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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감귤나무는 어머니의 청춘 시절 꿈이자 미래였다

이게 마지막일까?

 

100세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늘 맞닥뜨리는 게, ‘이 시간이 다시 올까, 마지막은 아닌가....’ 하는 순간들이다. 올해도 감귤밭에서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가슴저리게 바라본다. “어머니, 여길 봅써. 우습서 양!” 하지만 좀처럼 웃음이 화안하게 나타나지 않는 어머니. 분명히 웃으시려는 데도, 표정이 여의치 않다. 그러다가 순간, 웃음이 피어난다. “아고, 어머니! 참 잘 해수다. 열일곱 살에 시집가던 날, 바로 그 얼굴이 돌아와수다. 아, 저기서 아버지가 웃엄수다. 역시 대포 일등 신부감이랜 마씸. 우리 어머니 김성춘 여사님, 세상에서 최고로 곱수다!!!.”

 

감귤이 익어 가는 보목마을에서 이 가을, 어머니의 미소는 저리도 고우시다. 일손이 아쉬워서 ‘고냉이 손이라도 빌려시민 조키여....’ 하는 감귤 철에, 내 손은 황금색으로 익어서 어서 따주기를 기다리는 감귤보다, 빙색이 웃으시는 어머니 얼굴을 카메라에 담느라 바쁘다. “정옥아, 나 살려도라!”면서 끙끙 앓으시던 어머니가, “어머니, 어떵 허코 예……. 미깡이 다 익어신디……. 따 줄 사름이 어수다게.” 하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셨다. “조들지 말라 이! 나가 이제 나강 다 타주키여!”라면서.

 

 

어머니는 감귤을 보자마자 ‘언제 아팠냐!’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신다. 당신이 키우신 나무들이며, 그토록 소중하게 가꿔 오신 과수원이 아니신가. 어머니는 ‘아이들을 돌봐 달라’는 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가시기 전, 보리·유채·고구마를 짓던 밭을 감귤 밭으로 만드셨다. 197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감귤이 제주지역에 도입되던 때였다. 아버지가 구덩이를 파면 우리가 묘목을 집어넣고 발로 꾸욱 꾹 눌러 밟았다. 감귤은 그 당시 농부들의 꿈이요 미래였다. 환금작물이자, 황금작물이었다.

 

그 밭에서 첫 수확을 보려는 때에, 그만 아들의 긴급한 요청에 모두 다 내려놓고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감귤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던 어머니는, 감귤 밭에서 일하시는 것을 그리도 좋아하셨다. 아버지와 함께 만들었던 추억의 감귤을 떠올리시는 것일까. 일하는 모습이 노동이기보다 놀이처럼 신나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100세가 되신 어머니의 솜씨가 예전과 같지 않으시다. 고향인 대포마을에서는 ‘일’에 관한한 어머니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는데……. 어머니가 따신 귤은 일일이 점검하고 다시 손을 봐야 한다. 전정가위로 꼭지를 제대로 따지 못하시니, 그대로 두면 감귤끼리 서로를 찌르면서 상처를 준다. 그러면 자연스레 부패 과가 되고 만다.

 

그래도 ‘딸을 돕는다’는 생각에 흐뭇하신 어머니는, 가위질이 여의치 않으신지 그냥 손으로 마구 감귤을 따신다. 급한 마음에 목화를 따시듯 부지런을 무기로 삼으셨다. 제주도 말로 그냥 ‘무지르는’ 거다. 꼭지가 터지고 상처가 나서 그냥 말리고 싶기도 하지만, 저 화사한 얼굴에 어떻게 찬물을 끼얹으랴. 아기처럼 천진난만한 저 미소를, 백만 불짜리 달러인들 사들일 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세월이 어느새 20년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국땅 공동묘지에 깊이깊이 묻는 것을 보시고, 주저 없이 나를 따라 한국으로 오셨다. 무슨 수로도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깊숙하게 구덩이를 파서 관을 수직으로 묻는 모습에 충격을 받으신 어머니는, 17년 동안 살았던 그곳을 미련 없이 떠나셨다.

 

두 아들을 뒤로 하고서, ‘이제는 니영 살아사키여…….’라며 한국으로 오신 어머니는, 지금도 ‘아버지를 그 깊은 웅덩이에 집어넣었으니 도무지 내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며 한탄을 하신다. 대신에, 당신은 ‘저 양지바른 삼매 봉에 편안하게 묻어 달라’고 신신당부하신다. 그곳에는 교회 묘지가 있고, 당신의 둘째 딸이 잠들어 있다.

 

문득,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어머니는 그야말로 김종두 시인의 ‘느영나영 4’를 나와 함께 사셨다. 당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딸인 나를 위한 생을 살아오신 것이다.

 

‘ᄒᆞ다 니 아프지 말라 이. 니 아팡 들어 누우민, 나 ᄌᆞ들아진다.
ᄒᆞ다 니 배골치 말라. 니 배고팡 댕기민, 나 눈물난다.
니 이시난 나 살암져. 니 살아주난 나 오몽 허염신예. 
ᄒᆞ다 니 ᄌᆞ들지 말라. 니 ᄌᆞ들앙 나 좋을 일 엇져.
니 ᄌᆞ들아 가민 나 애간장 다 녹느네. 
니 가슴 아팡 사는 시상 나 어떵 보느니.
니 일이 나 일이여. 느 시상이 나 사는 시상이여.’

(김시인의 제주시 제주어를 어머니의 서귀포 제주어로 바꿔 썼다. 느 -> 니, 댕기믄->댕기민, 오멍-> 오몽, 가믄-> 가민)

 

사실, 어머니가 아니라면 보목동 마을 안에 과수원을 사 둘 필요가 없었다. 서귀포로 돌아와서 동홍동의 남양맨션에 사시게 된 어머니는, 도무지 더 살아갈 의욕이 없으신 듯하였다. 남양맨션은 서귀포에서 맨 처음 지어진 아파트로, 비록 시설은 낡았지만 이름처럼 남향에다 옥상에 올라가면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다. 게다가 길을 건너면 도서관과 공원이 있어서, 아이들에겐 더 없이 좋은 맹모지교의 터전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사라져서 소방서를 동원해 동네를 뒤지다 보면, 그 곳의 수풀 속에 숨어 있곤 하였다. 어쩌면 아버지를 땅 속에 깊이 묻은 장례식의 트라우마에 갇히신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보목마을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바다가 마당이고, 섶섬이 바로 눈앞에 놓인 이곳에서, 어머니는 썰물에 드러난 바당밭을 보았다. 대포마을에서 상군해녀로 40년을 사신 어머니에게, 바다는 그야말로 친숙한 장소였다. 오래된 친구이기도 하였다. 바다로 나가서 보말을 잡기 시작한 어머니는 기력을 회복하시고, 다시 살아갈 이유를 되찾으신 듯하였다.

 

하지만 한 달에 두 번, 보름과 그믐을 중심으로 찾아오는 물때는, 겨우 열흘 남짓의 소일거리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보내시게 할까? 그래서 생긴 게 마을 안에 있는 과수원이다. 우리 집에서 걸어 10분 거리에 있는 감귤 밭은, 어머니가 혼자서 농사할 수 있는 소규모였다. 덕분에 어머니는 바다와 밭을 오가며,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에 사셨던 대포마을에서의 일상을 어느 정도 회복하셨다.

 

지금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가 자리한 곳이, 우리가 논농사를 하던 ‘너배기(넓은 들)’이다. 마을 동쪽의 성귓내(약천사 주변)와 더불어 서쪽의 너배기는 대포 주민들이 쌀농사를 짓던, 소위 문전옥답이었다. 지나간 얘기지만, 그러므로 내가 ICC JEJU에서 제 5대 대표이사 사장을 하였던 것은, 어려서의 일터에서 다만 환경이 달라진 새 일에 복귀하였던 셈이다.

 

이제는 글을 쓰다 보면 자꾸만 삼천포로 빠지곤 한다. 100세 어머니를 두고, 나도 이젠 ‘환갑을 넘긴 노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이 그러한 걸 어쩌랴. 당신이 주무실 때마다, ‘이디 왕, 나영 발 막앙 누우라’는 어머니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신다.

 

17평집에 2남7여, 11식구가 살던 그 시절, 7번인 나와 8번째 동생은 부모님과 한 방에서 지냈다. 우리는 어머니 발밑에다 둥지를 틀었고, 9번인 막내는 어머니의 품을 차지하였다. 갓 나온 물애기였다. 나는 어머니의 발을 꼬옥 껴안고서 행복의 꿈나라를 날아다녔다.

 

그 어머니가 지금도 나에게 행복을 주신다. 낮에는 비록 ‘인생의 무게’가 느껴지는 일상이지만, 밤이 되어 어머니 발밑에 누우면, 모든 것이 내려놓아진다. 더 바랄 게 없이 편안하다. ‘이 나이에 어머니와 함께 잠들 수 있으니, 여기에다 무엇을 더 원하랴.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욕심이려니…….’ 싶다. 그래도 더 바란다면 어머니를 위한 기도다. ‘우리 어머니, 부디 자는 김에 잠자듯이 천국가게 하소서. 아프지 말고 힘들지도 말고, 이 땅에 오던 그때처럼 어머니 품에 안겨서 고요히 잠들게 하소서.’

 

이따금 어머니가 물으신다. 나 이제 몇 살이고? “어머니는 지금 백 살이우다. 한국 나이로. 내년 3월이민 만 나이로 백 살이 됩니께. 그 때까지는 나 말만 잘 들읍서 예! 밥 드십서 허민 잘 드시곡, 자게 마씸 허민 눈 곰앙 잠자곡, 일어납서 허민 얼른 눈트곡. 경허민 볼강 어두웡 볼강 어두웡 허멍, 어느새 꽃 피는 춘삼월이 될 거우다. 그 때는 어머니가 진짜로 만 백 살이 되는 거라 마씸. 대통령님이 ‘100살을 사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축하합니다!’라고 청려장 지팡이를 선사해 주시면, 그 지팡이 짚고서 감귤꽃 피는 과수원에 놀러가게 예!” 부디 우리 어머니, 이 겨울을 무사히 나시게 해주소서.

 

 

아, 우리 어머니. 지금 정도라면 청려장을 받을 수도 있겠다. 노인의 날은 10월 2일로, 노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공경의식을 높이기 위하여 만든 국가 기념일이다. 동시에 10월은 경로의 달이다. 1997년부터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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