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0 (화)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어머니의 100세 일기] 어머니 눈에 자주 보이는 아버지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창문을 열어 보니 새들이 전봇줄에 앉아서 우리 집을 쳐다보고 있다. 세상에! ‘이때다’하고, 파도 소리가 대문을 넘어온다. 새삼 우리가 참 좋은 집에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들의 요청에 따라 손자들을 돌보아주러 미국으로 들어가신 지 17년. 아버지를 그 땅의 공원묘지에 장례하던 날 내 손을 부여잡고서 한국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그새 23년을 이곳 보목마을 바닷가 섶섬이 보이는 곳에서 살아오셨다. 이중섭 화백이 1951년 1월부터 1년간 가족이 단란하게 살았던 초가집, 지금의 이중섭 거리 중간쯤의 고갯마루에서 그렸을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 ‘섶섬이 보이는 풍경’ 앞에서 말이다.

 

어머니가 처음 머무셨던 우리 집은 서귀포에서 가장 처음 지어진 아파트 그 이름도 따스한 남양맨션이었다.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마련한 집은 그만큼 기쁘고 행복한 곳이었다. 더욱이 싱글이었던 주인이 아주 저렴하게 팔아준 곳이어서 마치 선물을 받은 것처럼 운수 좋은 집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맹자의 어머니께서 아들을 위해 세 번을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의 종착지처럼 바로 초등학교가 이웃해 있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을 놀이터 삼아 마음껏 뛰놀 수 있었다. ‘뛰어봐야 벼룩’이라고 저녁밥이 다 되어서 찾아보면, 으레 저녁 햇살에 발그레진 아이들이 땀투성이가 되어 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행복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파트를 매우 불편해 하셨다. 물론 80세 노인이 오가기에는 3층 계단이 만만치 않은 노역을 요구하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머니를 탐탁치 않게 했던 것은 낡은 아파트가 발하는 남루함과 노후함이었다. 친척들이 방문하고 가는 날은 노골적으로 힘들어 하셨다. 하기야 미국에서 공부할 때 우리끼리 했던 농담을 생각하면,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요컨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일본 아내와 미국 집에 살면서 중국 음식을 마음껏 즐기는 남자’라는 이야기다. 그만큼 어머니가 잠시 함께 살았던 장남네 타운하우스나 자동차 정비소를 크게 운영하는 차남네 단독주택은 전형적인 미국집에 해당하였다. 그러니 이제 막 ‘생애 처음으로 우리집을 마련했다’라며 어머니를 모셔 온 딸의 아파트에 얼마나 실망이 크셨으랴. 결국 ‘친척들 보기에 부끄럽다’라는 어머니의 진심 앞에 우리는 이사를 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전봇대 옆의 박스에 놓여 있는 ‘교차로’라는 신문을 보게 되었다. 아하, 그게 바로 ‘오늘부터 내 글이 연재된다’는 바로 그 신문이었다.

 

실은 탐라대학교 시절 한라산 중턱에 있는 내 연구실로 어떤 아가씨가 머뭇거리면서 들어왔다. 요컨대 ‘서귀포에도 오일장 신문을 내고 싶으니, 상인들에게 장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위 서비스 정신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게 용건이었다. 때마침 방학이 시작될 즈음이었고, 당시 나는 새내기 교수였다. 고향에 새로 들어선 대학 덕분에 귀향을 하게 된 내게 소위 애향심을 자극하는 기자의 요청은 거절할 수 없는 부탁, 아니 내가 할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집어 들고 온 교차로를 펼치니,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집이나 토지를 사고파는 지면이었다. 행운이었을까, 선물이었을까?

 

바로 내게 꼭 필요한 정보였다. 더욱이 그 집은 일전에 내가 한 번 들른 적이 있던 곳이었다. 서귀포시가 요청한 ‘서귀포시지’의 경제면을 쓰기 위해 ‘서귀포시 경제의 산 증인들’을 찾아서 방문했던 집이다. 6.25때 피란을 와서 서귀포 솔동산을 기반으로 가게를 열고, ‘제주도에서 계란을 수매해서 부산에서 팔고 나서는 가마니에 고무신 등을 도매로 사고 와서 소매로 팔았다’는 상업의 역사에 감동했던 곳.

 

그 집 앞에 마당처럼 펼쳐져 있는 바다와 그림처럼 높여진 섶섬의 풍경을 보니, 가슴이 마구 뛰었다. 첫사랑에 빠진 처녀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 집이 우리집이 되었다. 내놓은 지 6개월이 되어도 팔리지 않던 집이 내가 사자마자 ‘매입 희망자들이 줄지어 나타나 한탄을 하더라’는 후일담을 남기면서.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럴 분이 아니신데 어머니가 왜 그토록 우리 아파트를 불편하게 여기셨을까? 이 집으로 이사 온 후부터 어머니는 물때가 되면 바닷가로 나가서 보말을 잡으셨다.

 

그때는 요즘처럼 해녀님들이 바다를 독점하거나 소유하지 않았다. 누구나 썰물이 많이 나가는 물때가 되면 바다로 나가서 마음껏 보말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보말 덕분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묻고 온 슬픔도 노동의 고단함도 잊은 채 물때를 세며 생기를 회복하셨다.

 

보말을 깔 때마다 빛이 나는 눈동자와 부지런히 오가는 손놀림의 묘기를 보며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구나, 우리를 돌보아 주시나 보다. 오늘 아침에도 맥스와 함께 산책을 하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 대문 앞에서 마주친 행인이 한 마디를 건낸다.

 

“참, 좋은 집에 사시네요. 어떻게 바닷가 바로 이 섬 앞에다 내 집을 마련하셨나요?”.

“어머니 덕분입니다. 103세가 되시는 우리 어머니가 해녀이셨거든요...”

 

어머니가 지금도 주무시고 계신다. 아침을 지나 시계가 정오 가까이에 다다른 이 시간에도 미동을 않으신다. 요즘 들어 기운이 많이 쇠해지셨다. 한참을 더 주무시고 기운이 축적되어야 게슴츠레 눈을 뜨신다. 그러고도 한동안 자리에서 뒤척이신 후에야 겨우 요강을 붙들고 일어나실 게다.

 

“어머니, 괜찮으시우꽈?”라고 물으면, “말 곧지 말라. 숨이 차다!”라며 고개를 저으신다. 그러고선 아버지 이름을 부르면서, ‘허태행씨는 나를 두고 어디로 갔나?’라고 물으며 항의할 것이다.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남편이 아닌가. 요양보호사 표준교재(505쪽)에 의하면, 임종 과정 동안 나타나는 증상으로 수면양상의 변화를 들고 있다. 점점 잠자는 시간이 길어지며, 대소변을 조절하지 못하고 실금 또는 실변하게 된다는 점도.

 

아버지는 18살에 바로 옆집에 사는 17살 어머니와 백년가약을 맺어놓고 80세에 먼저 천국으로 가셨다. 그 이별의 시간까지는 그야말로 둘이 한 몸인 듯 집에서, 논에서, 들에서, 산에서, 교회에서도 늘 일심동체였다.

 

“어머니, 아버지는 어떤 사름이여수과?”라고 물으면, “세상 어시 좋은 사름...”이라며 끝을 맺지 못하신다. “니네 아방이영 사는 것은 고생도 고생이 아니라. 가을에 쇠 멕일 촐(꼴)을 헐 때는, 곹이 한락산에 올라강, 밤에는 자곡 허멍 이틀을 굳짝(빈틈 없이 계속) 촐을 다 베어신예. 니네 아방이영 허는 일은 군소리가 필요 어신다. 그냥 눈 맞추곡 손 맞추멍 보지란이 움직이민 되는예. 사흗날 저녁 되민 구루마에 촐을 잔뜩 실아신디, 놈들 보민 세상 어신 이삿짐추룩 지붕만큼 촐이 핫주게(많았지). 니도 알주만은 우리 얼룩쇠가 얼마나 착허고 부지런 해시니? 아방이 날 보멍 경 고라라(아버지가 나를 보면서 그렇게 말하더라). ‘제주 사름덜은 쇠로도 못 나난 제주 예조로 나신예'라고 허주만은, 자네는 쇠보다 더 부지런헌디, 나한티는 선녀라. 자네 만난 덕분에 고아 같은 외로움도 떨치고, 놈들 모르게 고생은 덜 허곡, 밥은 촘지름(참기름)에 독새기(계란) 놩 잘 먹고, 옷도 잘 입고, 육지도 자주 가고, 아이들 아홉을 다 잘 키워서..... 참 고마워서! 나가 먼저 천국 가크매(갈테니), 자네는 제주도로 돌아강 똘들이영 실컷 구경도 다니곡. 미국서 못 허던 바당에도 가봐. 위험헌 물질은 허지 말고 이! 그냥 보말 잡곡, 미역이나 좀 건지고. 좋아허는 것도 하영 먹고게... 부디 아프지 말앙 오래오래 살당, 나가 보구정 허민 연락해여. 나가 자네를 도르래 가크매...”

 

그 아버지가 요즘은 가끔 어머니 눈에 보이나 보다. “나 손 잡아 줍서!”라고 자주 중얼거리시니...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추천 반대
추천
2명
100%
반대
0명
0%

총 2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8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