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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백세일기의 커튼콜 ... 인간극장 이야기

‘세상이 좁다’는 건 매스컴의 세계에 더 적합한 말이 아닐까. 적어도 이 글을 게재해 온 <제이누리>에 관한 한은,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어머니의 백세 일기를 여기에다 기록해 온 건, 순전히 어머니를 요양보호하면서 함께 버텨내는 삶이 버거운 탓이었다.

 

기실은, 어머니가 요양원의 주간보호(아침 9시~오후 5시)에 다니는 동안 몇 차례의 긴급 호출이 있었다. 내용은 ‘아무래도 병원에 모시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인데, 정황은 돌봄에 대한 애로와 곤란의 우회적 표현이었다.

 

주간보호는 활동력과 인지력이 단체 생활에 가능한 정도라서 사회복지사 한 사람이 여러 어르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머니처럼 손이 많이 가는 경우는 요양원에 입소해서 생활 전반을 전적으로 기관에 의존하는 게 적절하다. 다만 비용도 많이 요구되고, 집을 떠나야 하는 문제가 걸림돌이다. 더욱이 어머니는 ‘요양원에 보내지 않기’를 약속하고 한국으로 모셔 왔다.

 

보통 미국에서는 노인이 아프다 해서 병원으로 갔는데, ‘요양원으로 옮겼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얼마 없어 장례식장의 부고장이 날아든다. 바로 이 ‘병원-요양원-장례식장’의 루트가 어머니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미국 생활의 두려움이었다.

 

어쩌면 다니던 직장을 은퇴할 즈음, 내 손에 가장 먼저 잡혀들어온 게 요양보호사표준교재였음도 이 때문일 것이다. 평균 합격률이 90%에 달하는 요양보호사 시험은, 가족요양과 일자리를 동시에 해결해 주는 비결이었다.(실은 어느 요양원에 입사해 1주일쯤 근무를 하면서 요양원의 일상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거동의 자유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들어갈 때 2층이나 3층에 배정되면, 거의 그 자리가 생명이 꺼지는 날까지 고정석이 되었다. 1층으로 내려와서 땅을 밟아보는 일이란 도무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 같았다. 우리 어머니처럼 농사를 짓고 물질을 하면서 몸이 재빠르고 손발이 부지런한 사람에게, 요양원이란 그야말로 갇혀 지내는 감옥소나 다름없을 터였다. 요양병원을 일컬어 노인들 시체보관소란 말이 떠도는 현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암시하는 말이 아닐까.)

 

어느덧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지 22년. 아버지를 미국의 볼티모어 공원묘지에 매장하던 날, 땅속으로 들어가는 관을 얼싸안고 함께 묻히려는 어머니를 끌어내어 함께 돌아온 게 엊그제만 같다.

 

그동안 80세 어머니는 102세가 되셨다. 처음 10년 동안은 마치 서정주 시인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살림과 육아의 자리를 담담하게 감당하셨다. 아이들은 “할머니 김치찌개가 최고!”라며 엄지척을 하였고, 삶의 생기를 회복하신 어머니는 마치 미국으로 이민 가시던 60대 초반의 제주 여인으로 되돌아왔다.

 

물때가 되면 바당으로 나가서 보말을 잡으셨는데(그때는 동네 사람들이 썰물이 진 바다로 나가서 보말을 잡는 게 허용되었다), 그 바당 덕분에 어머니의 귀향은 급속히 제 자리를 잡는 듯 순조로웠다. 또한 전 재산을 팔고서 이민을 떠났던 어머니를 위해, 자녀들이 힘을 모아 고향 땅처럼 친근해 보이는 밭뙤기를 하나 사드렸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마을 안의 감귤밭은, 비탈진 게 미안한지 햇볕과 바람을 야무지게 끌어들였다. 눈을 뜨면 밭으로 가서 잡초를 뽑고, 물때가 되면 바다로 가서 보말을 잡는 사이, 어머니의 슬픔은 일상 속으로 스며들며 잦아들었다.

 

그 사이 마당의 잔디밭은 배추와 상추, 고추, 파 등이 자라는 우영팥(채마밭)으로 변했고, 집 주변의 바닷가는 칸나가 만발한 꽃밭이 되었다. 요즈음 올레꾼들은 이중섭 화백의 그림으로 유명한 ‘섶섬이 보이는 풍경’ 앞에서, 파도와 구름과 바람을 배경으로 칸나를 벗 삼아 사진을 찍는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지만, 꽃 덕분에 사진 속 얼굴 위로 미소가 피어난다.

 

 

김종두 시인의 ‘제주여인 6’은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두룩헐 때 일어낭(어스름에 일어나서), 물항 고득 물질어 나뒁(물항아리 가득 물을 길어 놓고), 솖아 낸 보리밥 혼 직 뜨는둥 마는둥(삶아 낸 보리밥 한 숟갈 뜨는 채 마는 채), 갈중이 걸치멍 빌레왓으로 내돌아십주(갈옷을 걸치면서 돌짝밭으로 내달렸습니다). 불벹 더위에 나앉앙(불볕 더위에 앉아서), 혼나절 지신검질 매당 보믄(한 나절 웃자란 잡초를 뽑다 보면), 4.3사태 때 죽은 아방(남편) 생각 남니께.’

 

어쩌면 어머니는 그 질긴 잔디 뿌리를 캐내고 흙을 골라서 채소를 심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며 땀 흘렸던 시절- 주상절리를 에워싸고 도는 대포마을에서 농사짓고, 물질하고, 10명을 낳아서 2남 7녀를 키웠던 때를 떠올리셨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아홉 자녀 중에서 가장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나의 삶터에다 당신의 마지막 땀과 기도를 쏟으셨다.

 

한편, 어머니와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소소함이 누군가에게는 모녀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로 비칠 수도 있음을, 나는 눈곱만큼도 헤아리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요양보호사가 될 적에는, ‘그 삶이 서너 달쯤이나 이어질 수 있을까’하는 아쉬움이 내 삶을 통째로 차지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맨 먼저 하는 일이, 어머니의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드리는 거다. 옷을 갈아입히고 거실로 나와서 흔들의자에 앉혀드린 후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어머니는 콩 고르기를 하신다. 까망·하양·주홍·노랑색 콩 중에서 같은 색깔의 콩을 별도의 그릇에 담아 놓는 게 작업이다. 그중에서 ‘주홍색 팥으로 저녁밥을 짓는다’는 게 나의 요구사항이고, 어머니는 부지런히 팥을 골라내신다. 마치 그 일이 당신의 존재 이유가 되는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신다. 안쓰러운 마음에 ‘이 일은 노는 것처럼 쉬엄 쉬엄 해도 되는 놀이’라고 이실직고를 해드려도, 어머니는 괘념치 않으시고 당신의 방식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신다.

 

그러저러한 일상을 <제이누리>에 실으면서, 내심 양심이 저려올 때가 있었는데, ‘어쩌면 어머니와 나의 생활이 글을 통해서 적당히 걸러지고 미화되고 있다’는 인식이었다. 이따금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할 때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고 대충 하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따뜻한 욕조 안에서 물장구도 치고, 머리는 여러 번 헹궈서 시원함을 만끽하고, 손과 발은 더 불려서 굳은살도 덜어내야 직성이 풀리실 터인데.....

 

그러나 이 모든 비리를 뒤덮고서 우리의 일상이 MBN의 특종세상이나 JTBC 등에 백세 어머니와 효녀의 아름다운 삶으로 묘사되었다. 그나마 이들은 짧은 에피소드 정도라서 적당히 넘어갈 만도 하였다. 하지만 지난 3월, KBS의 인간극장에서 ‘엄마의 102번째 봄’으로 송출된 어머니의 이야기는, 섶섬을 배경으로 펼쳐진 꿈결 같은 바다와 유채꽃이 무리 지어 흐드러진 들판, 고향 동네 친척과의 제주도다운 만남, 어머니의 전형적인 제주할망 역할로 인해 뜻밖의 고공행진을 기록하였다.

 

KBS1에서 주도한 촬영이 KBS2에도 방영이 되어, 지나가던 올레꾼들이 어머니를 만나보기 위해 집으로 들어오기도 하였다. 90세 노모를 모시고 여행을 온 어떤 가족은,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장수를 기원하는 효심을 드러냈는데, 어머니는 십 년은 더 젊어진 함박웃음으로 내년을 기약하며 ‘나보다 더 오래 살라’는 덕담을 해주셨다. 또 어느 교수님은 ‘햇살이 그리울수록’이란 시집에서 ‘어머니’란 제목을 손수 골라 한지에다 붓글씨를 쓰고 와서 어머니께 선물하였다. ‘만약에 나에게도 다음 생(生)이 있다면, 한 번만 한 번만 더 당신 자식이 되고 싶지만, 어머니 또 힘들게 할까 봐 바랄 수가 없어라’는 내용이, 우리의 심금을 울려서 한동안 말을 잃게 하였다.

 

요즘 들어 어머니는 인간극장이 무색하게 심신이 쇠약해지셨다. 엊그제는 콩을 고르다가 바늘로 이리저리 찔러보더니, 속상한 듯 내던지며 푸념을 하셨다. “이 고매기는 아명해도 못 까키여게(아무래도 못 까겠다). 무사 잡앙 와시니(왜 잡아 온 거니)? 가져당 데껴불곡(가져가서 던져버리고), 다신 잡아오지 말라 이! 얼마 먹지 못허게 생겼져. 대포바당 고매기영 하영(많이) 틀리네. 경해도 혼 번 더 솖아그네 다시 열어보카 이(그래도 한 번 더 삶아서 다시 열어볼까)?”

 

오늘은 마당을 가리키며 기분 좋은 얼굴로 나를 부르신다. “호박잎이 어랑어랑 국 끓이민 좋키여. 고루 카 놩 끓이민 맛 이실 건디 이!(가루를 타 놓고 끓이면 맛이 있을 건데) 고루 어시민 쏠 씻은 튼물에 끓여도 좋은디(가루 없으면 쌀 씻은 뜨물에 끓여도 좋은데)....”라고 하신다.

 

 

아무래도 우리 어머니는 할 일이 있으면 기운이 나시는 게, 영락없는 제주도 할망이시다. 인간극장을 하고 나서부터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우리를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한다. 미안스럽다. 어떤 분들은 나를 보고 효녀라 부르기도 하는데, 솔직히 민망스럽다. 본의 아니게 속이는 것도 같아서, 마음 한 켠에 그늘이 내려앉는다.

 

그러던 차에 문자가 한 통 날아들었다. ‘요즈음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안부가 궁금합니다. 다시 소식을 읽을 수 있으면 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만....’이라고. 문득 ‘커튼콜’이란 말이 떠올랐다. 연극이나 음악회 같은 공연에서, 관객들이 찬사의 표시로 환성과 박수를 보내어, 무대에서 퇴장한 출연자를 무대의 막 앞으로 다시 나오게 하는 일이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한 사람이 우리를 불러낸다면, 있을 때 잘해야 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오랜만에 이 자리로 돌아오고 보니, 어느새 봄이 지나 여름도 중반을 지나고 있다.

 

모처럼 돌아온 이 자리에 기대어서, 어머니가 올여름도 무사히 보내실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 모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마음 기울여 들어주는 여러분들 덕택에, 오늘도 어머니는 열심히 콩고르기를 하신다. 마치 그래야만 당신의 하루에 밥 먹을 자격이 부여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서 일어나서 호박잎을 따다가 밀가루를 풀어놓아 국을 끓여야 하겠다. 제주도 어머니들이 한결같이 추천하는 이 계절의 보양식, 호박잎국을.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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