하면서 삶을 이끌어 준 힘이 되었던 듯 하다. 오늘도 날씨가 포근해지면 대문 앞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를 할 것이다. 어머니의 기도는 바람이요, 소원이요, 내려놓음이다. 혼자서 조용히 시간에 둘러싸여 있으면 습관적으로 두 손을 감싸안고 기도 태세로 들어가시는 어머니. 바로 저 두 손을 모으고 마음을 받쳐서 드리는 기도야 말로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에게 내려주신 하늘의 특권이요 선물이 아닐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함경환은 제주-시모노세키-오사카를 정기적으로 운항하던 여객선으로, 1928년 정월 초닷새에 대포 마을 자장코지 앞바당에 정박해 풍선(종선)으로 건너온 중문면 관내 승객들을 태우던 중, 갑자기 폭품이 몰아쳐 풍선이 침몰하는 바람에 종선에 탔던 주민 35명 중 32명이 사망하였다. (대포마을회, 큰갯마을, 2001)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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