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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어머니의 노래가 들리다

2008년도 9월에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책을 썼다. 첫 장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로 시작된다. 여기에 잠깐 그 도입부를 옮겨본다.

 

‘어쩌면 이게 아버지와의 마지막 인사인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을 떨치면서, 나는 공항의 출국장을 향해 아버지의 휠체어를 천천히 밀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서 넷째, 다섯째 언니가 무거운 표정으로 걸었다. 아들딸이 미국에 있어서 부모님을 자주 뵙는 큰언니는 다소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그리로 막내딸이 옆에서 조심스레 어머니를 부축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미국으로 가기가 싫으신지 발걸음을 몹시도 느리게 옮기신다. 아버지를 에워싸고 있는 식구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왠지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시지 않은가...

 

드디어 휠체어가 출국장 입구에 도착했고, 모두가 멈춰서서 작별의 인사를 건넬 참이었다. 바로 그때 아버지께서 천천히 휠체어를 돌려 우리들을 향하셨다. 그리고는 “잘 있어라”는 말과 함께 가까이에 서 있는 내게 가만히 손을 내미시는 것이었다. ‘아, 아버지! 이제 당신은 등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걷는 딸의 마음까지도 다 헤아려 보실 수가 있으시군요...’ 팔십이 넘으시면서부터 아버지의 고국방문은 언제나 ‘마지막’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솔직히 말해 볼티모어에서 제주도까지 16시간이 넘는 비행 일정을 견뎌내기란 젊은이일지라도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 끔찍하고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일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연로하신 부모님께 ‘올해도 반드시 고향에 다녀가셔야 할 이런저런 이유들’을 만들어냈다. 새로운 자손의 출현, 고향 교회의 중요한 행사, 내 집 마련 기념, 친인척의 경조사 등을 비롯해서 ‘많이 아프다’는 핑계와 ‘무척 보고 싶은 마음’까지를 내밀면서 막무가내 억지를 부렸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부모님께서 한국에 남겨 놓으신 자식은 일곱 색깔 무지개와 같은 수였다.

 

그중에서도 나는 왜 그다지도 아버지의 삶이 사무치게 서럽고 아프고 특별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다음은 그러한 연유가 담겨 있는 아버지의 편지 중 일부다.

 

‘내가 저번에 고향에 갔다 온 후, 아는 사람들은 나를 비방하고 야단을 떨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앙 양심상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마치 세상을 등진 것처럼 남과 달리 보여서 핍박받고 갈등이 되는 이유가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과정(장례, 제사 포함)이 아니겠느냐. 이외에는 하등 다툴 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또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부모는 나를 버렸어도 나는 끝까지 책임을 다했다고 자부하고 싶다. 부모를 원망해 본 일도 없고, 되려 나 자신의 부족과 속된 말로 팔자라 자위하며 일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부끄럽거나 최책감을 느끼지 아니한다. 너희들도 이 부모를 나무라지 말고 떳떳하게 변론하여라. 나는 아버지로부터 진정한 사랑도 받아보지 못하였지만, 학생 모자도 하나 받아보지 못하였다. 재작년 가을 쇠스랑(거름내는) 하나 주시길래 퍽 고맙게 생각하였다. 그 타 외로는 아무것도 없지마는 나는 그래도 나의 몸이 아버지의 피를 이어서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각으로 그래도 부모로 대하였다. 이번 장례식도 내가 전부 책임지기 위해서 비행기 특등석을 타고 고국에 간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내 누이들과 동생들, 친척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지금도 나는 후회하지 하니한다. 세월이 지나면 진리는 서는 법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내 신앙 양심을 측정해서 그만큼 상주실 것을 믿고 의심치 아니한다. 어머니는 직장(교포가 운영하는 군복공장)에 나가는 것이 매우 즐거운 것 같다. 고향소식을 자주 전해주렴. 여기서는 편지하는 불편이 그만저만 아니다. 영준 엄마나 아빠가 자동차로 가서 부쳐주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형편이니... 그리 알고 고향에서 자주 편지하여 주기 바란다. 내가 오건대가 벌써 20일이 지났는데 네 소식밖에 못받았다. 서로 연락해서 네 언니들도 편지하도록 하여라. 다음 소식을 기다리며 이만 쓴다. 8.1. 父 書.'

 

사실 내가 이 편지를 거듭 읽어보고 다시 펼쳐서 들여다보고 쉽게 접어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아버지는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가 둘째 부인을 새로 들이고 조강지처를 버리면서부터 삶이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어느날 갑자기 집에서 내쳐진 할머니는 그 충격으로 정신이 약간 나가버렸고, 아버지는 장손의 이름으로 할아버지 슬하로 끌려가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5학년까지 다녔는데 같은 학년에 다니던 말젯아방(할아버지의 셋째 아들)이 조카와 공부 실력을 다투게 되면서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눈치 없이 공부를 잘하자 경쟁상대가 된 삼춘이 할아버지에게 ‘태행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해달라’고 마구 떼를 쓰는 바람에 그만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말았단다. 아버지의 불행은 ‘장손으로 태어난 게 죄’가 되었던 것으로, 아버지로부터 사랑은커녕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는 바람에 초등학교조차 마칠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서럽고 슬펐으면 학생 모자도 써보지 못한 아픔을 가슴 속 깊이 가라앉히고 사셨을까. 그 바쁜 농사 중에도 틈틈이 책을 읽고 한자·영어·일어까지를 익혀서 동네 사람들이 일본 편지를 갖고 찾아오면 읽어주기를 하셨으니...

 

어린 나의 눈에도 아버지의 삶이 외롭고 고단하고 억울한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 궁리하고 고민하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드디어 학교에서 진보상을 받자마자 상지동산을 내달리면서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와 자랑스레 아버지 품에 안겨드리던 일. “참 잘했다. 네가 그럴 줄 았았다!”하시며 빙그레 웃으시던 아버지. 아, 공부를 잘하는 게 아버지의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던지...

 

그래도 그렇지 아버지를 미국의 공원묘지에 장례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으로 오면서 가슴 깊이 파고든 게 ‘어머니는 아버지가 나에게 부탁하신 사랑하는 여인’이란 생각. 이 부분은 아무래도 좀 지나친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순간에도 어머니를 바라보면 아버지가 생각나서 애틋하고 죄송하고 잘해야지 싶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여인임이 분명하다. 18세 때부터 81세 적까지 변함없이 일편단심으로 사랑하고 어여쁘고 고마웠던 여자.

 

지금 시간은 오후 1시. 아침에 일어나서 콩 고르기를 하시던 어머니가 슬그머니 일어나서 당신 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여태 주무신다. 기력이 없으신가 보다. 바깥 날씨는 그야말로 불붙든 뜨겁고, 밤낮으로 뿜어대는 에어컨 바람은 불편하기 그지없으실 터. 엊그제부터 ‘이제는 다 살아진 거 닮다’며 기운(생명의 끈)을 내려놓으신 표정이다. 아버지가 안 계신 세월을 22년 동안 보내셨으니..., 이제는 혼자 지내오신 삶이 버겁고 외롭고 지치고 힘드실만도 하시리라.

 

'네가 이 못난 부모에게 쏟아붓는 정성과 효성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지, 하나님 아버지께 그저 감사할 뿐이다. 어머니도 네가 옷들을 많이 보내주니 퍽 기뻐한다. 나대로 편지를 써서 자유롭게 부칠 수만 있다면 날마다 쓰고 싶구나. 교회에 가나 노인회에 가도 옷에 염려가 없다면서 어머니는 참으로 좋아한다. 나는 여기 오는 날부터 감기로 좀 누워 있다. 한국에서 같으면 약방에 가서 먹는 약과 주사를 사다가 쓰면 막상 2~3일이면 회복될 수 있는 정도인데도 여기서는 약을 구입할 수 없으니... 지금은 꽤 좋아져서 교회에 다녀오고, 어린이들(손자.손녀)과 노는 데 지장이 없단다. 네가 보내준 수표도 잘 받았다. 너는 어머니를 기다리는데 나도 보내주려고 하지만 시기적으로 어렵구나. 여기는 벌써 대학은 방학이라는구나. 다른 학교들도 차츰 방학이라 고국방문 학생과 올림픽 관광객으로 비행기 예약이 모두 짜여져서 일반손님은 표사기가 어렵단다. 그리고 어머니가 꼭 가겠다면 어떻게 어렵더라도 표를 구해보겠지만, 얼마 없어서(약 1년) 네가 이곳에 오면 함께 있다가 3년 후엔 아주 가겠다고 고집을 하니 구태어 강권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어머니 혼자는 아무래도 못 간다. 함께 동행자가 있어야지... 그동안 동행하며 살아온 세월 동안 네 어머니와 나는 늘 함께 있어 왔다. 우리들을 오늘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모든 것을 의탁하고 기도하면서 이만 쓴다. 1988. 5.18. 父 書.'

 

아, 현재 서귀포의 기온은 33도를 넘어서려고 한다. 밖으로 나가보기가 무서울 정도다. 일부러 땡볕을 쐬고 헉헉대며 숨을 쉬지 않더라도 축축 늘어진 나뭇가지들과 기진해 있는 호박잎들을 보면 폭염의 정도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겠다.

 

드디어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라는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니가 일어나신 게다. ‘이어도 사나’를 부르시는 걸 보면 심신의 상태가 안녕하신가 보다. 부디 올여름을 잘 넘기고, 선선한 가을이 오면 고향마을 대포에 가서 아버지와의 추억을 마주하며 걸어보고자. 102세 어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음 또한 아버지의 기도 덕분임을 생각해 본다.

 

이 더위에는 애월에서 쓴 문태준 시인의 글을 따라서 하루를 견뎌내보자 싶다; ‘내가 사는 마을 입구에는 넓은 수박밭이 있는데, 그제 아침에는 수박 수확을 하고 있었다. 수박밭 주인은 수박이 잘 익었는지를 눈으로 보기만 해도 아는지 바닥에 기는 덩굴을 끊어 큼직한 수박을 한 통씩 연신 들어 올렸다. 썸벅썸벅 잘라서 먹으면 참 좋겠다 싶었다. 옆집에서는 단호박을 땄다며 또 갖고 왔다. 아내는 뭔가를 챙겨 드리는데, 시골에서는 먹을 것이든 뭐든 주고받는 일이 쉼이 없이 계속된다. 그만큼 모두의 마음이 푸근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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