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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당신의 생애서 가장 서럽고 아팠던 시간들

 

요즘 보목마을에는 봄 같은 겨울이 이어지고 있다. 마당에 나가보면 상추며 배추들이 상큼한 얼굴로 초록을 뽐내는데, 눈을 들어 한라산을 쳐다보면 설문대 할망이 눈을 허옇게 뒤집어쓰고 있다. “아직은 겨울이여. 독감 조심허라 이!”라고 하시며, 금방이라도 일어서실 듯, 기침이라도 하실 듯이 가까워 보인다.

 

“아고, 저 노물(배추나물)꽃 보라게! 노랑허게 곱닥허게(고웁게), 말이라도 험직이(할 것처럼) 잘도 여망지게(똘똘하게) 피었져 이!”라며 거실에서 몸을 일으키시는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 보실 요량이다. “어머니, 아직은 보름이 막 독허난, 나가지 맙서 예! 독감 걸리민 큰 일 납니다. 103설 된 할망이 이겨지카(이겨질까), 예? 언니 말이, 요새 독감은 하도 독해연, 요양원 할망들이 하영(많이) 병원에 간댄 햄수게. 경 허곡(그렇고), 이제 홑썰(조금) 이시민(있으면) 명절인디, 아이들한테라도 독감을 옮기민 어떵 허쿠광?” “아고, 곧 멩질(명절)이로구나게. 게무로사(아무려면) 돈은 못 줘도 감기는 주지 말아살 건디...”라며 주저앉는 어머니의 눈가에, 금방 안개처럼 희미한 염려가 스며든다.

 

다시 당신의 자리로 돌아오신 어머니가 정색을 하고서 입을 여신다. “니네 아이들은 그자 공부만 허젠..... 책도 사주곡, 먹을 것도 사주곡 허라 이!” 아니,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씀인가? 꽃처럼 따사롭게 피어났던 얼굴에 아쉬운 듯, 미안한 듯한 그늘이 서늘하게 내려앉는다. 아, 어머니는 지금 당신의 생애에서 가장 서럽고 아팠던 시간들을 떠올리시는 거다.

 

초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아침마다 우리집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학교로 가기 전에 준비물이나 수업료, 무슨 회비 등을 받으려고 쭈뼛거리는 아이들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빨리 학교 가라. 지각허지 말앙!’이라고 소리치는 어머니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가계를 무겁게 짊어지신 아버지는 이미 동트기 전에 밭으로 나가서 쟁기에다 시름을 얹어놓고, “이랴, 이랴!” 소리치며 밭을 가실 터. 이미 새벽녘에 이모님 집을 다녀온 어머니는 돈은 커녕 ‘딸만씩한 것들을 왜 학교에 보내느냐’는 잔소리만 잔뜩 먹고 오셨을 게 분명하다.

 

큰딸을 제주시로 보내서 우리 마을 최초의 여고생으로 만드신 어머니가 못마땅한 이모님은 이따금 우리 중 하나를 당신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한 입이라도 덜어주려는 선심은 베풀었으나, 돈을 꾸어주는 일은 결단코 없으셨다. 초등학교 5학년이 당신 생애의 공식 학력인 아버지는 큰딸과 둘째를 제주시 여고에 보내면서 아들은 아예 중학교부터 누이들에게 맡겨서 제주시 유학을 시키셨다. 젊어서 힘이 세시기로 동네에서 손꼽히는 일꾼이신 데다가 술·담배를 안 하시고 주경야독으로 공부의 힘을 터득하신 아버지는 ‘큰딸이 졸업해서 넷째를 책임지고, 둘째가 졸업해서 다섯째를 책임지면 된다’는 당신 나름의 희망 사이클을 과감하게 실행에 옮기셨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사람 마음대로 계획대로 이루어지던가. 여고를 졸업한 큰딸이 서울로 가서 취업을 하고, 둘째도 인연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기까지는 절반 정도 성공하는 듯하였다. 그 틈에 장남도 대학생이 되었다. 드디어 내가 초등학교 5학년쯤 될 즈음에는 막내아들까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2남7녀 중 7명이 모두 학생이 되기에 이르렀다.

 

힘이 장사였던 아버지는 어느새 50대가 되어 초로의 시기에 접어들었고, 어머니는 주업인 물질과 밭일에다 고사리 캐기·동백열매 줍기 등 부업을 하면서, 밤을 낮 삼아 들판에서 지내셨다. 그야말로 ‘쇠로도 못 나난 제주 예조로 나신예(소로도 못 나서 제주 여자로 났구나)’라는 제주도 속담처럼 어머니는 소보다 더 일을 많이 하셨다. 드디어 힘이 부치신 아버지는 마음속의 계획대로 셋째 딸이 중학교를 마치자 서울로 보내셨다. ‘언니들이 차례대로 동생을 돌봐주리라’는 바람을 실행에 옮기신 셈이었다.

 

하지만 중학교를 갓 마쳐서 이제 겨우 열일곱살 짜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랴. 큰 언니가 일하는 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셋째는 아침마다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가는 또래들만 보면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만 보내주면 어떻게든 제 힘으로 공부를 해볼 테니, 제발 집으로 불러 달라’는 셋째의 편지에 아버지는 ‘미한하다’는 말과 함께 여비를 보내셨다.

 

집으로 돌아온 셋째는 제주시의 야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그야말로 주경야독을 시작했고, 넷째 다섯째는 집에서 일하면서 학교를 다닐 요량으로 중문에 남았다. 2남7녀를 낳는 것이 생명을 얻기 위한 고통이라면, 생명을 키우는 것은 사력을 다해 목숨을 내던지는 고난이었으리라. 그러니 이제 와서 103세가 되신 어머니가 뜬금없이 내게 하시는 저 말씀은 당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회한이요 아픔이요 미안함인 동시에 아쉬움인 거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날 아침에는 입고 갈 교복이 없었다. 어머니가 교복을 사주실 수 없을 테니 스스로가 어떻게든 구했어야 하는데, 차일피일 하다가 그만 입학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언니와 동생들이 모두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려고 부산을 떠는 중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망찰 난간에 앉아서 신발끈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니는 무사 학교에 안 감시니?”라는 어머니의 호령에, 나는 그만 움켜 안았던 걱정과 불안이 폭발하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중학교에는 교복을 입어야 갈 건디, 어떵 허단 보난 교복을 구허지 못해연 마씸. 실은 오늘은 공부를 안 험직 헌 날이난, 그까짓 거 결석해도 되는디, 장학생이랜 허멍 아침 조회 때 꼭 나와야 된댄 해부난.....” 이라고 얼버무리면서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그러자 어머니가 냅다 큰 소리를 지르셨다. “너희는 언니들이 되어 가지고, 동생 교복도 하나 마련해 주지 못허느냐? 아명해도 니네들 다 학교 그만두고, 오늘부턴 나영 곹이 밭에 강 일허는 게 나스키여!”. 그리고 어머니는 휑 하니 집을 나가 버리셨다.

 

마른 하늘에서 날 벼락을 맞듯이 갑작스레 꾸중을 들은 언니들은 부리나케 이웃집을 돌아다니면서 교복을 구하기 시작했다. 온 동네를 샅샅이 뒤진 끝에 다행히 교복을 구하긴 했는데, 불행히도 고등학생용이었다. 당시 중학생 교복은 윗옷이 일자형인데 반해, 고등학생용은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모양이었다. 까만색이 빛바래면 회색이 아니라 보라색에 가까워지는 게 이상해 보였다. 하지만 언니가 하얀 칼라를 달고 나니, 아쉬운 대로 분명한 교복이 되었다. 얼른 그 옷을 걸쳐 입고서 학교를 향해 날듯이 뛰었다.

 

그렇게 시작된 중학교이고 보니, 교과서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국·영·수와 같은 주요 과목들은 해를 건너 바뀌기도 해서 몇십 원이면 동네에서 헌책을 구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음악·미술·실과와 같은 기타 과목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 대신 구하기가 그만큼 힘들었다. 수시로 옆 반에서 빌려오곤 하였는데, 어쩌다가 교과서를 준비하지 못했는데 선생님께 들킨 날에는 회초리를 맞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어떻게 학교에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자식들의 형편을 불 보듯 보고 계셨을까? 자식들의 표정만 보아도 천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초능력을 하늘은 어머니들에게 새 생명과 함께 셋트로 선물해 주셨을까. 그러니까 ‘책도 사주곡, 먹을 것도 사주곡 허라 이!’라는 어머니의 당부는 당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씀인 거다.

 

교복을 마련해 주지 못한 어머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던 어머니는, 당신에 대한 분노를 아이들에게 쏟아놓고, 밭으로 달려가셨으리라. 검질(잡초)을 매면서 밭고랑에다 눈물을 뿌리며 시름도 쏟아놓으셨으리. 점심도 굶은 채 호미로 땅을 파면서 당신의 가슴에다 깊고도 아프게 고랑을 내고 또 내면서. 참고서는 커녕 교과서, 공책, 연필도 제대로 사주지 못한 어머니는 그게 그토록 평생의 한이 되었던 것이다. 아, 자식들에게 마음껏 책도 사주고, 먹을 것도 사주고 싶었던 우리 어머니의 물 같이 녹아버린 마음이여!

 

‘어머니, 이제랑 그 시절의 아픔을 100년 인생의 뒤안길로 보내부러동, 노랗게 웃음 짓는 저 배추꽃추룩 행복허게만 살아가십서. 이 겨울이 무색허게 쏟아지는 저 눈부신 햇살추룩 어머니의 하루하루가 생애 최고의 추억으로 기록되시게 웃으십서, 양!’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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