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직장의 임기를 마칠 즈음,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머리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호랑이 장가가는 날에 햇빛 사이로 비가 쏟아지면, 집에 두고 온 우산을 잠깐 잠깐 떠올리는 것처럼. 그런데 같은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는 이성이, 가슴을 스칠 때는 감성이 움직였다. 올해로 103세를 사시는 김형석 교수님께서 ‘백년을 살아보니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까지’라고 하신 점에 비추어 보면, 실제로 나는 매우 심각하게 이성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지점에 있었다. 그런데 정작은 심도있게 생각하고 다양하게 살펴봐야 할 인생 3모작의 과제를, 마치 말을 타고 달리면서 먼 산을 바라보는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대응하고 말았으니...., 왜 그랬을까? 사실, 나는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가슴으로 결정해 두었던 답이, 현실적으로는 이성적인 판단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그 답을 묵살하고 넘어간 듯 하다. 제 3자적 입장에서 나의 형편과 처지를 바라보면, 좌고우면 할 필요도 없이, ‘바보야, 직장이 우선이야!’가 답이 되어야 할 터다. 하지만 내 가슴은 ‘아니야, 새해가 되면 백세가 되시는 어
100년 만에 가장 크고 둥근 보름달이 뜬다는 추석. 정작 제주도에서는 구름 때문에 달을 보기가 어려웠다 한다. 나 또한 마음으로는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달이건만, 어머니를 보러 온 형제들을 치르느라 그만 하늘을 잊어먹고 말았다. 어쩌면 달에 대한 나의 마음이 진정으로 간절했다기보다는 지치고 고단한 심신이 막연하게 달이 뜬 밤하늘, 그 정겨움과 한가함을 동경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보름달을 놓치고 보니,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이, 휴식도 명절도 아니게 어정쩡하니 되어버렸다. 하지만 추석날 형제들이 해 온 음식으로 아침을 먹으며, 나와 어머니는 ‘매일이 추석이면 좋겠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마주보며 서로에게 환한 웃음을 안겨주었다. 나는 그 느낌이 너무 소중해서 어머니를 꼬옥 안아드렸다. 나야 아침 상차리기가 거저먹기라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겠지만, 어머니는 왜 저리도 눈부시게 웃으실까? 나에게 보내는 마지막 추석의 못 다한 선물일까.... 이런 시간이 내년에도 다시 올까.... 이 시간, 어머니는 대문 앞에 앉아서 졸고 계신다. 어쩌면 섶섬이 보이는 바닷가에 앉았으니, 파도가 들려주는 바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리라. 오늘부터 어머니는 요양원
노인들은 여름에 많이 돌아가시는 듯 하다. 어제는 고향마을에서 어머니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교회 권사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93세의 권사님은 기력이 다하신 듯, 사진 속에서도 더 바랄 게 없으신 표정으로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계신다. 상사(祥事)이신 듯, 상복을 입은 자손들의 표정 또한 평안해 보인다.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장례를 ‘상사’라 하는데, 보통 별 다른 지병 없이 평균수명 이상 장수하다가 잠 자듯이 죽은 경우에 쓰는 용어다. 장수의 기준은 별도로 없지만, 요즘은 80~90대 이상을 살다가 자연사했다면 호상으로 보는 편이다. 통계청의 생명표에 의하면, 2020년 현재, 우리나라 노인들의 평균 기대수명은 남자가 80.5, 여자가 86.5이다. 하지만 장례식장이 너무 슬픔에 차 있는 것을 원치 않아서 고인이 생전에 '내가 지금 죽어도 호상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거나, 유족이 '그래도 괴롭지 않게 평안히 돌아가셨으니 호상이다'라고 당사자들이 말하지 않는 한, 조문객 쪽에서 먼저 ‘호상’이라 하기에는 매우 조심스러운 말이다. 아무리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더라도 진심으로 조의를 표하고 표현되지 않는 슬픔을 공감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내가 얼마 안 남았다. 올해 들어 어머니가 자주 내뱉으시는 혼잣말이다. 하기야 100세의 육신, 그 무거운 장막을 지고 사시니..., 얼마나 힘이 드실까. 걷는 것, 아니 움직임 자체가 고역이지 않겠는가. 더욱이 ‘홀로 나이가 가장 많다’는 사실은 참으로 쓸쓸하고 외로울 것이다. 고향마을 대포(큰개)에 조카 제이가 있을 때는, ‘대포’라는 소리만 나와도 어머니의 얼굴에 햇살같은 웃음꽃이 번졌다. 가끔은 제이가 참기름이나 소라꼬지, 자리젖 같은 것을 가지고 어머니를 찾아 왔는데,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외치는 첫 마디가 언제나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고모님, 그동안 잘 이십디강? 대포 부택이 어멍은 백두살이라도 온 동네 돌아댕기멍 정광허게 살암수다. 경 허난, 고모님도 꼭 백두살꼬지만 아프지 말곡, 효도 받으멍, 재미나게 사십서, 예!”라고. 조카의 말이 사실대로인지, 그냥 고모가 들으라고 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의 응답이 메아리쳐 울린다. “니가 이추룩 놀래만 와준댄 허민, 무사 백 두살꼬지만 사느니? 백 세살꼬지라도 오래오래 살아사주!” 바로 이 때부터 어머니의 목소리에 활기가 스며들고, 얼굴에도 천진스런 웃음기가 번지기 시작한다.
부모를 간병하는 일은 ‘우리들 대부분이 건너야 할 어둠의 긴 터널’이다. 게다가 때로는 10년 이상 이어질 수도 있으므로 혼자서 그 짐을 짊어지려고 해서는 안된다. 가급적 다른 가족들의 관심과 도움을 최대한 이끌어 내서 독박돌봄의 무거운 짐을 나눠 져야 한다. 더불어 주간보호, 방문요양, 요양병원, 요양원, 간병인 등 가능한 사회적 지원도 모두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간병은 무겁고 힘겨운 여정이다. 오죽하면 노인의 경우는 ‘죽어야 끝나는 전쟁’이라고 하겠는가. 어머니를 모셔온 지 20년이다. 아니, 처음 10년은 어머니가 우리를 돌봐주셨다. ‘아이들을 돌봐주면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아들을 위해, 나이 65세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신 지 17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나를 붙좇아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당시 81세의 어머니가 지금은 100세가 되셨다.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보통 자식의 의무로 이해되지만, 나의 경우는 어머니의 권리라 해야 맞다. 어머니는 일찌감치 10년 동안 나로부터 ‘돌봄 받을 권리’를 저금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늘 ‘고맙다, 미안하다’를 입에 달고 사신다. 96세에 대퇴부골절로 인공관절 수술을 받으
치매는 알기 쉽게 표현해서, 정신이 나가는 병이다. 영어로는 디멘시아(dementia)라 한다. 라틴어 de(~로부터 나간)+mens(정신)+ia(상태)의 합성어다. 다소 점잖게 표현하자면 ‘정신이 없어진 상태’라고나 할까. 신이 내린 가장 가혹한 형벌이 ‘기억의 유실’이라는 말 그대로, 정신이 나가면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우선 자신의 인생 목적을 알지 못하므로 잠시도 인생길을 제대로 운전할 수가 없어진다. 삶에 대한 결정권도 없으므로 주변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의 삶도 피폐하게 만든다. 결국은 집을 떠나 요양원으로 보내지고 만다. 요양원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요, 인생행로의 종착지가 된다. 우리나라가 고령 사회로 접어들면서 치매환자 또한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평가원이 실시한 치매극복 연구개발사업(2019)에 의하면 국민은 치매를 가장 우선적으로 극복해야 할 질병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인구고령화에 따른 치매환자 및 사회적 비용 급증으로 국가 재정부담 또한 심화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치매를 의료비 지출(34.3%), 환자·가족의 고통(54.8%), 발병원인과 치료
가끔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하는 소리가 있다. “나, 어떵허난 백살꼬지 살아점신고, 이?” 곰곰이 어머니의 일생을 헤아려 보니, ‘쉬지 않고 일을 해서, 죽음의 위기를 넘겨서, 오래 사시라는 주위의 돌봄이 있어서’로 요약된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데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길까? 아마도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고려한다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헤아려보면, 어머니에게도 수많은 죽음의 위기들이 있었다. 17세부터 육지로 원정물질을 다니면서 60이 넘도록 해녀를 하였으니, 더 말하여 무엇하랴. 내 고향 대포마을에서도 물질을 하던 중 익사한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어머니의 조카인 종택이 어멍은 물질하던 중 숨이 다해서 물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제이는 물질을 마치고 나오다가 성창에서 발이 미끄러져 익사하였다. 그리고 달문이 삼춘은 ‘물 소굽에서 밥을 해영 먹어사 나오주’라는 소리를 듣는 대상군이었지만, 어느날 물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지금 살고 있는 보목마을도 마찬가지다. 섶섬 앞에서 물질하던 해녀가 지나가던 배의 스쿠루에 걸려서 죽는 사고가 있었고, 태왁만 남긴 채 사라진 해녀가 거센 조류를 따라 지귀도에서 발견되
가끔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하는 소리가 있다. “나, 어떵허난 백살꼬지 살아점신고, 이?” 곰곰이 어머니의 일생을 헤아려 보니, ‘쉬지 않고 일을 해서, 죽음의 위기를 넘겨서, 오래 사시라는 주위의 돌봄이 있어서’로 요약된다. 요즘들어 어머니가 기운이 통 없으시다. 이 여름을 무사히 지나실 수 있을까.... “나, 이젠 다 살아진 모양이여”라며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시는 어머니. 눈가에 촉촉이 물기가 배어 있다. ‘눈이 정신’이라는데, 어머니의 눈동자가 많이 흐려지셨다. 안개가 자욱한 시선에는 ‘나 좀 살려 달라’는 간절함이 서려 있다. 이제는 기력이 다하신 게다. 100살이 아니신가. 하지만 ‘대포 부택이 어멍은 102살이라도 정정허게 돌아다념잰 호여라만은...’이라며 말끝을 흐리시는 어머니. 마저 끝마치지 못하고 흐려지는 말의 여운에는 더 오래 사시고 싶으신 갈망이 담겨 있다. 그래, 우리 어머니, 더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시어머니와 시할머니, 두 분 시어른을 지성껏 봉양하고 임종을 지켰으니, 하늘의 이치대로라면 장수의 복을 받으실 게 분명하다.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애굽기 2
백 세 어머니는 한 살 아이와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기저귀를 간다. 그저 차이가 있다면, 늘상 하는 일임에도 항상 불편하신 거다. ‘네가 며느리가 아니고 딸이라서, 나는 참 복이 많다’는 말 속에 그러한 속내가 담겼다. 이어서 옷을 갈아입힌다. 그냥 두면 바지도 몇 개씩 껴입고, 양말도 보이는 대로 다 신고 만다. 다섯 켤레를 신고서 하루를 보내신 적도 있다. 윗옷은 아무리 입어도 모자랄 정도로 보이는 족족 걸치신다. 어떻게 그러고도 걸음을 걸을 수 있을까 싶은데..., 추운 것보다는 무거운 게 나으신가 보다. 노상 추위를 호소하는 어머니는, 손도 발도 만져보면 생각보다 서늘하다. 오늘 아침에도 식사를 마치고 요양원 봉고차를 기다리는 사이, 어머니의 두 손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이 손으로 밭일, 논일, 바당일에 한라산 고사리까지 꺾으면서 우리 2남7녀 9남매를 키워주셨구나. “어머니, 오늘도 차 조심허곡, 멩심해영 잘 다녀옵서예. 어머니가 오래 오래 살아사, 우리 모두 기십나곡, 손지들도 훌륭헌 사람들이 될 거우다 예!”라고 언제나 같은 소리로 장수의 사명감을 당부하는 나. “아고 니 손은 무사 영 또똣허니게. 고맙다 이! 고맙다.”라
어린 시절에, 말하자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나는 부모님과 한방에서 지냈다. 2남7녀 중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떠난 두 언니를 그리워할 여유도 없이, 우리 7명은 17평짜리 초가에서 영토전쟁을 벌였다. ‘한라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모처럼 큰집을 지었다’는 큰언니의 건축소감이 무색하도록, 집은 비좁고 복잡하였다. 부엌과 연결된 안방과 마루를 사이에 두고 남향의 사랑방은 장남 차지가 되었다. 오빠는 마을에서 보기 드문 대학생이었다. 나머지 두 개 방 중 하나는 증조할머니 차지였다. 93세 할머니는 몸이 어린아이처럼 작았다. 우리 중에서 비교적 무게감이 컸던 셋째 딸이 자원하여 할머니의 룸메이트가 되었다. 나머지, 부엌과 인접하여 자질구레한 생활도구들이 미리 진을 치고 있던 방으로 넷째와 다섯째 딸이 들어갔다. 그리고 나와 동생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안방에 체류하게 되었다. 갓난아기인 막내아들을 포함해 다섯 명이, 밤이면 또 다른 가족이 되어서 한 덩어리를 이루었다. 나는 주로 어머니 발밑으로 들어가, 한 발을 인형처럼 붙들고서 꿈나라 여행을 하였다. 40대 중반의 어머니에게서는 달작지근한 살 냄새와 땀이 밴 열기가 느껴졌다. 어머니 냄새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어린애가 된다’는 옛말이 있다. 이 점에 대해 전문가들 또한 ‘삶의 여정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유아는 삶의 끝자락으로 여행 중인 노인과 육체적·정신적으로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식사·취침·목욕·용변 등 일상생활에서 보호자의 돌봄이 필요다. 백 세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나로서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어느 날 한밤중에 어머니께서 베개를 안고 우리 방으로 오셨다. ‘무서워서 도무지 혼자 잘 수가 없다’시면서. 그 모습이 꼭 ‘엄마와 함께 자겠다’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92세쯤 되셨을까? 그즈음에 어머니는 부엌의 가스 불을 끄지 않아 냄비를 태우거나 ‘이러다가 집을 태울 수도 있겠다’ 싶은 상황을 드문드문 만드셨다. 화재보험에 가입하고, 수시로 부엌을 점검하다가, 결국은 취사도구를 정리했다. 우리와 함께 사신지 10년만의 일이다. 81세에 17년간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오신 어머니는, 혼자서 부엌을 쓰고 싶어 하셨다. 당신이 좋아하는 자리젓, 마농지, 비린내가 많이 나는 생선조림, 옛날 냄새가 진동하는 재래식 된장국 등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드시면서 여생을 제주도 식으로 보내보리라’는 뜻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속담 중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격언이 있다. 아이를 낳고 키워본 사람이라면 가슴 뭉클하게 의미가 느껴지는 말이다. 아이를 안고 마실을 나갔을 때, 백일과 돌잔치와 명절에, 그리고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지나면서 저절로 맞닥뜨리게 되는 일이 아닌가. 아이가 어엿하게 자라서 동네를 떠날 때까지 이웃들의 따뜻한 시선은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된다. 사려 깊은 언어와 다정스런 미소 없이 어떻게 한 생명을 무사하게 키워낼 수 있었으랴.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구십을 넘기면서부터는 온 동네가 이웃이자 친척이 되어 주었다. 특히 대소사를 맞은 동창생들의 한결같은 ‘어머니 사랑’은 누가 딸인지 헷갈릴 정도다. 경조사의 분주한 상황 속에서도 어머니가 드실 음식을 바지런히 챙기는 손길들. 특히 어머니가 좋아하는 돼지고기는 ‘정옥이 어머니 반(몫)’이라면서, 저마다 자기들의 쟁반을 비워줄 태세다. 어디 고기뿐이랴. 떡과 찬을 곁들여서 불룩해진 어머니의 검은 봉지는, 그야말로 사나흘은 족히 먹을 식량으로 거듭난다. 십시일반이 이런 기분일까? 친구들이 벌이는 한바탕 소동은 마트에서 사온 고기와 다른 맛의 감동을 선사한다. “게무로사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