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신다. ‘적막강산에 나 혼자 남았구나’라며 흐느끼신다. 얼마나 외로우면 저러실까? 외로움은 홀로 있는 것같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감정이다. 우리말 사전에서는 ‘혼자가 되어 적적하고 쓸쓸한 느낌’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족과 함께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그러므로 외로움은 혼자 있는 상태가 아니라 혼자인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의 문제로 보인다. 관련 연구에 의하면 외로움이란 열등감과 함께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꼽힌다. 실제로 심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대단히 고통스럽고 심혈관계 질환에 노출되며 극심한 무기력증을 느낀다. 따라서 술·담배·마약 등의 여러 가지 일탈 행위에 노출되어 최악의 경우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인 셈이다. 이 고통은 실제로도 신체적 고통과 연결되어 있어서 ‘타이레놀(정확히는 아세트아미노펜)을 먹으면 완화된다’는 연구가 있다. 200년 전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통해 ‘절망’이란 단순한 우울이나 슬픔이 아닌 실존의 문제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 직면하는 막다른 골목임을 암시하고 있다
어제부터 두 눈을 단단히 감고서 작정하신 듯 주무시기만 하는 어머니. 며칠 동안 “허태행씨, 허태행씨, 나를 두고 어디로 갔나?”라고 하시더니, 아버지를 찾아서 꿈 속으로 깊이 들어가셨나 보다. 입에 달고 하시는 말씀이 “나 살려 줍서, 나 살려줍서!”였던 엊그제까지가 행복이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끄덕끄덕 조시던 시간이 기실로 선물이었음을 알겠다. 지난주에는 바지에 대소변을 묻히고도 모르시는 눈치였다. 너무 적게 드셔서 그런지, 염소똥 같은 방울 똥이 굴러서 내의 안으로 들어가도 모르시는 거다. 그런 어머니가 너무 가엾어서, 서글퍼서, 내 가슴이 절벽에 눌린 듯 먹먹해 왔다. 비록 기저귀를 차지만 실수하게 될까 봐, 휴지를 몇 장 개켜서 기저귀 위에 놓았다가, 젖으면 다시 갈아 놓으시는 게 습관이다. 기저귀를 아끼려는 마음과 냄새가 나지 않게 하려는 조심에서 나온 당신만의 비결이리라. 동시에 전에 없이 잠꼬대나 헛소리를 자주 하신다. “아기들 밥 멕여사 될 건디....”라고 하시면서 팔을 허공에 대고 휘적인다. 아직도 2남7녀의 입속으로 숟가락이 드나드는 꿈을 꾸시는 걸까? 어쩌면 마음으론 일어나고 싶으신데, 몸이 뜻대로 안 움직이니 그러시는 모양이다. 이
오랜만에 멀리서 손자가 찾아왔다. 대기업의 일본지사를 거쳐 현재는 베트남에 체재 중 본사로 출장을 나왔단다. “니, 누게니?”라고 묻는 할머니에게 손자는 “할머니 손자 찬준이우다. 둘째 딸 정복이 아들마씸!”이라고 답한다. 요새 말로 상남자답게 생겼다(실은 J대를 수석 졸업하고 청와대를 다녀온 인재다^^). 사람 마음은 비슷한 걸까? “게매. 니네 어멍 닮안, 촘말로 잘 생겼져 이! 키도 크고 인물도 훠언허고....”라는 할머니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손자의 두 손을 부여잡더니 얼굴을 이모저모 뜯어본다. 당신의 둘째 딸을 떠올리신 건지 눈가에 살짝이 물기가 어린다. 그걸 놓칠 리 없는 손자가 얼른 할머니를 부둥켜안는다. “할머니 나 외국에서 회사 잘 다니고 이시난, 절대로 걱정허시지 맙서 예!” “아고, 경 해사주! 니네 어멍이 니를 봐시민 드러 자랑허멍 좋아헐 건디...”라며 끝내 말을 맺지 못하는 할머니. 손자가 품속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더니 할머니의 두 손에 꼬∼옥 쥐여 드린다. 그 봉투를 가슴에 품고서 하얗게 웃는 할머니 얼굴이 어쩐지 울상이다. 어머니의 2남 7녀 중 둘째 딸은 그야말로 일곱 딸 중에서 군계일학이었다. 제주시에서
요즘 들어 어머니가 입에 달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날 살려줍서!”라는 주문 같은 기도다. 이따금 울먹거리면서 “어머니, 어머니, 날 살려줍서...”라고 할 때는 애간장이 다 녹는다. 밤 중에 홀연히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나가서 마당 한가운데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을 때는 마음이 시려서 눈물이 솟구친다. 이러한 상황을 요양보호사 교재는 치매 환자의 ‘배회’ 현상으로 묘사한다. 동시에 ‘102세가 되도록 살아계신 어머니가 저리도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신 것일까?’ 싶은 속상함도 생겨난다. ‘비교적 잘 살았다’며 ‘호상’으로 지칭되는 장례식의 경우에도 할머니들은 통상 92세, 할아버지들은 86세가 아니신가. 간혹 “아버지, 날 살려줍서!”라고 할 때도 있는데, 숨이 차고 다급해서 하나님을 찾는 부르짖음이다. “어머니, 걱정허지 말앙 이 밥을 드십서!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댄 허주만은, 생각해 보십서. 어머니! 밥을 잘 먹는디 오꼬시 죽는 사름 봅디강? 먹으민 죽지 안 허난, 아무 걱정 허지 말곡, 그자 입을 벌립서!”. 이렇게 아침마다 식탁에서 어머니와 다투는 게 하루의 시작이다. 이렇게 잔소리를 하면서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것은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듯
왜 그러실까? 최근 들어 어머니께서 자주 밥을 달라신다. ‘어떠난산디(왜 그런지) 배고프다게!, 무사 영(왜 이렇게) 배고픈고 이? 얼언 박박 털어점져(추워서 덜덜 떨린다). 아무거라도 또똣헌 물에 홑썰 몰앙 도라게(따뜻한 물에 조금 말아서 달라)’라는 어머니가 내 가슴 속을 휘적이며 저민다. 요즘 세상에 배고프다니.... 삶에 허기가 스민다는 건, 그만큼 외롭다는 뜻이 아닐까? 오늘 아침에도 ‘배가 고프다’시는 어머니에게 밥을 두 번 차려드렸다. 먹고 나서 돌아서면 다시 허기가 지는 건 치매의 일종이다. 우리 할머니도 왕할머니도 ‘밥을 안 준다’, ‘배가 고프다’며 아버지의 울분을 자극하신 적이 있다. 배고픔은 일제시대와 4·3, 6·25, 보릿고개 등을 겪은 세대에겐 설움이고 슬픔이며 고통이고 아픔이 아닌가.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하시던 아버지도 나중에는 치매임을 알게 되셨지만, ‘배가 고프다’는 치매는 그만큼 슬프고도 가슴아픈 말이리라. 지난 주말에는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온 나라를 기쁨으로 들뜨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대표작인 ‘작별하지 않는다’가 제주도의 4·3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더 기쁘고 감사했다. 일전에 한 번 읽고서 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은 무엇일까? 지난밤엔 흙을 적실 만큼 비가 내려서 밤사이에 기온이 서늘해졌다. 저녁에 열어둔 창문 사이로 가을바람이 들어와 이불을 비집고서 선선한 기운을 불어넣었나 보다. 그 기운에 눈을 떠서 창문을 닫으려는데,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혹시나 해서 얼른 나가보니, 세상에! 어머니가 식탁에 앉아 계신다. “어머니, 이 밤 중에 여기서 미신 거 햄수과?”라고 묻는데, 입가에 거무스름한 가루가 묻어 있다. ‘배고프다’ 하시면서 반찬통에서 김을 꺼내든 어머니의 손등이 앙상하니 뼈가 드러나 보인다. 푸른 빛깔의 정맥도 눈에 띄게 선명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얼른 어머니를 부둥켜 안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아, 어머니의 치매가 깊어지셨구나. 이를 어쩌나. ‘102세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깊은 동정심을 표시한다. 얼마나 힘이 들겠냐고. ‘아직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으면, ‘그럴리가 있나, 보지 않아도 당근이지!’라며 내 손을 부여잡는다. 사실 ‘어머니의 치매 증상’이라고 하면 침을 아무 데나 수시로 뱉는 거, 기저귀를 몇 번이나 갈아드려야 하는 거, 화장실 출입이 여의치 않으니 뒷처리를 일일이
주말에 막내가 집으로 왔다. 미국 볼티모어에 사는 아들이다.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동생은, 반가우면서도 낯이 설다. “용익아, 어떵 이추룩 때 맞췅 와저니? 어제 오늘 어머니가 많이 쇠약해지셔서 걱정해신디....” ‘서귀포 강창학 축구장에서 열리는 국제시니어 축구대회에 참석하려고 왔다’는 동생은 여전히 씩씩하고 듬직하다. 어머니를 성큼 안아보더니, 지갑을 꺼내서 돈을 한 웅큼 집어 드린다. 우람한 아들 품에 안긴 어머니는 마치 아기처럼 웃는다. 역시 막내가 최고다. 어머니 속을 많이 태운 만큼 정도 깊이 들었으리라. 등산, 낚시, 운동 등 모든 종류의 힘쓰기를 좋아하는 동생은 몸이 매우 튼튼하다. 그만큼 사고도 많이 따라서 어머니의 애간장을 어지간히 녹였다. 한 번은 육지의 태백산 자락에 등산을 갔다가 추락해서 내가 보호자로 간 적이 있다. 두 팔과 어깨를 붕대로 칭칭 동여맨 동생을 택시에 태우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나는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댔다. 왜 또 산에 갔는냐, 그러다가 죽는 수가 있잖나. 네가 죽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어머니 아버지 생각을 해야지 않겠나.... 하나 마나한 잔소리를 들으며 불같은 성미를 꾹 꾹 눌러 참는 동생을, 운전기사가 흘
어머니가 백 세를 넘기면서부터 ‘이번이 어머니의 마지막 명절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되었다. 102세가 되신 올해는 추석을 준비하면서부터 노천명 시인의 ‘장날’이 떠올랐다. ‘대추 밤을 돈 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루 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준다고 울었다. 절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방울이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차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1938년도에 출간된 노천명 시인의 첫 시집 ‘산호림’에 나오는 시다. ‘돈 사야’라는 말은 충청도 방언으로 ‘내다 팔아 돈을 만들어야’라는 뜻이라고 배웠던 국어 시간이 생각난다. 이십 리를 걸어야 하는 외진 마을에서 음력 11일에 열리는 열하룻장을 보기 위해 새벽같이 떠나는 아버지와 대추를 안 준다고 우는 막내딸은, 우리들 어린 시절의 서정이다. 저녁 무렵에 떠오르는 달을 송편에 비유한 시인의 마음 또한 추석을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의 애틋한 정서를 담고 있다. 저녁 어스름이 먼저 몰려오고 아버지가 장에서 돌아올 즈음, 하루 종일 아버지를 기다리던 이쁜이는 정작 잠이 들어버렸는지.
추석이 보름 앞까지 다가왔다. 며칠 전부터 할머니 산소를 맡고 있는 언니의 마음이 분주하다. 2남 7녀가 있으니 구태여 다섯째 딸이 노심초사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쩌다가 한 번 앞장선 벌초가 자기 일, 그야말로 독박 벌초가 돼버렸다. 할머니 산소는 의외로 단정하였다. 주위의 묘들이 산발을 하고 있다면, 할머니는 머리카락이 어깨를 살짝 덮을 정도다. 늦가을이라면 오히려 찬바람을 가려주겠다 싶은 아늑함마저 느껴졌다. 그동안 산소를 염려할 아버지가 생각날 적마다 ‘산소에 와서 잡풀을 뽑았다’라는 언니의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인지 언니에 대한 미안함인지 모를 감정이 목에 걸려 얼얼했다. 언니의 등에 업혀서 산담에 올라앉은 어머니가 주위를 살피신다. 중문 오일시장으로 가는 외길과 아득히 내다보이는 바다, 나무에 달린 풋귤들이 기억을 되살린 것일까? 어쩐지 낯익어 보이는 비석을 가만히 살펴보더니, 돌 틈을 비집고 올라온 고사리를 뽑기 시작한다. 드디어 상황을 파악하셨나? ‘감히 우리 서러운 시어머니 산소에 줄기를 뻗치다니…'하는 자세로 잡풀들을 있는 힘껏 잡아채신다. 혹시나 넘어지면 어쩌나 싶어서 호미를 들고 선 내가 안절부절못하니, 언니
올여름은 박완서 선생님의 수필집,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오랜만에 참 좋은 사람을 만난 느낌이, 무더위에 그늘 짙은 나무에 앉은 듯 서늘하였다. 35편의 수필 중에서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라는 글에 연두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글이 좋아서 읽고 또 읽어보고도 여운이 남아서, 아마도 그 마음을 표시해 놓은 게다. 「평범하게 키우고 있다. 공개해서 남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애 기르기의 비결 같은 것도 전연 아는 바 없다. 그저 따뜻이 먹이고 입히고, 밤늦도록 과중한 숙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숙제를 좀 덜 해 가고 대신 선생님께 매를 맞는 게 어떻겠느냐고 심히 비교육적이고 주책없는 권고를 하기도 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장가들자마자 네 계집만 알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런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은 예쁘다. 특히 내 아이들은, 아이들에게 과도한 욕심을
이 글은 아버지에 대해 한 번만 더 써달라는 독자의 요청으로 쓰였다. 20년도 더 지나 누렇게 바랜 봉투 속으로 들어가 있던 편지들을 다시 꺼내 읽어보며, 새삼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 준 진심이 감사했다. 이 삼복더위에 가슴속으로 솔바람이 스며드니, 사랑도 여름에는 화끈한 정열보다 은근한 보챔으로 다가오나 싶다. ‘이 세상에서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 가장 처량해진 나이이다. 만추(晩秋)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쓸쓸함, 내 정수리를 지그시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예년에는 한 번 가던 추석 성묘를 올해는 두 번 다녀왔다(박완서, 내 식의 귀향).’ 박완서 선생님의 에세이를 발견하게 된 건, 불볕더위에 짓눌려서 피신을 간 서점에서 주어든 행운이었다. 우선은 수려한 산이 있고 그 앞에 냇물이 흐르는데 일가족이 그곳으로 피서를 가는 표지가 눈길을 잡아끈 덕분이었다. 그리고 무작정 펼쳐 든 페이지에서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라는 구절이 강하게 가슴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102세 어머니가 잠깐 잠이 든 새 살짝이 도망쳐 나온 나를 두고 하는 경고가 아닌가. 그런데 ‘소박하고, 진실하고, 단순해서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 작가로 소개된
2008년도 9월에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책을 썼다. 첫 장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로 시작된다. 여기에 잠깐 그 도입부를 옮겨본다. ‘어쩌면 이게 아버지와의 마지막 인사인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을 떨치면서, 나는 공항의 출국장을 향해 아버지의 휠체어를 천천히 밀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서 넷째, 다섯째 언니가 무거운 표정으로 걸었다. 아들딸이 미국에 있어서 부모님을 자주 뵙는 큰언니는 다소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그리로 막내딸이 옆에서 조심스레 어머니를 부축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미국으로 가기가 싫으신지 발걸음을 몹시도 느리게 옮기신다. 아버지를 에워싸고 있는 식구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왠지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시지 않은가... 드디어 휠체어가 출국장 입구에 도착했고, 모두가 멈춰서서 작별의 인사를 건넬 참이었다. 바로 그때 아버지께서 천천히 휠체어를 돌려 우리들을 향하셨다. 그리고는 “잘 있어라”는 말과 함께 가까이에 서 있는 내게 가만히 손을 내미시는 것이었다. ‘아, 아버지! 이제 당신은 등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걷는 딸의 마음까지도 다 헤아려 보실 수가 있으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