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렇게도 기다리던 청려장이 도착했단다. 전화연락을 받고 한숨에 달려간 동사무소에는, 어린 아이 키만한 기다란 상자가 새하얀 얼굴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너로구나! 우리가 그렇게 기다렸던 네가, 드디어 산 넘고 바다 건너 우리 동네까지 무사히 도착했구나....
청려장을 받아 안으신 어머니는, “게무로사 이 늙은이를 제게 죽어불랜 안 해영, 촘으로 이 지팽이를 대통령이 나한티 보내시냐?(기실로 이 노인을 빨리 죽어버리라 안 하고, 진짜로 이 지팡이를 대통령이 보냈느냐)”라시며, 믿을 수 없어 하셨다.
“어머니, 뜯엉 보민 알아질테주 마씸. 정성이 보이민 어머니가 오래 사난 고맙수댄 허멍 축하허는 표시곡, 경 안 허민 그냥 보내는 거랜 단체로 효도 선전허는 걸 텝주!” ‘게매이....’ 하면서 여전히 못 미더운 얼굴로 상자를 걱정스레 바라보시는 어머니 앞에서, 흰색 상자를 뜯으니, 군청색 천으로 곱게 싸여 있는 게 나타났다. “아고게! 어머니, 아명해도 막 좋은 거 닮수다. 이추룩 또 푸대에 다시 싼 걸 보난...” 그 헝겊 싸개를 조심스레 벗기니, 세상에..., “쨘!” 하고서 황토색 지팡이가 번쩍이는 몸통을 드러냈다.
지팡이 맨 위쪽에 태극기 문양이 박혀 있는 게, 모름지기 대통령의 선물임을 증명해 보이는 표식과 같다. “어머니, 여기 봅써! 우리나라 태극기가 붙어 이수게. 경허고, 이디 ‘청려장’이랜도 써전 이수다. 오래 살단 보난 이추룩 좋은 선물도 받고... 어머니, 축하햄수다 예!”. “게메이, 이 짚팽인 잘도 개붑고, 모냥도 벨쪼여! 난 나라를 위해영 헌 게 베랑 어신 늙은인디, 이추룩 공꺼로 받으만 해도 되카 이?(글쎄다, 이 지팡이는 아주 가볍고, 모양도 별나다! 나는 나라를 위해서 한 게 별로 없는 노인인데, 이렇게 공짜로 받기만 해도 될까)”라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 위로 미안한 그늘이 덮힌다.
“어머니, 백 설을 사는 게 어디 경 쉬운 일이우꽈? 마음대로 결심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멍 여기까지 오는 게, 어디 어머니 노력이우꽈? 하늘이 도와주신 거주. 경 허곡, 어머니추룩 열심히 산 할망이 어디 이수과? 2남7녀 아홉명을 낳아 놓으난, 우리도 어머니추룩 열심히 살아보젠 노력햄수게!”
어머니와 청려장을 마당에서 찍고, 좋아하시는 섶섬 앞에서도 찍고, 거실에서도 찍었다. 사진마다에서 활짝 웃으시는 걸 보면, 어머니도 속으로는 기분이 매우 좋으신 게다. 거실 쇼파에 누워서도 청려장을 꼭 안고 주무시는 모습이, 마치 어린 아이처럼 순진무구해 보인다.
어머니의 인생이 이렇게 백세까지 이어질 줄을, 이토록 아름답게 장식될 줄을, 누가 어이 알았으랴. 다섯 살에 아버지를 함경환 사건으로 여의고, 눈물로 장례를 치루느라 어린 자식의 배고픔을 모르는 어머니 몰래, 살짝이 일곱살짜리 오라방이 누이 손을 이끌고 이웃집 장례에 가서 밥을 얻어먹이는 모습을, 하늘도 눈물겹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어머니의 생애에서 가장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외할아버지 김광용님은, 함경환 사건으로 이 세상을 바람처러 떠나셨다. 이 사건은 1928년 정월 초닷새 날에, 우리 고향 대포리 큰갯물 포구에서 남쪽 앞바다로 뻗은 ‘코지’ 바당 동남쪽, 몰레바당에 정박한 모선(함경환)에 종선(풍선)으로 싣고 간 대포 주민들을 승선시키려던 찰나, 돌풍이 불어서 풍선이 뒤집히는 바람에 35명 중 32명이 사망한 사건이다(큰갯마을, 대포마을회, P.241).
할아버지는 당시 건장한 40대 장년이라, 어찌어찌 모선에 올라갈 수 있었는데, 아기를 업고 허우적거리는 이웃집 아지망이 “삼춘, 우리 아기도 어떵 살려줍서!” 하는 바람에, 다시 바다에 뛰어들어서 파도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할머니 임하용님은 그 할아버지의 신발 한 쪽이라도 찾아서 장례를 치루려고 그 미친 바닷가를 울부짖으며 헤매고 다녔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어서 빈 상여로 장례를 치뤘다.
이제 와서 손녀인 내가 그 상황을 떠올려 보아도 이렇게 가슴이 저리고 어머니가 안쓰러운데..., 어머니는, 외할머니는,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얼마나 애간장이 끊어질 듯 아프셨을까? 그래서 그 하늘이 막내딸-‘성춘’이라 이름붙여주고, 일본 가서 돈을 한아름 벌어다 꽃고무신을 사오신다던 외할아버지의 생명같은 자식을 백살까지, 그래 외할아버지의 여생을 덧붙여서 만 백살을 넘어서 101세까지 여한 없이 살게 하셨을까?
이 글을 쓰는 시간, 어머니는 청려장을 옆에 안고서 낮잠을 주무신다. 마치 당신의 분신인 양, 청려장을 받으시면서부터 저리도 아끼고 귀애하시며 만족해 하신다. 어찌 보면, 청려장을 받으신 후부터 어머니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빛이 소망처럼, 사랑처럼, 햇살같이 아른거린다. 사랑을 받는 사람처럼, 아니 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열여덟 처녀처럼 상기된 얼굴에서 행복이 피어난다. 아, ‘청려장 효과’인가 보다.
청려장은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다. 명아주는 밭이나 들에서 흔히 자생하는 한해살이 식물인데, 가을(10월에서 11월이 적기)에 채취해서 다듬은 후 솥에 쪄서 껍질을 벗기고, 그늘에서 1개월 이상 말린 다음, 건조된 명아주를 깎고 다듬어서 옻칠(붉은 황토색)을 하면 멋진 지팡이로 재탄생한다.
또한 명아주는 예로부터 심장에 좋은 식물로 몸에 지니고 있어도 효력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명아주로 만든 청려장은 효자들이 부모에게 바치는 선물이었다. 통일신라 때부터는 임금이 장수노인에게 하사하는 전통이 내려져 오면서, 도산서원에도 퇴계 선생이 사용하던 청려장이 보존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지난 92년부터 노인의 날에 100세가 되는 노인들에게 장수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청려장을 선물로 주고 있다. 올해도 10월 2일, ‘노인의 날’을 맞이해서 정부가 100세를 맞은 노인 2623명(남자 550명, 여자 2073명)에게 청려장을 증정했다.
9월말 기준으로 제주도의 100세 이상 인구는 남자 15명, 여자 294명, 합해서 309명이 된다. 적어도 이 309명의 어르신들에게는 청려장이 전달되었을 것으로 보아진다. 청려장 증정 대상은 주민등록상 100세인 노인은 물론, 주민등록과는 다르지만 실제 나이가 100세로 명확하게 확인된 이들을 모두 포함한다. 청려장을 받으신 어르신들이, 우리 어머니처럼 기분이 좋아져서 식사도 더 잘하시고, 마당에 나가 걷기도 더 잘하실 줄 믿는다. 적어도 이번 주 1주일만이라도 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한다.
한편, 나비효과는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대기에 영향을 미치고 시간이 지나면서 증폭되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처럼 미세한 변화, 작은 차이, 사소한 사건이 추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나 파장으로 이어지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사실, 지팡이 하나가 무슨 그리 건강 증진, 생명 연장의 효과가 있을까 싶지만... 참,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경우에는 눈에 띄게 가시적인 효과를 관찰할 수 있다. 여름을 지나면서 많이 쇄약해지셔서, 요즘은 낮에도 당신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계속 꾸벅꾸벅 조시다가 힘드시면 소파에 누워서 주무신다. 이러다가 밀감이 노랗게 익어서 온 들판이 귤림추색으로 물드는 영주십경을 보지 못하시면 어쩌나 싶어서 마음을 졸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청려장 받으시더니 쓰다듬고, 안아보고, 짚어보면서, ‘촘말로 개붑고 펜안허다(정말로 가볍고 편안하다)’며 만족해 하신다.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지는 듯, 표정과 안색이 한층 밝아지셨다. 지팡이가 두 아들, 일곱 딸, 2남7녀보다 낫구나, 싶다. ‘청려장 효과’가 참으로 크다.
이 청려장 효과가 우리나라의 노인정책에도 앞으로 적잖은 영향을 미칠 듯 하다. 보건복지부 1차관이 노인의 날 행사에서 대통령을 대신해 청려장을 증정한 다음, 다음과 같은 약속의 말을 하였다. “보건복지부는 노인 인구 천만 시대를 맞아 어르신들이 건강하고 활기찬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며, 생활에 불편하신 점이 없는지 꼼꼼히 살피고 챙기겠습니다. 내년도 노인복지 예산을 올해보다 10.3% 늘린 25.6조 원을 편성하여 노인일자리를 역대 최고 수준인 103만 개까지 확대하고, 기초연금도 33.4만 원으로 인상하는 등 어르신들의 소득, 건강, 돌봄 등 복지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가겠습니다”
이 약속이 그가 전달한 청려장의 귀에 들린대로, 전국적으로 청려장이 함께하는 어르신들의 생활터전에서 성실하게 지켜지기를 기대해 본다. 또한 ‘장수의 섬’으로 명성을 날리던 제주도가, 이제는 그 이름을 첨단시설과 유명병원이 많은 서울·경기 지역으로 이전하고 말았지만, ‘백세 노인들이 가장 많은 불노초의 섬’으로 건강하게 알려지기를 소망해 본다.
아, 가을이다. 이 가을에는 제주도의 백세 어르신들이 서로에게 “힘내라!”는 격려사를 날리면서, 309개의 청려장이 한라산 백록담에 녹담만설(鹿潭晩雪)의 영주십경이 펼쳐질 때까지 저마다의 사명을 다해주기를..... 기대하며 응원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