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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이제는 다 살았다 (4)

시월의 아침 10시. 하늘이 너무 높아서일까, 바람이 솔솔 불어서일까. 오늘은 ‘휴무’라면서 집에 들른 언니가, 불현듯 어머니를 보듬어안는다. 그리고는 전에 없는 애교를 부리면서 “어머니, 어디 가구정 헌 디 어수광?”이라고 묻는다. 물으나 마나, 어머니는 “가민 어디 가느니? 나 몸뚱아리에 구경이 드랑드랑 했져”라고 하실 터이다. 10년도 아니고 20년을 같이 살아온 어머니의 속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내가 아닌가. 그런데 어머니가 달라지셨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 할망 산에 데려다 도라”고 하신다. 순간, 나와 언니의 눈이 불안스레 마주쳤다. 어머니가 이상하시다. 전에 없는 말을 하시니...... 어른들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전에 안 하던 일을 하시지 않는가.

 

그래도 어쩌랴. 모처럼 해 본 소리지만 어머니가 저렇게 말씀하시는 걸. 어머니는 마치 소풍 가는 어린 애 마냥 자동차 뒷좌석에 얼른 올라 앉았다. 100세 할머니 얼굴에 가을볕이 비쳐드니 잘 익은 감처럼 화사해졌다. ‘봄볕은 며느리 쪼이고, 가을볕은 딸을 쪼인다’ 했던가. 오늘은 어머니와 딸의 입장이 뒤바뀐 모양새다. 아이처럼 천진스런 어머니, 어머니처럼 염려스런 딸. 자동차만 타면 꾸벅꾸벅 조시는 어머니가, 오늘은 차창 밖 풍경을 유심히 보신다. 보이는 모든 것들을 당신의 눈 안에 고이 간직하고서 오래오래 기억하려는 것처럼.

 

 

보목마을에서 대포마을까지는 일주도로로 30분이면 족한 거리다. 그 길을 언니는 돌고 돌아서 드라이브 시간을 두 배로 늘렸다.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달리다가 가게에 들려서 과자와 음료도 샀다. 약천사를 지나 대포마을 지경에 들어서면서는 자동차를 세워서, “어머니 여기가 어딘지 알아지쿠과?”라고 물었다. 성귓내가 흘러서 논 농사가 가능했던 그곳에서, 우리는 이모님네 층계진 논을 병작하였다. 물을 대기도 어려웠고, 타작해서 볏짚을 나르기도 힘든 곳이었다. 그 때 그 시절의 고생을 우리가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그런데 어머니는 논도, 일도, 사람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싶은 시절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얼마나 먹고살기가 힘들었던지, 어머니 아버지는 밤낮으로 일만 하셨다. 2남7녀에 할머니까지 더해져서 12명이 17평 초가에서 오글대며 살았으니...... 동네에 병작할 땅이 생겼다 하면, 그래서 일 잘하기로 소문난 어머니에게 제의가 들어오면, 아버지는 두 말 없이 받아서 최선을 다했다. 예수 믿는다고 가문에서 쫓겨난 아버지는, 온 동네에 충만하게 퍼져 있는 술·담배를 일체 가까이 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특별히 더 풍성하게 내려진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남들보다 두 배로 일하셨다. 아버지가 “이랴〜!!!” 하면서 밭을 가는 테너 음성은, 동네의 홀어머니들이 “우리 밭도 갈아줍서!!”라는 요청으로 메아리쳤다. 부모님의 열심 덕택에, 큰 언니와 샛 언니는 우리 마을 최초의 여고생이 되어서 제주시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자 세 번째인 아들은 대학을 희망했고, 넷째도 언니들을 핑계삼아 제주시행을 고집했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다. 다시 성귓내로 돌아오면, 그 논의 존재는 언니가 요모조모 자세하게 짚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도 모르고 넘어갈 만큼 변해 있었다. 전답인지 잡종지인지 모르게 내팽겨쳐진 그 땅은, 언제라도 상승된 지가에 힘입어서 누군가의 투기대상으로 선택된다면 대박을 칠 것이었다. 바로 밑이 베튼개 바다인데다가 절벽에는 소나무들이 절경을 이루었고, 도로 저편은 이미 펜션과 식당들이 자리해서 성업중이었다. 게다가 이미 관광지로 지정되어 인지도 높은 약천사를 끼고 있으니 더 말하여 무엇하랴.

 

대포 포구를 지나서 중문쪽으로 차를 돌린 언니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차를 세웠다. ‘아니, 이런 곳에 무슨 산소가 있단 말인가’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세상에! 중문관광단지가 개발되면서 우리 밭이 있던 구명물 지경이, 상전벽해(桑田碧海), 그야말로 뽕나무 밭이 변하여 바다가 되어 있었다. 언니의 안내가 아니라면 나는 아마 꿈에서조차 그곳이 우리들의 꿈과 땀이 담긴, 우리집 재산의 보고였던 구명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가신 이래 근 40년 동안 할머니 산소를 돌보아 온 언니는, 익숙한 듯 차에서 내려 호미 등속을 챙겼다. 그리고는 내게 그것을 건네주더니, 얼른 등을 돌려 어머니를 업었다. 졸지에 딸에게 업힌 어머니는 영락없는 아기가 되었다. 반면에 호미를 들고 뒤뚱거리며 좇아가는 나는, 오래 된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온 늙은이였다.

 

그동안 혼자서 묵묵히 할머니 산소를 돌보아 온 언니는 고향 그 자체였다. 푸근하고 익숙한 언니의 뒷모습에 안심이 되면서도 한없이 미안해지는 마음. 어릴 적에 그리도 자주 걸었던 길인데도 발이 헛돌고 몸이 허둥거렸다. 처음 오는 곳처럼 낯이 설었다. 내 마음을 헤아렸을까? 언니가 뒤돌아서더니, “정옥아, 여기가 구명물 아니냐. 그렇게 콸콸 솟아서 목욕을 했던 물이 다 어디로 가신고 이?” 하며 옛추억을 환기시켰다. 그러고 보니 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던 자갈밭에 밀감나무가 심겨져 열매를 묵직하게 매달고 있다. 밭에서 김을 매다가 점심때가 되면 냇가에 무성하게 자란 미나리를 뜯어서 된장에 찍어 드시던 어머니.

 

그런데 정작 어머니는 그 모든 과거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하였다. 신기하게도 우리밭이 있는 지경은 그 시절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심어 놓고 한 번도 따먹지 못한 밀감나무는 무심하게 자라서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있었다. 할머니 산소는 그동안 누군가가 다녀간 것처럼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그 흔한 고사리도 억새도 흔적이 없었다. “언니, 혼자서 이추룩 검질 매느라 고생 하영 해신게. 같이 와시만 좋아실건디...”라고 혼잣말이 저절로 나왔다. “심심헐 때, 할머니 생각날 적마다 오단 보난, 올해도 너댓번은 와진 거 닮네...”라며 희마하게 웃는 언니. 그래, 오죽하면 아버지가 언니 꿈 속에 나와서 ‘정심아, 고맙다 이!’ 하고 안아주고 가셨으랴.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언니가 야간 당번을 섰다. 집이 병원과 가까웠을 뿐 아니라, 우리는 아직 아이들이 어리고, 다른 딸들은 제주시에 살았다. 그런데도 언니는 조금도 불평이나 불만을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땅하게 여기고 어머니를 정성스레 간호하였다. 그날도 어머니 침대 옆에 놓여진 간이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불현듯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벌떡 일어나려는데, 아버지가 언니를 가만히 껴안으시더니 “정심아, 고맙다!”라고 하셨다. 그 느낌이 너무도 포근하고 행복해서 더 바랄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 생각해 보니, ‘아버지, 이 어깨도 좀 만져줍서!’라고 할 것을..... 싶었다. 아버지가 한 번만 만져주시면 그 고질화된 어깨통증이 사라졌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그렇게 클 수 없었다. 나에게 그 꿈 이야기를 하면서, 언니는 ‘이런 게 행복한 느낌이구나’ 싶었다면서, 또 안타까워하였다. 얼마나 수고가 많았으면, 얼마나 고마웠으면, 꿈속에조차 나와서 ‘고맙다’고 하실까. 아, 나는 그냥 아버지 얼굴을 딱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그 이상 소원은 없을텐데... 어쨌든 아버지가 꿈속에서 언니를 찾아오심은 백번 천번 지당한 일이다. 그만큼 언니는 특별한 효녀이고, 아버지 당신이 하실 일을 가만히 담당하고 있는 터다.

 

우리가 산소의 잡풀을 하나 둘 세면서 뽑고 있는 사이, 어머니는 산담에 앉아 있었다. 집에서는 언제나 조는 게 일상인데, 보아하니 따사로운 가을볕을 기분좋게 받으면서 먼 산도 쳐다보고, 바다도 바라보며, 산천경개를 즐기는 듯 하였다. 그런데 일을 다 마치고 보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왠 일이지? 기념사진을 한 장 찍어야 하는데..... 세상에! 어머니가 밀감나무 가지를 한아름 안고서 산담 밑에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어머니, 이 미깡 낭은 무사 영 꺾읍디강? 밭 주인이 알민 도둑이랜 욕할 건디..?”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어머니가 몸을 곧추세워 일으키려고 애쓰면서 큰소리를 치신다. “이까짓거는 가져도 되어. 이건 우리꺼라!”라고. 세상에!

 

어쩌면 어머니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이 구명물 밭을 개간해서 과수원을 완성할 즈음, 미국으로 이민 간 아들이 부모님을 초청하였다. 오셔서 아이들을 돌봐주시면 야간에는 신학을 공부해서 아버지가 원하는 목회자가 되어보겠다고..... 그래서 미국으로 떠나게 된 부모님은, 구명물밭을 동네분에게 급히 팔게 되었다. 마침 10월이 되어 밀감이 익어갈 즈음이었다. 마음이 아픈 어머니는 이 밭의 첫 수확을 꼭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밭을 산 사람은 ‘땅을 매입할 때는 그 땅에 소속된 농작물도 함께 소유할 권리를 취득한 것’이라며 완강하게 법을 따졌다. 보통 동네 사람들끼리 경작지를 매매할 때는 그 시점에 추수할 작물이 있을 경우, 매도인이 수확하는 게 관행이었다. 그런데 우리밭을 산 사람은 초등학교 교장님이어서 그런지 농부들의 관습을 개의치 않았다. 오직 법대로 하자는 무대뽀의 지식인을 더 이상 상대할 수가 없어서,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구명물밭을 떠났다. 그리고 이후로는 꿈에서라도 구명물 근처에는 가지를 않으셨다. 얼마나 매푸고 애삭하였으면.....

 

 

그후로 20년이 흘러 다시 온 구명물 밭. 거기에 달린 밀감 나무 한 가지쯤은 당신이 소유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어머니. “맞수다, 이거는 어머니 꺼우다. 경허난 단단히 안읍서 예. 사진을 찍엉, 이 미깡은 어머니 찍새랜 증명을 해놓게 마씸!”. 어머니는 자기편을 들어주는 딸들이 좋은 건지, 노랗게 잘 익은 밀감이 좋은 건지, 빙그레 웃으면서 사진을 찍으셨다. 아기 같은 어머니의 만족스런 웃음이 애닮기도 해서, 마음 같아서는 그 밭을 다시 사들이고 싶었다. 초등학생, 중학생이던 우리의 고사리 손으로 늦가을의 매마른 땅을 파서 감귤묘목을 심던 그때를 되돌이키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부모님이 이민을 가게 될 것도, 그렇게 심은 나무의 결실을 보지 못할 줄도 알지 못하였다. 그저 나무가 자라서 주렁주렁 황금열매를 매단 ‘대학나무’가 되면, 덕분에 고등학교, 대학교에 가는 꿈을 야무지게 심었다. 아,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들 인생의 서글픈 꿈이여!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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