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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어머니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

 

전화가 왔다. “여기는 동사무소인데요, 김성춘 할머니께서 청려장 대상이십니다. 신청하실 건가요?” “물론이우다……. 고맙수다....” 오랜만에 들려 온 기쁜 소식이다. ‘가문의 영광’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하지만 나지막하게 절제된 목소리에, 그만 나의 고조된 감정이 어색해지고 만다.

 

만 백세가, 어디 보통 일인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도달한 건데... 얼마나 대단하고, 감사하고, 귀하고, 드문 일인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00살까지 생존할 확률은 여성이 약 5.6%, 남성이 1.5%에 불과하다. 이왕이면 목소리에 좀 리듬을 넣어서 ‘축하합니다!'라고 말해주면 좀 좋을까.

 

드디어 우리 어머니도 청려장을 받게 되시나 보다. 우리나라는 1993년부터 노인의 날(10월 2일)에, 100세를 맞은 노인들에게 대통령 명의의 청려장을 드리고 있다. 청려장은 예로부터 건강과 장수를 상징해, 일명 ‘장수지팡이’로 불린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권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에 따르면, ‘봄 정월에 김유신이 퇴로하기를 청하매,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궤장을 내리었다.’ ‘퇴노’는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고령을 이유로 관직에서 떠나기를 청하는 김유신에게, 임금은 허락 대신에 ‘궤장’을 내렸다. 궤장은 팔을 의지할 수 있는 목기와 지팡이를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는 들어서는 궤장 제도를 ‘경국대전’에 법제화했다. ‘정1품의 관원으로 나이가 70이 지났는데도 국가의 중요한 일에 관계해 치사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궤장(几杖)을 하사한다.’는 대목이 존재한다. 민간에서는 일정 나이마다 청려장을 만들어 선물하는 것을 도리로 생각했다.

 

먼저, 50세가 되었을 때 자식이 부모에게 청려장을 바쳤다. 이를 가장(家杖)이라고 부른다. 60세가 되면, 마을 차원에서 연로한 노인에게 지팡이를 선물했다. 이를 향장(鄕杖)이라고 불렀다. 70세부터는 국가 차원에서 장수 노인들을 예우했다. 70살이 되는 노인들을 예우하고자 나라에서 청려장을 주는 관습인 국장(國杖)이 존재했다. 80세를 맞은 노인들에게는 임금이 직접 청려장을 하사했다. 이를 조장(朝杖)이라고 불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로, 미국과 영국에서는 100세 생신을 맞은 어르신께 대통령 부부, 왕이 생일 축하카드를 발송한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70, 80을 넘어 100세를 맞는 노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2023년 6월말 현재, 100세를 맞은 노인은 9036명으로, 남자 1520명, 여자 7516명이다. 제주도는 100세 이상이 323명으로, 남자 16명, 여자 307명이다.

 

어머니가 100세를 사시면서 청려장을 받게 된 것은, ‘하늘의 은혜’라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불가사이한 일로 비쳐질 것이다. 동네 분들은 어머니가 해내는 밭일·논일·바당일이나 등에 지고 가는 억척스런 짐을 보면서 혀를 내두르곤 하였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늘 돌인들 무거우랴. 늙기도 설워라커늘 짐을 조차 지실까’라고 읊었던 정철이 보았다면, 얼른 달려와서 등을 받쳐주었으리라.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사정을 잘 아는 동녘집 옥자 어멍은, 입버릇처럼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하곤 하였다. “정열이 어멍아, 몸을 홑썰만 애끼라 이! 그추룩 일허당 60만 되민 앉은뱅이가 되불거여. 몸 버치게 일허는 것도 혼이 싯주. 죽어라 허멍 일만 일만 허는디, 어떵 니 몸이 전디어 낼 거니? 경 허당, 어느 날 아침 못 일어나민, 그게 저승이여....”.

 

사실, 옥자 어멍 말은, 반은 걱정, 반은 예상이었다. 어머니가 백세를 사시는 것은, 그 삶을 함께 견뎌 온 아버지 가슴에도 ‘오직 은혜’로만 느껴졌던 터. 어머니의 지나친 부지런과 억척스러움을 아시는 아버지는 침과 뜸을 배우셨다. 농번기에 앓는 소리를 내는 어머니를 위해 부황도 뜨셨다. 그러니, 내가 퉁명스럽게 굴거나, 서운하게 잔소리를 해대면, ‘허태행씨는 어디로 갔나?’라며 아버지를 찾으신다. 사랑이 그리우신 게다. 진심어린 돌봄, 가슴 따뜻한 말 한 마디가 필요한 어머니. ‘재미지게 살다가 천천히 오라’던 아버지의 음성이, 요즘은 이따금씩 가슴을 울리시는가 보다.

 

어머니의 한 평생을 생각하면, 오직 일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기야, 우리 어머니만 그랬을까? 김종두 선생님의 시에 등장하는 ‘제주여인’들이 다 그리 하였지 싶다. ‘아명허민 못사느냐. 조름 붙이지 마랑 탕근도 졸곡 물질도 허멍 시집 어른 뜻받앙 살암시믄 살아진다’며, ‘어두룩헐 때 일어낭, 물항 고득 물질어 놔뒁, 솖아낸 보리밥 혼 적 뜨는둥 마는둥, 갈중이 걸치멍 빌레왓으로 내돌아야 했던 삶이니....

 

이렇게 일만 하고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에게도, 모든 짐 내려놓고 편안하게 웃을 일, 진정으로 기쁜 일이 있었을까? 지난주에는 문득, 어머니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 언제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팔십이 다 되어 가는 큰언니로부터 막내에 이르기까지 전화로 물어보았다. 그 중에서 내 가슴을 가장 아프게 울리는 게, 여섯 번째 딸의 답이다. “빚을 다 갚았을 때가 아닐까?”.

 

그래, 그럴 꺼다. 그렇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마을에서 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된 어머니. 그로 인해 눈물을 삼키며 예수쟁이가 된 아버지는, 그 때문에 종가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제사를 지내고 재산을 물려받을 것인지, 아니면 예수를 믿고 종손의 자리를 내놓겠는 지의 갈림길에서 교회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길로 가문에서 내쳐진 아버지와 어머니는, 남의 집에 살면서 남의 밭을 병작하며 살아갔으니... 모든 게 빚이었다.

 

설상가상으로 2남7녀나 된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일은, 아버지가 가문에서 내쳐질 때 굳게 결심한 바라, 조금도 양보할 수가 없는 일. 그래서 날마다 늘어나는 빚을 갚기 위해, ‘남보다 두 배로, 밤낮으로 일하기’를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 불철주야 밤을 낮 삼아 일하며,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가훈을 내걸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주석까지 달아놓고서. 하지만 봄의 보리·유채 농사와 가을의 고구마 수확 외에는 돈이 나오지 않는 농업구조를 극복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생기는 게 빚이고, 목돈을 갚기 위해 계를 들었으니 빚으로 빚을 갚는 격이 되었다.

 

하늘의 도움으로 어머니의 물질이 한 몫을 더하였지만, 수확기 외에는 현금이 돌지 않는 농촌경제에서 아침마다 벌어지는 등교전쟁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크고 작은 아이들이 일제히 줄을 서서, 학교에 가져 갈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모습이라니....

 

다행히 2남 7녀 중 위로 두 명이 제주시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취직을 위해서 각자가 한 명씩 동생을 책임지기로 하고서.... 그러나 어디 인생이 그렇게 계산대로 계획대로 되는 일이던가? 남의 집에 들어가 가사를 돕거나 병원 같은 곳에서 간호조무사를 하는 등이 고졸 여성이 얻을 수 있는 직업의 한계였으리라. 그리고 20대 중반에는 결혼을 해야 하는 사회구조였으니, 언제 부모를 도와서 자신의 학비를 보상해낼 것인가. 게다가 학력은 인플레가 되기 시작해, 막내딸에 이르러서는 대학에 가는 게 사회의 주류가 되었으니....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밀감이 도입되면서 농업구조에 혁신이 일었다. 고구마를 심던 기정목 밭을 과수원으로 만들고 집도 새로 지었다. 기정목(밭이 낭떠러지 옆에 위치해 있어서 불린 지명)은 집을 짓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건축을 맡아준 조카가, 자기를 키워준 이모에게 은혜를 갚는다며, 집의 기초를 튼튼하게 구축했다.

 

그렇게 집을 완성할 즈음, 평생을 짓눌러 오던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어머니는, 환갑이었다. “정심아, 고맙다, 이! 이제 빚을 다 가물았져. 이제부턴 다리 뻗엉 자도 되키여게!”(고맙다. 이제 빚 다 갚았다. 이제부턴 다리 뻗고 자도 되겠다)라며 기뻐하시던 어머니의 얼굴. 그 얼굴이, 언니가 이제까지 보아 온 어머니의 가장 해맑은 웃음, 사노라니 웃을 일도 있구나 싶게 찬란히 빛나는 안색, 눈물이 핑 돌게 하는 감격스런 표정이었다. 사실, 언니는 학교를 졸업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번 저금을, 시집가기 위해 집에 내려온 사이에, 어머니를 위해 많이 헐었다.

 

이 글을 쓰는 아침 시간, 무더위를 예고하는 일기예보가 걱정스러운지 집에 들른 언니가, 어머니를 모시고 간다. 101세 어머니와 65세 언니의 뒷모습이 서로가 닮아 있다. 어쩌다 세월이 이렇게 흘러서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되었다. 하지만 100년을 살아가는 세상에서 60대는 청년이라는 말이, 언니를 두고 하는 말이다. 몸과 맘이 튼튼해서 언제나 유쾌하고 씩씩하고 부지런한 언니. 가장 어머니와 함께 오래 살면서 자기의 청년기 동안 어머니의 짐을 같이 져주었던 언니. 그런 딸이 어머니처럼 좋은지, 거의 안기다시피 언니에게 기대는 우리 어머니는.... 참 좋겠다.

 

‘딸이 없는 네가 걱정’이라는 어머니는 딸을 일곱이나 두셨으니, 얼마나 좋으시랴. 올 여름 들어 가장 햇볕이 뜨겁다는 하늘이, 어머니의 머리 위에서 찬란하게 웃는다. 지글거리는 태양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어머니는, 한 살 아기가 되어 딸의 어깨에 몸을 기댄다. 오늘따라 지팡이도 가볍게 대문을 나선다. 이 여름이 어머니 생애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 되기를 기원한다. 빚을 다 갚았을 때 그토록 기뻤던 그 날보다 더 희망차게, 대통령이 선사하는 청려장을 짚고서 섶섬 앞 올레길을 기운차게 걸으시길. 설문대 할망보다 더 넉넉한 웃음으로 저 바다를 끌어안고서, ‘호오이 호오잇!’ 하며 힘차게 물질하는 꿈을 꾸시기를. 어머니 생애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 이 여름이기 되시길 기도해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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