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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어머니의 장수비결: 어째서 100살까지 살아지게 되었을까? (1)

가끔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하는 소리가 있다. “나, 어떵허난 백살꼬지 살아점신고, 이?” 곰곰이 어머니의 일생을 헤아려 보니, ‘쉬지 않고 일을 해서, 죽음의 위기를 넘겨서, 오래 사시라는 주위의 돌봄이 있어서’로 요약된다.

 

요즘들어 어머니가 기운이 통 없으시다. 이 여름을 무사히 지나실 수 있을까.... “나, 이젠 다 살아진 모양이여”라며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시는 어머니. 눈가에 촉촉이 물기가 배어 있다. ‘눈이 정신’이라는데, 어머니의 눈동자가 많이 흐려지셨다. 안개가 자욱한 시선에는 ‘나 좀 살려 달라’는 간절함이 서려 있다. 이제는 기력이 다하신 게다. 100살이 아니신가.

 

하지만 ‘대포 부택이 어멍은 102살이라도 정정허게 돌아다념잰 호여라만은...’이라며 말끝을 흐리시는 어머니. 마저 끝마치지 못하고 흐려지는 말의 여운에는 더 오래 사시고 싶으신 갈망이 담겨 있다. 그래, 우리 어머니, 더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시어머니와 시할머니, 두 분 시어른을 지성껏 봉양하고 임종을 지켰으니, 하늘의 이치대로라면 장수의 복을 받으실 게 분명하다.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애굽기 20장 12절)’는 명령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에베소거 6장 2∼3절)’는 약속이 있다. 요컨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려서 ‘베스트셀러 1위’를 자랑하는 성경은, 효도가 ‘장수와 성공의 열쇠’임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사실 어머니는 몹시 치매가 심해서 금방 식사를 하고도, ‘못된 며느리가 밥을 주지 않아서 배가 고파 죽겠다’는 시어머니를 여러 해 동안 모셨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시어머니의 이부자리를 짊어지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의 새벽바다로 나가서 솟아나는 용천수에다 오물을 빨아내야 하였다.

 

얼어붙는 손보다 시어머니의 치매가 서러워서 얼마나 가슴을 쳤는지... 자신의 대변으로 벽지에 색칠을 하고, 더러는 창틀에 발라놓고, 나머지는 밥그릇에 담아서 두껑을 덮어 놓는 난리를 묵묵히 감당하셨다.

 

그러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칭원헌 어멍’이라면서 경관 좋은 밭의 양지바른 자리에 곱게 봉분을 올렸다. 할아버지가 조강지처를 놔두고 둘째 부인을 얻어와서는 ‘호적을 파달라’고 땡깡을 부리는 구박과 수모를 가하는데..., 어느 여자가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낼 수 있었겠냐’며..., 가슴아프게 우셨다.

 

그 때는 왜 그리도 무지몽매하게 살았을까? 한 동네에서 둘째 부인을 두고서 이중 살림을 하는 아버지들이 드물지 않았으니 말이다. 자식들도 ‘큰 어멍, 샛어멍’이라 부르면서 함께 어우러져 지내는 게 지역의 풍습처럼 간주되었으니... 여다의 섬이라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삶의 또 다른 양식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시어머니 돌봄이 끝나자, 93세 시할머니가 어머니의 발 밑으로 들어와 누웠다. 셋이나 되는 며느리들을 차치하고 장손의 집으로 들어와 손자 며느리인 어머니에게 여생을 의탁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을 유난히 귀애해주신 ‘하르방의 부인’이라면서 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12식구가 17평 초가의 방 네칸에 분산되어 마치 벌집을 드나드는 것처럼 복작대며 살았다. 증조할머니는 워낙 몸집이 작고 조용해서 집안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하였다. 식구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으려고 존재감을 최소화했던 것일까? 하지만 밭에서는 고구마를 파거나 김을 매는 일에 한 사람의 몫을 너끈히 감당하셨다.

 

어쩌면 할머니는 삶의 짐이 가장 버거워 보이는 어머니를 은연중 돕고 싶으셨는지도... 어머니는 그런 시할머니의 마음을 아시는 듯, 밭 농사에 물질까지 하면서 2남7녀를 묵묵히 키워냈다. 이쯤 되면, 우리 어머니 김성춘 여사님은 효도에 근거한 장수의 권리를 차고 또 넘치게 누릴 입장이 아니신가.

 

하지만, 정작 어머니의 장수비결은 동네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로 억척스럽게 일하는 데서 나온 것임을 확신한다. 이웃집 옥자 어멍은 우리집 담벼락에 기대어서 이따금 큰 소리로 경고를 날렸다. “정열이 어멍아, 몸 좀 아끼라 이! 그추룩 밤낮으로 몸을 굴리당은... 예순만 되어 보라. 틀림어시 앉은뱅이 되어불거여.....”라고. 사실, 나는 일곱 살 즈음까지 어른들은 잠을 자지 않는 줄 알았다.

 

아침에 눈을 떠도 부모님이 계시지 않고, 저녁에 잘 때에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하기야 우리 부모님만 그리 하셨을까? 제주도 속담에 ‘눵 먹을 팔저도 오몽해사 헌다(누워서 먹을 팔자라도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다른 집들도 사정은 비슷하였을 게다. ‘실퍼도 오몽해사주’, ‘죽을 때꼬진 오몽해사주게’, ‘앉앙 살 팔저라?’ 하는 말들을 동네 어머니들 입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었으니까.

 

특히 계집아이들에겐 “빌락빌락 가달춤 그만 해영, 제게 밭으로 왕 검질 매사주!”라면서, 고무줄 놀이에 빠져 있는 우리들에게 존재 이유를 일깨우셨다. 왜 제주도에선 김을 매거나 고구마를 파는 등 땅에 구속되는 밭일은 여자애들 몫이고, 마소를 돌보거나 지내를 잡는 자유스런 일들은 남자애들 차지였을까.

 

더욱이 우리 어머니의 가훈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거였다. 이 가혹한 말씀이 온 집안에 실행되려면, 어머니가 우선 모범을 보여야 하였으리라. 어머니는 그야말로 밤낮으로, 사시사철, 장소불문하고 소처럼 일하셨다.

 

마치 ‘쇠로도 못 나난 제주여자로 나신예(소로도 못 내어나서 제주여자로 났단다)’라는 제주속담의 전형이나 되는 듯이. 달 빛에 빼때기(고무마를 썰어 말린 것)를 줍는 일은 약과였다. 겨우내 소와 말에게 먹일 촐(꼴)을 배기 위해 중산간 마을목장에 올라가면, 오가는 시간이 아깝다고 아예 이틀 동안 들판에서 노숙을 하였다.

 

일을 마치고서 구루마가 미어지게 촐을 싣고 내려오는 부모님의 모습이 얼마나 전사처럼 자랑스럽던지... 게다가 어머니는 동네 해녀분들과 겨울바다에 뛰어들어 온 몸이 얼어붙게 헛물질을 하고서도 밤에는 밤바르(겨울 밤에 썰물이 진 바다로 나가 횃불을 켜서 해삼, 소라, 문어 등을 잡는 일: 겨울에는 물때가 되면 밤에 바다 한 쪽이 다 마를 정도로 썰물이 잘 일지만, 무섭고 추운 밤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았음.)를 해내는 억척을 부리셨다.

 

고사리 철이 되면 새벽 어스름에 한라산으로 올라가서 당신만이 아는 고사리밭과 곧자왈의 비밀 루트를 따라 두어 푸대가 넘는 고사를 캐셨다. 저녁 어스름이 밀려들 때쯤에야 무거운 고사리를 1100도로 버스에 싣고서 중문의 신작로까지 내려오셨다.

 

어머니를 마중나간 아버지가 미안스러울 정도로 어쩌면 전사처럼, 용사처럼, 아니 암소처럼 여전히 기운참을 잃지 않는 어머니....대포 1등 일부자였던 우리 어머니의 일에 관한 무용담이야 밤을 새워 자랑해도 모자라지 않을 터.., 이 자리에서 무엇을 더 이상 열거할까.

 

하지만 이러한 제주여인들의 억척스러움이, 어디 우리 어머니 뿐이었으랴. 김종두 시인의 시집, ‘사는 게 뭣 산디’에 등장하는 제주여인들의 삶을 보면, 그때는 다 그리하였다. 돌과 바람의 섬에서 자식들을 먹여살리려면, 어머니들이 돌처럼 바람처럼 살아내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제주섬의 척박한 땅, 매서운 바람, 황량한 바다와 마주하여 샅바를 거머쥔 씨름선수처럼 맞붙어서 극복하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었을 터. 그러기에 나 또한 이렇게 어머니의 에피소드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지 않은가.

 

「 제주여인 1

시집 왕 보난 ᄃᆞᆯ렝이 ᄒᆞ나, 살아 갈 일 생각 ᄒᆞ난 귀눈이 왁왁ᄒᆞ여도,

우리 할망 살아 온 시상 ᄀᆞ슴에 세기멍 살았수게

 

ᄌᆞ냥ᄒᆞ여사 밥 먹은다, ᄒᆞ다 멩심ᄒᆞ영

이실 때 애끼곡 젭저 놨당 어신 듯 ᄌᆞᆫ디멍 살라.

 

올레 밖까지 좇아 오멍 ᄀᆞ라주던

우리 어멍의 ᄒᆞᆫ 시상.

 

아명ᄒᆞ믄 못나느냐, ᄌᆞ름 붙이지 마랑

탕근도 ᄌᆞᆯ곡 물질도 ᄒᆞ멍 시집어른 뜻받앙 살아미믄 살아진다.

 

아∼ 탐라 할망들의 삶이여, 제주여인의 삶이여.」

 

제주여인으로 100년을 살아오신 어머니. 요양원의 주간보호에 다녀오시던 차, 대문으로 들어서다 장맛비로 무성해진 잡초를 보셨다. “아니, 이것들이!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지멋대로들 난장판이구만...’ 그냥 윗도리를 벗어던지고, 마당에 주저앉아 녀석들을 뽑아내신다. 고추와 가지들이 잡초로부터의 압박과 설움에서 벗어나 시원하게 다리 뻗고 기지개를 켠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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