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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딸 생각하는 어머니 마음 ...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정옥아, 차롱에 떡 받아 와시매 먹으라!"(차롱의 표준어는 채롱이고, 채그릇의 하나다. 싸릿개비나 버들가지 따위의 오리를 결어서 함(函)처럼 만들고 안팎에 종이를 바르기도 한다.) 

 

한밤 중에 뜬금 없이 나를 깨우시더니, 무슨 비밀이나 되는 듯이 속삭이며 하시는 말씀이다. 요즘은 어머니가 아주 오래 전 기억을 소환해 내서는, 마치 지금 막 벌어지는 일처럼 얘기하실 때가 많다.

 

치매 증세는 대부분 기억력 감퇴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발병 초기에는 건망증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 약속을 잊고 물건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수일 전 혹은 수 주일 전의 일에 대한 단기 기억력 저하가 먼저 생기고, 병이 심해지면서 장기 기억력 저하가 온다. 점차 언어능력, 방향감각 등 인지능력이 떨어지면서 심한 경우 옷을 입거나 세수하는 것을 잊어버리기까지 한다. 더욱 심해지면 가족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또한 정서 변화로 인해 불안·근심·분노 등의 감정 표현이 잦아지면서 우울증이 심해져 자살충동까지 일으키기도 한다(요양보호사 표준교재, p.188).

 

어머니가 나타내는 치매 증세도 그 선봉이 기억력 감퇴다. 사실, 기억력 저하나 감퇴는 ‘혹시 내가 치매가 아닐까?’하고 염려하는 50대 이상의 연령층이 주로 호소하는 치매(알츠하이머)의 전조증상이기도 하다. 특히 최근 사건을 잊거나 익숙했던 정보를 기억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는다. 약속을 잊는 일이 많이 생기고, 계속 같은 것을 질문하기도 한다. 병이 진행되면서 식사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계속 밥을 찾는 경우도 있다. 알츠하이머는 최근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가 손상되기 때문에 최근 사건부터 기억을 잘 못하게 되고, 병이 진행되면서 상대적으로 잘 기억하던 과거에 대한 기억도 점차 잊게 된다(실버프렌드).

 

한국치매협회 자료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치매 추정 환자 수는 27만~34만명이다. 65살 이상 노인 인구를 기준으로 2010년에는 530만명 중 약 47만명이던 것이, 2020년에 와서는 766만명 중 약 68만명으로 증가하였다.

 

최근 한림대 심리학과 강연욱 교수와 한림대 춘천성심병원이 춘천시 및 인근 농촌에 거주하는 45~89살의 남녀 709명(남 297명, 여 412명)을 대상으로 인지기능 검사와 건강 검진을 한 결과, 65살 이상 노인 510명 중 28%가 치매위험군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강교수는 ‘같은 집단을 대상으로 지난해와 올해 똑같은 인지기능 검사를 한 결과, 지난 1년 동안 정상군보다 치매위험군 노인들의 인지기능 저하가 2배 가량 빨리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노년기에 주로 발생하는 치매는 정상적으로 활동하던 사람이 뇌의 각종 질환으로 인해 지적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른바 인간의 인지기능을 포함한 대뇌기능이 감퇴하는 복합적인 임상증후군으로, 한 가지 질환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증상의 복합체다.

 

치매의 원인은 여러 가지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노인성 치매(알츠하이머병)와 혈관성 치매다. 알츠하이머병은 뇌에 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이 축적되고, 기억력과 관계 있는 아세틸콜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감소해 생기는 질환이다. 서서히 발병하기 때문에 초기에는 가족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혈관성 치매는 알츠하이머병과 달리 어느 순간 갑자기 발병한다. 동맥경화나 고혈압, 당뇨병, 심장질환, 흡연, 고지혈증 등이 있는 사람의 뇌혈관이 막히면서 뇌세포가 죽어 생기는 병이다.

 

아, 이상의 정보는 이미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가 있다. 여기까지 열심히 글자판을 두드리다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게, ‘어디서 익숙한 글인데...’ 싶은 충격. 어머니와 함께 10년을 자면서 생긴 수면부족의 치명적인 결과가 나의 기억력 약화를 낳았다는 사실도.

 

하지만, ‘차롱에 떡 받아 와시매 먹으라’는 어머니의 기억에 얽힌 이야기는 마무리를 해야 할 듯 하다. 그러니까 1960-70년대,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제사나 명절 때 동네 사람들끼리 나눠 먹는 떡이 간식거리를 대표하였다. 대체로 공동수도에서 물을 같이 길어 먹는 가구들끼리는 서로의 관혼상제를 같이 공유했었지 않았나 싶다.

 

우리 대포마을은 동서남북을 경계로 해서, 동동네 서동네 웃동네 알동네, 그리고 리사무소가 있는 마을의 중심지에 연못이 있어서 못동네라 불렀다. 참. 이 물은 공동수도의 하수나 마을의 하수관을 통해 흐르는 물들이 모여진 것으로, 마을에 불이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저마다 그릇들을 들고 나와서 물을 떠다가 화재를 진압하기도 하였다.

 

우리집은 알동네에 속했는데, 공동수도를 중심으로 열댓 가구가 마치 일가친척들처럼 옹기종기 정을 나누며 지냈다. 서답(빨래)을 하면서 보면, 서로의 입성이 비슷한 수준인지라, 세탁물의 내용도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수돗가에 만들어진 커다란 시멘트 빨래통에, 저마다 가지고 온 세탁물들을 다 넣어서 애벌 빨레를 하였다. 다만 마지막 헹굴 때만은 각자가 수돗물을 다라이(팥색 고무통)나 세숫대야에 받아서 별도로 빨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대가족처럼 입는 것도 먹는 것도, 숟가락 수도 비슷했던 것 같다. 수도세(수도요금을 세금이라 불렀음)를 받을 때는 누군가 한 사람이 전담을 해야 하는 바, 내가 그 일을 담당하였다. 대신에 우리집은 수도세가 면제되었다. 우리는 부모님과 2남 7녀, 더하여 할머니도 함께 살았으므로 동네에서 가장 큰 가족이었다. 그래서 마음씨 좋은 이웃들이 배려를 했을까? 어째튼 한 달에 한 번, 마을의 각 수도별로 수도요금 고지서가 통보되면, 내가 그 요금을 가구별 식구수대로 나누어서 요금을 책정한 후, 집집마다 방문해서 계산내역을 설명한 후 수도세를 받았다.

 

바로 이 수돗물을 같이 먹는 이들끼리는 제사나 명절 음식도 서로 나눠 먹었다. 영순이네가 제사를 가장 많이 했는데, 그럼에도 그때마다 영순이 어머니는 차롱에 각 집의 식구수를 감안해서 떡을 보내왔다. “정옥아~, 우리 집 오늘 시께라〜. 이땅 저녁에 떡 다 돼민 너네 집은 젤 하영 가져다 주마, 이!”라는 영순이. 그 자랑스럽고 씩씩하던 영순이는, 일을 잘하기로 소문나더니, 역시나 근동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강정마을 부자집으로 시집을 갔다.

 

바로 그 떡이 우리에게는 어려운 숙제였다. 어떻게 나눠야 공평할지. 아니 우선, 그 떡의 원래 상황을 부모님이 잘 보셔야, 먹은 후에 서로 인사도 하고, 우리도 떡을 해서 보답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져온 원판 그대로를,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높은 곳에 올려 놓았다. 2남 7녀중 7번째인 나는, 의자를 갖다 놓고 올라서야 겨우 손이 미치는 곳, 바로 궤짝과 이불이 쌓여서 천장과 맞닿아 있는 데였다.

 

아, 그 떡을 바라보노라면 '왜 해는 져서 이렇게 어스름이 몰려오는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이다지도 늦으실까....'하는 안타까움으로 고된 노동의 수고로움과 허기짐의 실상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드디어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소리가 ‘음메~’하고 들리면, 우리는 총알 같이 달려가서 얼룩소를 맞았다. 우리 동네서 가장 일 잘하기로 소문난 우리 얼룩이를, 동네 사람들은 ‘미국소’라 불렀다. 아버지는 얼룩이를 당신의 분신처럼, 친구처럼 아꼈다.

 

왜 우리가 그토록 당신을 반기는 지 벌써 눈치재신 아버지는, 얼른 얼룩이를 쇠막(외양간)에 묶고서 손을 씻으셨다. 그리고 궤짝 위에 놓여 있는 차롱을 내려서는, 어느새 방안 가득 둘러앉은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떡을 나눠주셨다. ‘누구 것이 큰지’를 바라보는 12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아버지의 손끝을 주시하였다.(위로 두 언니와 오빠는 이미 떡을 두고 다투는 나이를 벗어나 있었다.) 아버지는 정확하게, 그야말로 떡을 나누는 장인처럼 오차 없이 콧등하게(균등하게) 나누어 주셨다. 다행히 떡에는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없었다. 그 떡의 꿀같은 맛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집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동생 둘이 남았다. 동네에서 제사가 생기면, 옛날처럼 차롱에 맞춰서 넉넉하게 떡이 들어왔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 떡을 짊어지고 내가 사는 서귀포 큰언니 집으로 오셨다. 동생들은 그다지 떡을 좋아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는 내 방의 책상 밑에 고이 남겨두고 가셨다. 나는 떡만 있으면, 이 세상에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한 사흘 동안 그 떡을 먹으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어머니가 떡을 짊어지고서 오르셨을 상지동산, 만원 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언니집까지 걸어 왔을 낯선 길.... 아마도 한석봉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라면, 내게는 회초리를 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계신 거다. “정옥아, 차롱에 떡 받아 와시매 먹으라!”는 소리는, 그 때 말없이 두고 가신 떡 차롱을 떠올리신 게다. 아, 우리 어머니의 기억력이여! 이 딸을 생각하는 저 마음이여!

 

‘어머니, 떡 잘 먹쿠다, 예! 이번에도 이 떡 먹은 값으로 1등 먹으크매, 나 걱정은 허지 맙서! 꼭 대학에 들어가곡, 장학금도 받을 거난 마씸!’이라고 속으로 되뇌어본다. 아, 어머니처럼 나도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행히 세월은 흘렀지만, 여전히 떡을 좋아하는 나. 내일은 오일장에 가서 떡을 사다가, 그 때 그 시절처럼 냠냠 거리며,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지 싶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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