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아, 나 어떵 허코 이? 배가 막 고프다게....” “어머니…. 아까 식사 해수게! 좋아허시는 고등어 구이영 언니가 해 온 호박잎 국에 밥 혼 그릇을 다 비워수다….” ‘배고프다’라는 말처럼 서러운 일이 또 있을까? 1923년생인 103세 어머니가 요즘 들어 자주 하시는 말씀이 ‘배고프다, 먹을 거 도라!(주라)’는 요청이다. 애써 식사를 차려 놓았는데 ‘못 드시겠다’라는 말보다야 백번 천번 배부른 소리지만, 어머니의 ‘배고프다’라는 말은 참으로 슬프고도 쓸쓸하다. 이후에 어머니가 천국 가시고 나서 덩그러니 비어 있는 어머니의 식탁을 볼 때마다, 나는 얼마나 자주 울먹이며 잘못 해 드린 흔적들을 속절없이 바라보게 될 것인지…. 오래도록 내 가슴을 울릴 후회와 한탄은 또 얼마나 자주 하게 될는지…. “이 국은 누게가 끓여시니? 호박잎도 쿠숭허고(구수하고), 촐레(반찬)도 잘 촐려신게!(차렸네)....” 아, 저 말은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자주 하시던 식사 후의 고마운 표현이 아니던가. 어머니에게 특별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간략하게 기록해 놓는 일기장을 펼쳐서 오늘의 일상을 기록해 놓는다. 적는 김에 기후에 대해서도 몇 자 옮겨본다. ‘연일 기세를 올리고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지난 7월 27일의 일기장에는 “봉택이 어멍은 죽어시냐?”라는 어머니의 물음이 적혀 있다. 만 하루와 반나절, 거의 36시간의 기나긴 꿈의 여정을 마치고서 홀연히 눈을 뜨신 어머니가 처음으로 내뱉으신 소리다. 나를 보시자마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시면서, 마치 오랜만에 만난 귀한 자식 대하듯 절실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바라보신다. 하마터면 못 볼 뻔한 것처럼 반가움과 간절함이 가득하다. “어머니, 봉택이 어멍 죽은 지가 언제우꽈? 40년도 더 되수게? 어머니는 어디 갔단 오십디강? 봉택이 어멍은 만나봅디가?” 그러자 어느새 제 정신이 드셨는지 시선을 천장으로 돌리신다. 그사이에 무척이나 수척해지셨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얼굴에 쓸쓸한 그림자가 잠깐 어른거리다가 사라진다. ‘봉택이 어멍은 어머니 조캔디, 어머니보다 먼저 죽으민 됩니까? 섯동네 우잣(텃밭) 넓은 집에 아들네영 손지들 거느리멍 막 잘 사는 거 닮음디다….’라고 이야기를 지어낼 걸 그랬나? 아니, 어머니는 알고 계신 거다. 봉택이 어멍이 죽은 것도, 물질하러 바당에 갔다가 혼자서 숨을 거둔 것도. 어쩌면 ‘망실이에 소주병을 남겨놓고, 작정하고서 남편이 있는 하늘길로 홀
이러다가 온 세상이 소멸해 버리는 건 아닐까? 무서움이 솟구칠 정도로 덮쳐오는 무더위가 연일 기세를 더한다. 마당의 잔디는 아침마다 물을 주는데도 군데군데 누렇게 죽었다. '여름 더위에 가장 약한 게 노인'이라더니, 장례식 소식도 간간이 날아든다. 주로 90세가 넘어서 요양원에 가 계신 어머니들이다. 제주에서 장수하는 노인들의 평균 수명은 할아버지가 86세, 할머니가 92세로, 약 6살 정도 차이가 난다. 103세 우리 어머니도 예외가 아니신지, 오늘 아침에는 정색을 하시고서 한 말씀을 하신다. "정옥아, 나, 영장(장례식)은 니가 책임져주라 이! 누가 책임져 주느니게. 깨끗허게 책임져, 이!" "알아수다, 어머니! 나가 어머니랑 23년을 같이 살아신디, 당연허주 마씸. 홑썰도(조금도) 걱정허지 맙서, 예!" "돈은 경 하영 안 들 거여(돈은 그렇게 많이 안 들 거다).... 니네는 비채도 경 하지 안 허고(너희는 부채도 그렇게 많지 않고). 아버지도 죽언 책임해 줘시난. 속는 사름이 속주(수고하는 사람이 수고하지), 아무나 안 해준다. 아무리 애삭허고(억울하고) 속상허곡 가슴이 아파도, 니가 책임져 도라, 이!". 그러시곤 아예 노래를 부르신다. "정옥아,
어쩌다가 밤낮이 바뀌어버린 아기처럼 요즘 들어 어머니는 낮에는 달처럼 주무시고 밤에는 해처럼 배회하신다. 엊그제는 거의 하룻밤 하룻낮, 24시간을 주무시기만 하셨다. ‘혹시나….’ 하는 걱정이 불안스레 꿈틀거려서 가만히 어머니 얼굴에 귀를 대보았다. 아무래도 숨결이 너무 약하신 듯하다. 갑자기 덜컥 두려움이 솟구친다. “아고게! 어머니, 얼른 일어 나십서! 저녁때가 다 되어수게!”하고 큰 소리로 깨워본다. 반응이 없으시다. 그 순간 ‘아직은 안 돼!'하는 조급함이 급하게 심장을 두드린다. 얼른 몸을 기울여서 어머니의 눈꺼풀을 뒤집어 본다. 그 순간 “야이, 무사?(얘, 왜 그래)”하면서 거칠게 밀치신다. ‘아고, 더 주무십서, 예! 미안허우다. 어머니가 나만 나둬동(놔두고) 솔째기(살짝이) 아버지한티 가불카부댄(가버릴까 봐)....’이라고 멋쩍게 물러선다. ‘역시, 우리 어머니시네….’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직은 어머니에게 호령할 기운이 남아 있으시다. 오늘은 정오쯤에 일어나셨다. 거실로 나와 당신의 자리에 앉자마자 마당을 쳐다보시더니 한숨을 쉬신다. 더위에 시달리다 못해 머리를 숙인 상추들이 숨을 죽이며 온몸을 늘어뜨리고 있다. 예년보다 급하
요즘 들어 어머니의 하루는 오후가 되어서야 시작되는 날들이 많아졌다. 오늘은 애간장과 인내심을 거의 다 태우고 나서, 저녁 7시쯤에 눈을 뜨셨다. 그 사이에 나는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어머니가 눈을 뜨지 않으신다. 어떡하면 좋을까. 아무래도 이번에는 어려우실 듯 하다’는 등의 하소연을 해댔다. 하나마나 한 걱정이라서일까, 아니면 노인들의 잠은 보약과 같아서 그럴까? 한결같이 보내오는 응답이 ‘그냥 주무시게 놔둬라. 잘 만큼 자고 나면 일어나실 게다’라는 소리다. 어머니의 시간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줄을 알면서도, 마치 혼자서 걱정하다가 무슨 일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심정이다. 어쩌면 책임질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서 미리 공유하려는 듯 꼭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아, 나의 이 한없이 나약하고 비겁한 마음을 어찌할거나. 정말로 노인에게는 잠이 보약이다. 기운이 충전되셨나 보다. 어머니는 필요한 만큼 주무셨는지, 슬며시 눈을 뜨셨다. 백설공주가 따로 없지 싶다. 누구나 깊은 잠에 빠져서 눈을 뜨지 않을 때는, 저러다가 깨어나지 하면서도 마음 한 켠으론 의심과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나올 것이다. ‘스멀스멀’이란 말이 나왔으니, 평생에 잊히지 않는 일이 하
하룻밤과 낮, 거의 스무 시간을 지그시 눈을 감고서 주무시는 어머니. 그 앞에 엎드러져서 “어머니, 미안허우다. 나가 그자 ‘침 바끄지(뱉지) 맙서, 밥 흘리지 맙서’ 허멍 존다니(잔소리)만 해연..., 어머니한티 입에 맞는 음식 하나 못 해드리멍 그냥 ‘밥 먹읍서! 살려도랜만 허지 말앙 입을 벌립서. 밥 먹는디 죽는 사름 보십디강!’ 허멍 큰 소리만 지르곡, 반찬이 어신 건 생각을 못 핸 예.... 죄송허우다, 어머니! 제발 눈 뜹서게. 나가 영 빌엄수게....”라면서 답답한 마음에 어머니의 눈꺼풀을 뒤집으려고 하자, “야이, 무사(얘가 왜 이래)?”라면서 내 손을 강하게 밀치신다. 아, 우리 어머니가 괜찮으시구나. 힘이 여전하시구나. 살아나셨구나! “어머니, 이제랑 일어납서. 어머니 그추룩 아끼는 상추를 어떤 머리 검은 쥐(사람)가 막 뜯어감수게!”. 그러자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눈을 살며시 뜨시더니, 내 얼굴을 두 세 번 쓰다듬으신다. 그러고선 ‘너는 왜 이리 예쁘냐’는 듯한 표정으로 다정하게 웃으시곤 다시 눈을 감으신다. ‘아, 이렇게 세상을 떠날 수도 있겠구나’하는 마음에 애간장이 다 녹아든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은 불효뿐이구나. 언제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창문을 열어 보니 새들이 전봇줄에 앉아서 우리 집을 쳐다보고 있다. 세상에! ‘이때다’하고, 파도 소리가 대문을 넘어온다. 새삼 우리가 참 좋은 집에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들의 요청에 따라 손자들을 돌보아주러 미국으로 들어가신 지 17년. 아버지를 그 땅의 공원묘지에 장례하던 날 내 손을 부여잡고서 한국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그새 23년을 이곳 보목마을 바닷가 섶섬이 보이는 곳에서 살아오셨다. 이중섭 화백이 1951년 1월부터 1년간 가족이 단란하게 살았던 초가집, 지금의 이중섭 거리 중간쯤의 고갯마루에서 그렸을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 ‘섶섬이 보이는 풍경’ 앞에서 말이다. 어머니가 처음 머무셨던 우리 집은 서귀포에서 가장 처음 지어진 아파트 그 이름도 따스한 남양맨션이었다.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마련한 집은 그만큼 기쁘고 행복한 곳이었다. 더욱이 싱글이었던 주인이 아주 저렴하게 팔아준 곳이어서 마치 선물을 받은 것처럼 운수 좋은 집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맹자의 어머니께서 아들을 위해 세 번을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의 종착지처럼 바로 초등학교가 이웃해 있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을 놀이터 삼아 마음껏 뛰놀
요즘 들어 어머니의 잠꼬대가 부쩍 늘었다. ‘허태행씨, 허태행씨....’라면서 아버지를 찾는 소리도 훨씬 잦아졌다. 잠꼬대를 그냥 놔둘 수가 없어서 일기장에 기록해 놓는다. 지난 8일에는 “아고, 우리 어머니 어디 가시니게?”라고 당신의 어머니를 찾으신다. 달력을 보니 어버이날이었다. 어머니의 잠꼬대는 그냥 헛소리가 아닌 게다. 오늘 새벽에는 “논에 물 대라, 제게 제게(빨리 빨리)! 우리 논 차례여, 이!” 하시며 허공에다 두 팔을 휘저으신다. 여간 급하고 간절하신 게 아니다. 혹시나 싶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아하, 요즘이 모내기 철이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의 잠꼬대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신 거다. 102년을 살아오시면서 오랫동안 몸에 축적된 습관과 예감의 발로다. 우리 논이란 게 남의 논을 병작하는 것이다 보니, 농사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곳이 아니었다. 대포마을 약천사 근처의 선궷내 물을 따라 형성된 논들은 층층이 계단식에다 면적이랄 것도 없는 조각난 땅들이었다. 지금 와서 그곳을 바라보면, 어떻게 저기를 논으로 삼고서 농사지을 생각을 다 했을까 싶다. 특히 우리 식구들이 모두 달려들어서 낑낑 거리면서 논일을 했던 곳은 낭떠러지에 물이 떨어지다 보니
“어머니, 어디 가십디강?” 이른 아침 어머니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고 보니, 어머니가 주무시면서 잠꼬대를 하신다. 꿈을 꾸셨나 보다. 103세 어머니가 꿈속에서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시다니.... 어머니 임하용님은 1880년 명치 13년에 출생, 43세에 막둥이 딸을 낳으셨다. ‘성춘(成春)’이라 부르실 적에 ‘네 인생에 봄을 이루어라’ 기원하셨을 할머니를 생각해 본다. 살아 계시다면 146세가 넘으셨을 터. 그래도 꿈속에서 만난 어머니는, 생생한 땀 냄새에서 달콤한 살 내음이 느껴지는 제주 여인이 아니었을까? 초등학교 때 일이다. 어머니가 클방(정미소)에서 쌀을 한 짐 지고 오셨다. 아, 그 껍질을 갓 벗겨낸 쌀(곤쌀)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라니.... 우리는 그때 쌀을 일컬어 ‘고운 쌀’이라고, ‘곤쌀’이라 불렀다. 그 투명하게 기름기가 흐르는 쌀 한 줌을 입에 털어 넣고서 씹고 또 씹으면 흘러나오던 달짝지근한 맛, 그 비몽사몽의 감미로움이여! 어머니가 쌀 구덕을 난간에 부려놓자마자, 나는 얼른 팔을 뻗어서 쌀 한 줌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혹시나 꾸중이 날아 올까 봐 얼른 달아날 태세를 취하였다. 그러자 막 머릿수건을 벗어서
고향인 대포마을의 어르신이 돌아가셨는데, 서귀포의료원에서 일포를 한단다. 모처럼 고향 분들을 뵙겠구나 싶은 마음에, 장례식인데도 반가운 마음이 저만치 앞서 걸었다. ‘98세를 사시다 가신 고인의 사진이 편안해 보인다’라며, 함께 간 언니도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는 눈치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언니의 단짝 친구인 고명딸을, 발바닥에 먼지 하나 묻지 않도록 곱게만 키우셨다. 사람도 너무 아끼면 하늘이 질투라도 하시는 걸까? 그 귀한 딸이 40대에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 장례식장은 그다지 무겁지 않은 분위기였다. 아니, 상주의 표정과 문상객들의 인사로 보아, 호상(好喪)인 듯하였다. 복을 누리며 별다른 병치레 없이 오래 사신 분이시니 그럴 만도 하였다. 오랜만에 뵙지만 낯설지 않은 동네 분들이 우리를 보자마자 이구동성으로 어머니의 안부를 물으신다. 가슴이 뭉클하게 따사롭고 정다웁다. “니네가 맻 성제고(몇 형제니)?”라고 묻는 삼춘은 알 동네에서 이웃해 살았던 춘자 어멍이시다. 몰라서 물으시는 게 아니라 그만큼 반가운 마음을 담아서 하시는 말씀이다. 대포마을은 중심에 향사(리사무소)를 두고, 동서남북으로 동동네, 섯동네, 알동네, 웃동네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리
요즘 들어 어머니의 치매증세가 몹시 깊어지는 듯하다. 섬망 증세가 있으신 듯, 20여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자주 찾으신다. “니네 아방은 어디 가시니? 밥이나 먹어점신가 이? 아방은 밥에 촘지름을 듬박허게 뿌령(참기름을 충분하게 뿌려서), 독새기 두 개만 깨엉 잘 저서주민(달걀 두 개만 깨서 잘 저어드리면), 호루 종일 밭갈쇠영 굳짝 일을 허는디(하주 종일 밭 가는 소와 함께 계속 일을 하는데)...”. 아버지가 저렇게 걱정이신 건, 그만큼 보고 싶은 그리움이 사무치신 게다. 워낙 체격이 좋으신데다가 술 담배를 안하시던 아버지는 남편을 여의고서 밭 갈 일이 태산인 우녁집에서 부탁을 해오면, 우리집 일을 제쳐놓고 새벽같이 소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쯤 우녁집 아지망이 마련해 놓은 점심 구덕을 펼치면, 까만 꽁당보리밥에 된장과 풋배추가 들어 있었다. 이 밥으로 어떻게 허기를 때우고서, 사래 긴 저 돌짝밭을 저녁까지 갈아치울 것인가? 아버지는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당신이 들고 간 보자기를 펼치셨다. 거기에는 어머니의 정성으로 반질거리는 참기름과 계란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얼굴이 화안해진 아버지는 밥에다 참기름과 계란을 넣고, 배추를 손으로
103세의 삶은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일까? 1923년 3월 22일은 어머니가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날이다. 100년을 넘게 살다 보면, 자식은 어머니의 생일을 잊어먹을 수도 있겠다. 2남 7녀나 되다 보니 나이가 80에 가까운 자식도 있고, 외국에 있거나 육지에 사느라 ‘보지 않으면 멀어지는’ 자식들도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이 그저 생긴 게 아님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하지만 자식을 이 세상에 보내놓으신 하나님은 결코 잊으심이 없으신가 보다. 지난 토요일 어머니의 생신날은 유난히 하늘이 해맑고 기온이 따스했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분홍색 코트를 입혀드리자, “오늘이 미신 날이니? 이추룩 곱닥헌 옷 입엉, 우리 어디 갈꺼니?”라고 물으신다. “어머니 인생 최고의 날이우다. 103세 생신이라 마씸. 오늘은 이 차 탕 대포로 가게마씸. 대포! 어머니 고향으로....” 어머니를 부축하며 외치는 언니의 말에, 어머니가 미안한 듯 혼잣말을 하신다. "백 설 넘은 늙은이가 생일은 미신 생일게... 호루 호루 살아지는 것만도 니네들한티 고맙고 미안헌디..." 어머니 얼굴을 보니, 정말로 미안하신 표정이다. 문득 요즘 노인대학 특강을 다니면서 만든 강의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