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1 (토)

  • 흐림동두천 -1.3℃
  • 구름조금강릉 5.9℃
  • 박무서울 0.6℃
  • 구름많음대전 2.6℃
  • 구름조금대구 5.4℃
  • 구름많음울산 3.0℃
  • 광주 4.9℃
  • 구름조금부산 6.2℃
  • 구름많음고창 3.5℃
  • 구름많음제주 7.5℃
  • 구름많음강화 -0.7℃
  • 구름많음보은 1.3℃
  • 흐림금산 1.8℃
  • 구름많음강진군 5.8℃
  • 구름많음경주시 4.8℃
  • 구름많음거제 7.3℃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어머니의 100세 일기] 빛 바랜 저승옷에 남겨진 어머니의 땀방울

한 해를 무탈하게 보내게 됨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2023년을 보내는 12월의 끝 무렵, 그 마지막 주는 참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아마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 저녁 무렵이었던 듯 합니다. 어머니가 동녘방에 가시더니 무언가를 가슴에 소중히 품고 오셨습니다.

 

어느날 마치 골목에서 정신 없이 놀던 아이들이, “춘자야,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저마다 집을 향해 신바람나게 달려갈 때의 상기된 얼굴을 닮았습니다. “정옥아, 내일은 이 옷 입곡 손 심엉(잡고) 교회에 곹이 가게 이!”라는 어머니의 표정이 사뭇 진지합니다.

 

두 손으로 소중하게 받쳐서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아, 빛이 바랜 저고리였습니다. 하얀 색이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서 누렇게 퇴색된 것일까요. 어머니의 화안한 미소와 달리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것은,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싶은 저승옷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입고 가신다며, 아마 70대 초반에 마련해 놓으셨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30년 세월을 장롱 깊숙한 곳에서 숨을 죽이며 지내느라, 저 옷도 속이 많이 저렸던가 봅니다. 글쎄요. 요즘은 장례업자가 관이고 수의고 일체를 세트로 계약해서 장례를 치른다니, 저 수의를 입고나 가실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어머니의 수의를 조심스레 받아들고서, 침대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 모습 그대로를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면서 생긴 습관이, 웬만하면 사진을 찍어놓는 것입니다. 추억일지, 기억일지, 사진을 쳐다보고 있으면, 그 때 일이 바로 주마등처럼 눈 앞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게 어머니와 함께 20년을 살아오면서 제게 남겨진 유산입니다. 이보다 더 귀한, 다른 것은 없으니까요. 2남7녀를 두신 100세 어머니에게, 그 이상의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참, 어머니는 처음 이곳으로 이사오면서 동녘방을 원룸으로 만들어서 당신 혼자 부엌을 쓰시면서 사셨습니다. 제주도 어르신들은 자리젓이나 마농지 같은 제주음식을 자유롭게 드셔야 하니까요. 그런데 90이 되시던 어느날 밤, 베개를 안고 우리 방으로 오셨습니다. “나 혼자 무서워서 도무지 잘 수가 없다”시면서. 그래서 저의 룸메이트는 어머니 방으로 가고, 어머니는 제 방의 동숙인이 되었습니다. 그 세월이 어느새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의 때문일까요? 2024년 1월 1일 새벽 5시에, 저는 “어머니, 눈을 뜹서, 홑썰만 어떵 해봅서게!” 하면서 애타게 소리치는 일에 직면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방 안에 놓여진 이동식 변기에 앉아서 끙끙 대는데, 도무지 큰 일의 진척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서 누우시라 해놓고 아랫배를 눌러보았습니다.

 

세상에! 무슨 커다란 돌덩어리, 암반 같은 것이 아랫배를 짓누르듯이 들어앉아 있는 게 아닙니까. 이런 상황이라면 어머니가 아무리 용을 써보아도 요지부동, 꼼짝달싹 할 리가 없겠습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비닐장갑을 끼고서 석탄을 캐듯이 그 딱딱한 덩어리의 정체를 두드려보았습니다. 아, 이런 상황을 두고서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하나 봅니다.

 

어머니는 ‘아프다’고 소리 소리지르는데, 아무리 두드리고 파내보아도 부스러기가 조금 떨어져 나올 뿐, 일의 진척이나 성공 가능성은 전무해 보입니다. 갑자기 덜컥 하고 겁이 나는데, ‘이러다가 큰 일 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 병원 응급실로 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그리고..., 새해 벽두에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은 당혹감과 절망감이라니....

 

하는 수 없이 가까운 곳에 사는 언니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아닌 밤 중에 전화를 받은 언니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더니, 한숨에 달려 왔습니다. 상황을 들여다 보고서는, 갖고 온 콜드크림을 항문 주위에 바르고 한 손으로는 어머니의 배를 문지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변을 파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미안허우다 예! 매일 아침 변비약을 드려야 허는디, 나가 오꼬시 대음해연(내가 그만 주의를 안 기울여서)..., 어머니를 이추룩 고생시켜점수다게.... 어머니, 홑썰만(조금만) 촘읍서 예. 어떵 힘을 내봅서게!” 하면서, 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얼마 동안 용을 쓰며 애를 쓰고 있으려니, 마침내 엄청난 대변이 배출되었습니다.

 

‘아, 이제 살았구나’ 싶은 안도와 함께 언니로부터 엄중한 주의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격증 있는 간호사나 의사가 하는 일, 면허 없는 우리가 하면 불법한 일이다. 그러니 아침 저녁으로 혈압약 치매약 드릴 때, 잊지 말고 변비약을 드려라. 어머니처럼 운동도 안 하고 드시기만 하는 어른들은, 요양원에서도 식사 때마다 변비약을 드린다...’라고.

 

그렇게 폭풍치듯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에, 저는 침대 위에 펼쳐진 저승옷을 찬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두 개의 옷고름 끝자락에 마치 눈물자욱처럼 작은 동그라미가 진한 색깔로 오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승옷을 만들고 나서, 아니면 살짜기 펼쳐보다가, 어머니가 눈물방울을 떨어뜨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

 

30년을 장롱 속에 들어 있다가 나와서, 어머니의 대변 사건을 무사히 지나가게 해주었으니, 분명 이 옷은 살아 생전의 사명이 있는, 특별한 수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수의를 침대 위에 그냥 펼쳐 놓기로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수호천사처럼 언제나 어머니를 바라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새해 아침, 우리집 앞, 섶섬이 보이는 바닷가에는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촘촘하게 줄을 섰습니다. 저마다 핸드폰을 치켜 들고서, 제일 먼저 해 뜨는 모습을 자기 카메라에 담으려는 자세입니다. 서귀포에서는 외돌개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일출의 명소입니다만, 저희 집 앞도, 일찌기 이중섭화백이 그려서 유명해진 ‘섶섬이 보이는 풍경’으로 해서, 은근하게 알려졌나 봅니다. 해마다 새해를 맞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해가 구름 사이로 붉은 기운을 드러내며 용트림을 하자, 언니가 내 손을 꼬옥 잡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새해에는 내 동생이 몸도 마음도 평안하게, 기쁘고 행복하고 감사한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저는 ‘우리 어머니가, 올해도 새 봄을 건강하게 맞이하고, 3월의 생신에 이 자리에서 인생의 가족사진을 다시 찍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새해가 되자 주위 분들이 부쩍, ‘이제는 어머니를 보내드리라’고 합니다. 너무 오래 사는 것도 복이 아니라고. 본인도 무거운 몸을 끌고 살아가는 게 그리 좋지만을 않을 거라고. 올해도 102세가 되신 어머니가 이따금 당신의 몸을 지탱하는 게 힘들어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생사화복(生死禍福)이 하늘에 달렸는데, 그것을 어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할 수 있다면, 저는 언제까지나 어머니가 제 곁에 살아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압니다. 어머니가 저렇게 “살려줍서”를 습관처럼 읇조리면서,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당신을 위한 기원이 아니라, 나를 위한 기도임을. “하나님 아바지, 우리 정옥이 새해에도 아프지 말곡, 뛰어 댕기명 부지런히 일허곡, 놈을 도와주멍 살아가게 해줍서!”라는 어머니의 기도가 있어서, 오늘도 이 글을 쓸 수 있음도. 고백컨대, 어머니가 있어서 시작한 백세 일기 덕분에, 노인의 초입에 들어서는 내 마음이 수채화처럼 담담하게 펼쳐지고 있음을.

 

새해,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일에, 하늘의 미소가 봄 여름 가을 겨울 눈부신 햇살로 비쳐드시길 축복하며 기원합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추천 반대
추천
4명
100%
반대
0명
0%

총 4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69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