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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집 안의 진짜 얼굴과 집 밖의 가짜 얼굴

추석이 보름 앞까지 다가왔다. 며칠 전부터 할머니 산소를 맡고 있는 언니의 마음이 분주하다. 2남 7녀가 있으니 구태여 다섯째 딸이 노심초사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쩌다가 한 번 앞장선 벌초가 자기 일, 그야말로 독박 벌초가 돼버렸다.

 

할머니 산소는 의외로 단정하였다. 주위의 묘들이 산발을 하고 있다면, 할머니는 머리카락이 어깨를 살짝 덮을 정도다. 늦가을이라면 오히려 찬바람을 가려주겠다 싶은 아늑함마저 느껴졌다. 그동안 산소를 염려할 아버지가 생각날 적마다 ‘산소에 와서 잡풀을 뽑았다’라는 언니의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인지 언니에 대한 미안함인지 모를 감정이 목에 걸려 얼얼했다.

 

 

언니의 등에 업혀서 산담에 올라앉은 어머니가 주위를 살피신다. 중문 오일시장으로 가는 외길과 아득히 내다보이는 바다, 나무에 달린 풋귤들이 기억을 되살린 것일까? 어쩐지 낯익어 보이는 비석을 가만히 살펴보더니, 돌 틈을 비집고 올라온 고사리를 뽑기 시작한다.

 

드디어 상황을 파악하셨나? ‘감히 우리 서러운 시어머니 산소에 줄기를 뻗치다니…'하는 자세로 잡풀들을 있는 힘껏 잡아채신다. 혹시나 넘어지면 어쩌나 싶어서 호미를 들고 선 내가 안절부절못하니, 언니가 큰 소리를 지른다.

 

“어머니 따문에 정옥이가 일을 못햄수게! 경 허당 넘어지민 큰 일 나난, 고만이 앉앙 감독이나 허십서!” 하는 사이에, 얼른 내가 어머니 뒤를 받치고 섰다. 이래저래 나는 놀고, 언니는 일복이 터졌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도 그랬다. 어른 만큼 일을 잘하는 언니는 어머니의 동지였다. 밭일, 논일, 심지어 물질도 어머니를 흡족하게 할 만큼 도움이 되었다. 그럴 때 나는 소를 보면서 동네 남자애들과 어울려 지네를 잡거나 만화책을 읽었다. 언니들과 함께 밭에서 김을 매다가 뒤처지면 엉엉 울면서 저만치 달려가서 골갱이로 땅을 냅다 파헤치던 나를, 아버지가 변호하셨단다. ‘정옥이는 성질이 급하고 욕심이 많아서 자기 뜻대로 안 되면 탈이 날 거니..., 너희들이 이해하고 좀 봐주라’라고.

 

비석을 보니 할머니는 1904년도 4월에 출생하셔서 1967년도 12월에 돌아가셨다. 64세를 사셨으니 딱 올해의 내 나이에 당신의 수명을 다하신 거다. 아버지가 아들(子)로, 오빠와 남동생이 손자(孫)로 새겨진 묘비명이 너무 단출해서 조금은 속상하다. 아버지의 슬하에 2남 7녀가 있으니, 7녀를 곁들여서 비문을 채웠으면 할머니도 얼마나 든든하실까.

 

생전에도 외로운 삶을 사셨던 할머니 산소를 30년 이상 벌초하면서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베어낸 풀들을 거두어서 산담 밑에 깔면서 언니가 중얼거렸다. 우리 할머니도 문중 산에 이장해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할머니 시대에는 우리 마을 할아버지들이 부인을 둘, 심지어 셋을 두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도 ‘돈을 벌어 오겠다’라며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부둣가에서 만난 처자를 둘째 부인으로 삼았다. 그 바람에 영문 모르고 내쳐진 할머니는 정신이 약간 나가서 마을의 외톨이가 되었고, 기독교를 전파하러 방문한 월평마을 전도부인에 의해 대포마을 최초의 기독교인이 되었다(이 얘기는 언젠가 본 지면에서 언급한 듯하다).

 

그럼에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할머니 인생을 두고 보면, 이 사실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것이 우리 할머니, 아버지, 우리들 삶의 결정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으니 말이다. 마치 나다니엘 호돈의 주홍글씨처럼 우리는 마을에서 ‘예수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가문이 번다하거나 여유가 있는 집들은 가족 묘지를 두어, 집안의 무덤들을 한군데로 모아서 관리를 하는 모양이다.

 

언니네 시댁도 그러다 보니, 할머니 산소를 벌초할 때마다 살아서도 외로웠던 할머니가 혼자 이렇게 남아 있는 게 매우 속상했으리라. 할머니와 조그만 추억이라도 간직한 우리 세대가 끝날 즈음 어느 날 할머니는 이 무덤을 떠나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묻히게 되려나….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가만히 손을 펴더니, 한 웅큼의 잔디 풀을 보여주신다. 어쩌면 올해가 당신의 마지막 벌초임을 생각하시는 걸까. 부디 마지막이 아니기를 기도한다. 어머니의 손을 꼬옥 붙잡고서 가을 하늘 바라보며 빌어본다. ‘제발 어머니 살아생전에 눈물 흘리지 않게, 외롭지 않게, 제가 정말 잘해드릴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고.

 

고백건대, 나는 불효자다. ‘백세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보통 ‘효자이십니다!’라고 의례적으로 말한다. 아, 나는 이 말이 가장 괴롭다.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차원의 말이 아니다. 실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내게, 두 얼굴이 있다. 집 안의 진짜 얼굴과 집 밖의 가짜 얼굴.

 

어머니의 치매는 102세 치고는 양반인 편이지만, 방바닥에 뱉어놓은 침에 발이 ‘미끈’ 하고 반응하면 목소리에 핏대가 오른다. ‘아무 데나 침을 뱉지 말라’고. ‘자꾸 그러면 어머니도 요양원에 갈 수밖에 없다’라는 으름장과 함께. 음식물을 씹다가 슬쩍 의자 밑이나 호주머니 속에 숨겨놓은 게 들통나면, 큰 소리가 또 나온다. 어쩔 줄 몰라서 쩔쩔매는 어머니와 ‘어떻게 사냐?’라며 소리치는 딸의 전쟁이 벌어지는 거다. 휴지를 찢어서 방안이나 거실 바닥에 마구 흩어 놓거나, 뭉쳐서 호주머니 여기저기 담아놓는 어머니는, 그저 세 살 아기를 닮았다. 그러니 문제를 지적하고, 고치려고 가르치고, 제발 내 입장도 헤아려 달라고 사정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날마다 한두 번씩 벌어지는 어머니와의 설전은, 누구도 알 수 없고 말릴 수도 없는 바보 같은 일상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방학을 맞아서 집에 온 아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진지한 얼굴로 어머니인 내게 하는 말이 전투태세다. “엄마가 자꾸 할머니에게 윽박지르듯이 소리지르면, 이렇게 무력한 할머니에게 잘못하시면, 이제부턴 방학해도 집에 오지 않을 거예요!”라고. 세상에! 억장이 무너지는,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다.

 

참담한 심정으로 진지하게 사과를 하였다. “엄마를 용서해 다오. 내가 정말 잘못했구나. 이렇게 지적을 해주어서 오히려 고맙다. 앞으로 조심할게. 잘 해볼게!”라고. 동시에 내심으론 회복이 일어났다. ‘그래 잘 해보자. 오죽하면 자식을 통해서 내 눈물을 미리 막아주시는가. 이렇게 남모르는 불효를 자행하다가, 어머니께서 정작 떠나시면 얼마나 울어대려고....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내 마음의 자세를 확실하게 해두기 위해, 학교로 떠나는 아들에게 진지하게 내 마음을 전했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교회에 가는 차를 할머니들과 함께 타곤 했어. 그런데 어느날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서 안부를 물어보면, 요양원에 들어가셨다는 거야. 아직은 정정해 보이시기에 사정을 알아보면, 아이들이 힘들어해서, 같이 살 수 없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보냈다는 거야. 우리가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지가 어느덧 22년이 되었네. 처음 10년은 할머니께서 우리를 도와주셨지. 엄마가 바쁘다고 집 밖으로 돌아다닐 때 ‘할머니 김치찌개가 최고!’라며 좋아하던 너희들 표정이 지금도 생각나. 그땐 정말 다행스럽고, 할머니가 천군만마 같더라. 그런데 엄마가 은퇴하고 할머니를 2년째 돌보다 보니…. 가끔 내가 뭘 하고 있지? 이러다가 내가 폭삭 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날이 있더란다. 그러면 할머니의 기저귀를 가는 것으로 시작되는 하루하루가 우울해지는 거야. 마치 할머니 때문에 내 인생이 멈춰버린 것처럼 좌절이 되고. 그래서 실은 ‘어머니의 백세 일기’라는 글도 써보고, 요양보호사·평생교육사·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따보고, 요즘은 손해평가사 공부를 시작해볼까 고민 중이네. 가끔은 이중섭 화백이 그려서 유명한 ‘섶섬이 보이는 풍경’ 앞에 앉아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그래도 주기적으로 할머니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는 나를 보면, 절망이 되고, 자신이 지겨워져.... 그런데, 네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거야. 그리고 앞으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 지가 깨달아지네. 일단 모든 욕심 내려놓고서, 할머니와 함께 쉬고, 졸고, 먹고, 자고를 생각 없이 해야겠어. 그냥 할머니의 일상에 나의 생체리듬을 맞춰서.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사랑하며 살아가야지 싶네.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네 생각을 하며 기도할게. 고마워, 아들! 다음 방학 때도 꼭 다시 보자!”

 

 

참고로 공설묘지 및 사설묘지에 설치된 분묘는 설치 기간이 30년이며, 1회에 한하여 30년이 연장되므로 최장 60년까지 지속 가능하다. 설치 면적은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15조에 따라 가족 묘지는 100㎡, 종중이나 문중묘지는 1000㎡, 법인묘지는 10만㎡ 이하로 제한된다. 특히 가족묘지는 도로나 하천에서 200m 이상 떨어진 곳에 설치해야 한다. 20가구 이상의 인가 밀집지역과도 300m 이상 이격해야 한다. 종중이나 문중묘지는 기준이 더 강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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