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103세가 되신 어머니가 새삼 외로워 보인다. ‘누구라도 찾아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기도가 되었을까? 일요일 오후에 동생이 찾아왔다. 뜻밖의 방문에 ‘왠 일이냐?’고 놀라는 내게 동생은 햇살 같은 웃음으로 치킨을 들이민다.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다. ‘요즘은 병원에서 어머니 약을 타려면 주민등록증이 꼭 필요하다’는 동생이 오늘따라 더욱 착하고 예쁘게 보인다.
2남 7녀 중 8번째인 동생에게 아버지는 왜 정례(貞禮)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을까? 정열(悅: 기쁨)·정복(福: 축복)·정희(喜: 기쁨)라고 셋째딸을 첫번째를 맞을 때와 같이 기쁨으로 맞으신 후, 정숙(淑: 맑음)·정심(心: 마음)·정옥(玉: 구슬)이라 이름지으시고서, 마지막에 예(禮: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고 하심은 무슨 깊은 뜻이실까.
어쨌든 정례는 부모님의 사랑을 한껏 받으면서 착하고 예쁘게 자랐다. 밭·바다·시장 등에서 하는 어머니의 온갖 궂은일에 7번째 정옥이까지 포함시켜 노동력을 확보하면서도 언제나 막내는 예외였다. 그래서인지 정례는 어디서나 귀하고 예쁘게 대접받으며 자랐다. 육십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는 위치에 있다. 사랑을 많이 받는 이가 사랑도 많이 베푸는 법.
정례는 일요일이 주일이라 오늘이 가장 바쁜 날인데도 어렵사리 틈을 내어 온 것이다. 남편이 작은 교회의 목회자이다. 더욱이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데도 먼저 시집을 가서 손자를 셋이나 두었다. 삶의 경륜이 많은 만큼 사람의 마음을 읽는 눈도 깊은 것일까? 전에 없이 어머니의 두 손을 단단히 붙잡고서 간절히 기도를 해드린다. 그리고 어머니를 아기처럼 꼬옥 껴안아서는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드린다.
어떻게 알았을까? 요즘 들어 어머니가 유난히 외로워 하시는 것을. 동생은 방과 후에 아동을 돌보는 센터를 운영한다. 제주시에서도 다문화와 노동계층이 많은 지역에 위치해 있어 동생네 센터에는 늘 아이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제주시에서 가장 오래된 아동센터 중 하나일 터다.
인구 밀집 지역에 있다 보니 그곳의 현안이 아이들을 맡겨놓고 부모가 모두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소위 가장 열악한 형편이라서 제일 먼저 지역아동센터로 선정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동생네 센터는 언제나 정원이 넘쳐서 대기를 해야 하는 눈치다. 게다가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동생은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과 활동이 비교적 넓은 편이라, 센터 전체의 회장 역할도 수행하는 눈치다.
치킨 박스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고를까 망설이는 어머니에게 눈치 빠른 동생이 얼른 나선다. “오늘은 새해 들언 아직 정월 초순이난 양력으론 명절인 셈인게 마씸. 경 허난 여기서 제일 연세 많으신 우리 어머니가 주인공이라 예! 어머니 눈에 가장 좋은 걸로 얼른 고릅서, 양!”.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얼굴이 함박꽃처럼 벌어진 어머니가 얼른 닭 다리 하나를 집어 든다. 아! 어머니의 생애에 저렇게 양념으로 노릇노릇 구워진 치킨의 갈색 다리를 통째로 드신 적이 있으셨을까? 그동안 얼마나 저것을 차지하고 싶으셨을까. 이렇게 103세 어린애가 되고 나서야 소원을 이루시다니.....
어쩌면 103세는 3살이나 마찬가지 아니신가. 아직은 어금니 하나를 빼고는 모두가 튼튼하니, 쇠갈비도 너끈하게 뜯으실 터. 닭다리쯤이야 어디서 굴러들어 온 무른 호박일 게다. 어머니는 달콤하니 양념되고 통통하게 살이 붙은 닭다리를 한입 물고서 아이처럼 좋아라 하면서 천진스레 웃으신다.
아하! 어머니의 저 명품 얼굴을 내가 놓칠 리 없다. 얼른 핸드폰을 들어서 순간을 포착해서는 얼른 앨범 안으로 저장해 놓는다. 지금까지 백세 일기를 기록하면서 깨달은 것은 글로 씌어진 삶의 내용, 사건의 진위, 사안의 중요성, 역사적 기록도 의미가 있지만, 결국에 남는 건 사진이란 사실이다. 이 글을 써온 지도 어느덧 3년. 그동안 카메라에는 어머니의 일상과 풍경, 얼굴들이 다채롭게 찍혀 있다. 어머니의 인생 박물관인 셈이다.
동생의 기도는 어머니의 건강과 장수를 위한 소망으로 간절하게 이어진다. 진지하고 정성스런 기도보다 어머니는 치킨에 더 마음이 가 있는 듯, 게슴츠레 눈을 떠서 동생의 입술을 쳐다본다. 어서 기도가 끝나주기를 바라는 눈치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머니의 삶이 사무치게 가슴 저린 동생은 지나온 생애의 골짜기와 광야 같은 시절들을 굽이굽이 파헤치면서 더없이 기도가 간절하고 깊어진다. 그간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동네 사람들로부터 어머니가 살아온 삶의 숨겨진 국면을 듣고, 그 자취를 직접 살펴보고 밟아보면서 느낀 바가 참으로 많았으리라.
모두가 ‘아멘!’으로 합창하면서 기도의 끝을 알리자마자, 어머니는 얼른 치킨을 입안에 넣어 야무지게 씹으신다. 103세에도 어금니 하나를 빼고는 모두가 건재하니, 돼지껍질 아니 갈비일지라도 하등 문제 될 게 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를 오복 중 하나라 여겨온 게지 싶다.
사실 동생이 저리도 어머니를 향해 마음이 간절함은 우리가 모두 떠나온 고향마을로 귀향해 들어간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마다 찾아와서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는 우리 대포 마을에서 최고령이라며 축하해 주고..., “잘 왔다!”라며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해 주었다니, 동생 입장에서는 얼마나 가슴 벅차고 기쁘고 다행스러웠으랴.
이쯤에서 우리집의 아픈 사연을 살며시 들어내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 사실은 아주 오래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을에서 추방된 적이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는 할머니가 둘째 부인이 생긴 할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고 거의 실성을 하는 바람에 동네에서 외톨이가 되었던 시절이다.
그런데 이웃 마을 월평리의 전도부인이 방문을 와서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고 친구처럼 다정하게 얘기를 들어주니 애간장이 녹아들었으리라. 그만 대포마을 최초의 그리스도인, 소위 예수쟁이가 되기로 마음을 열고 말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아버지도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면서, 마을과 이웃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쫓겨났던 것이다. 1950년대 일이다.
얼떨결에 아버지와 함께 고향에서 내쳐진 어머니는 서귀포로 들어가서 삼매봉 인근의 논밭을 병작하며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두 분이 워낙 건강하고 부지런하였던 터라 객지에서 그럭저럭 먹고 사는 경지를 넘어서, 오히려 대포에서보다 더 잘 산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즈음에 이르자 종손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워낙에 할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은 부모님은 다시 논밭을 관리하며 재산을 일구고 2남 7녀로 대가족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이민 간 아들을 따라 고향마을을 떠나셨고, 딸들도 모두 출가하고 공부하느라 대포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20여 년이 흐른 뒤에 드디어 막내딸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터전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는 동네 사람들이 동생네의 귀향을 반기고, 집수리를 도와주며,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게다. 무엇보다도 103세에 아직도 살아계신 어머니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을 터.
부모님 덕에 고향에서 환영을 받고 도움을 얻은 동생네 이야기가 우리 모두에게 가슴 따뜻한 위안이 되었다.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지 싶다. 이쯤에서 문득 최근에 알게 된 신미나님의 시 하나를 나누고 싶어진다. ‘장판에 손톱으로 꾹 눌러놓은 자국 같은 게 마음이라면 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 요를 덮고 한 사흘만 조용히 앓다가 밥물이 알맞나 손등으로 물금을 재러 일어나서 부엌으로....’
예전에 사시던 분이 남쪽으로 넓게 창을 내놓은 덕에 겨울에도 거실 안으로 햇살이 마음껏 들어온다. 이상도 하지. 어머니의 흔들의자가 놓아진 곳으로 가장 따뜻한 공기가 모여든다. 새해 들어 ‘날 살려줍서’라는 기도가 더 잦아진 어머니의 사정을 하늘의 햇빛도 바다의 바람도 다 알고 있나 보다. 103세 노인의 몸과 마음이 추울 때, 따뜻함이 제일 귀한 선물이 된다는 사실도.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