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어머니의 식사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 입에 잔뜩 밥을 물고도 숟갈을 들어서 다시 집어넣으려 하신다. 허겁지겁 서두르는 모양새가 몹시도 배고픈 아이를 연상케 한다. 식탐이 느신 게다. “어머니 밥을 이추룩 잘 드시민, 앞으로도 오래오래 살아지쿠다, 예?”라고 추켜세워드리면, “게메게(그러게 말이다). 돌아오멍 살아짐직 허다 이!”라며 빙그레 웃으신다. 만족스러운 표정이 천상 어린애를 닮았다.
그러고는 정색하고서 뱉으시는 말씀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조반 잘 먹어사 호루 종일 일해여!”. 아, 어머니는 103세의 아침에도 밭에 가서 할 일을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인가 보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놈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라는 조선시대 남구만의 시조가 상기되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치매증세가 그전보다 나아진 건 아니다. “정옥아 이리 와보라. 괴기가 딱 붙언 아니 떨어졈저게!” 무슨 일인가 해서 달려가 보면, 스웨터의 단추를 붙잡고 쩔쩔매고 계신다. 아, 어머니 눈에 드디어 헛것이 보이기 시작한 게다.
어쩌면 바다에서 물질을 할 때 소살로 생선을 쏘아 망실이에 집어넣었는데, 그 녀석이 발버둥을 치면서 빠져나오려고 난리를 치는 건가? 어머니가 일생을 통해서 가장 비중 있게 하신 일이 물질이고 보면, 헛것을 보는 망상 증세의 첫 번째는 그 시절에 겪었던 일들이 우선 아닐까. 40년을 바다에서 사셨으니, 물질을 하던 중에서 뛸 듯이 기뻤거나 소름 돋게 무서웠거나 숨이 막히게 힘들었던 일들이 현실로 재구성될 법도 하지 싶다.
때로는 인기척이 나서 방문을 열어보면, 옷을 다 벗고 계셔서 가슴을 덜컥하게 할 때도 있다. 치매하는 시어머니가 밤 중에 옷을 다 벗고 나가서 남의 집 마당에 벌거숭이로 앉아 있으면, 누가 볼 새라 덥석 안아 업고서는 불쌍하고 서러워서 하염없이 터벅대던 눈물 어린 발걸음. 한겨울에 보리 검질(김)을 매고서 집으로 돌아온 저녁, 대변을 손으로 묻혀서 방바닥과 벽에다 온통 칠갑을 해놓은 할머니의 옷을 벗기고, 이불을 짊어지고서 바다로 나가 용천수에다 담가놓고 막개(빨래방망이)로 하염없이 두드리던 어머니의 언 손. 하루에 서너 끼니를 드시면서도, ‘메누리가 밥을 안 주난 배 고팡(고파서) 죽어지키여’라며 억지를 부리는 시어머니가 불쌍해서 그저 눈물로 삼키던 어머니의 한숨.
요즘은 밤중에 일어나서 거실로 나와 배회하거나(밖으로 나가려고 현관문을 찾는 모양이다), ‘나 살려줍서’라는 소리를 기도하듯 반복하거나,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거나, 큰일이 난 것처럼 소리치는 경우도 늘었다. 때로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이불을 얌전하게 개켜놓고 끄덕끄덕 졸기도 하시는데, 새벽마다 그 시간이면 교회로 가시던 어머니의 기도가 생각나서 가슴이 저려온다.
어제는 언니가 간식으로 해 온 ‘번데기 마늘 구이’를 허겁지겁 드시다가 목구멍에 걸리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법석을 벌였다. 나 또한 생전 처음 어머니가 입에 넣어주시는 번데기를 씹으면서 생각보다 끔찍하지 않음에 놀랐다. 어머니가 부업으로 누에를 쳐서 미녕(무명)을 잣던 시절, 그 꾸물대는 벌레들이 징그러워서 번데기는 쳐다보기조차 싫었는데.... 나이가 들면 웬만한 일에는 초연해지는 건가? 올해부터 UN이 규정한 ‘65세 노인’의 범주에 들고 보니, 벌레도 씹을 수 있는 체념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음에 놀란다.
어머니의 치매증세가 날마다 다양하고 깊어지는데, 요약하면 과도한 수면(보통 저녁 9시쯤 잠자리에 드시고 아침 8∼9시에는 일어나시는데, 오후 2시나 저녁 6시경에 일어난 때도 있다.), 기억력(특히 단기기억)·언어능력(특히 타인의 이야기에 대한 이해 능력)·지남력(시간개념: 날짜·요일·시간·시공간 파악능력-집 밖의 다니던 길은 물론 집안에서 안방·화장실 구분이 어려움), 옷매무새 실행(옷을 몇 겹이고 있는 대로 껴입는 데다가 잠바 위에 내복을 입는 등 용도 구분이 어려움), 망상·환청·환시(누군가 자신의 것을 훔쳐 갔다는 생각, 방안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지 손짓하며 중얼거림), 불안·공포(나 살려달라는 소리를 지르거나, 저거 좇아 달라고 요구함) 등에서 일상생활이 어렵거나 불편이 깊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어머니의 요양보호 재심 청구는 두 번에 걸쳐서 기각되었다. 장기요양에 대한 등급판정은 1∼5등급에서 인지지원 등급으로 구성되는데, 어머니는 2021년 10월에 3등급으로 판정되어, 연중(365일) 하루 90분씩 가족요양보호를 인정받았다. 참고로 3등급은 ‘심신의 기능상태 장애로 일상생활에서 부분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자’로 정의되며, 장기요양인정점수가 51점 이상 60점 미만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평가되는 일상생활 수행동작(ADL: Activities of Daily Living)이란 옷 벗고 입기·세수하기·양치질하기·목욕하기·식사하기·체위변경하기·일어나 앉기·옮겨 앉기·방밖으로 나오기·화장실 사용하기·대변 소변 조절하기 등이다. 어머니의 경우는 일어나 앉기, 옮겨 앉기, 방 밖으로 나오기 등이 스스로 가능한 형편이고, 그 외에는 어머니가 움직이고 행동하는 데 따라서 마치 일심동체처럼 내가 동시에 움직이며 보조해야 하는 형편이다. 하루 종일 2인3각(二人三脚) 경기를 하는 셈이다.
그런데 99세에 판정된 후 3년이 지나서 102세가 되었는데, 오히려 등급이 나빠진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돌봄에 필요한 시간이 ‘하루 90분 한 달 전일(365일)’에서 ‘하루 60분, 한 달 20일’로 감소하다니 말이다.
우리의 일상을 요약해서 짚어보면, 아침에 어머니 방에서 이동 변기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내가 얼른 달려가서 대소변을 돕고, 기저귀를 갈고, 옷을 갈아입힌다. 일어나서 식사를 하시겠다면, 거실로 모시고 나와서 어머니 자리(창밖이 보이는 등받이 의자)에 앉혀드린다. 십여 분쯤 지나 식사를 하실 수 있다면, 식탁으로 모시고 와서 식사를 시작한다. 밥과 국, 반찬을 일일이 떠먹임에도 불구하고, 식사가 끝나면 식탁 밑에 수북하게 잔반이 떨어져 있다. 양치질하고 약을 먹여드리고, 세수를 하고. 이러한 활동이 하루 세 번뿐이랴. 간식도 먹이고, 해가 나면 마당으로 나가 걷기도 하고, 가능하면 대문 밖으로 나가서 바다 풍경과 올레길 경치도 같이 바라본다. 함께하는 이 삶이 때로는 행복하고 가치 있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나의 마음과 몸은 매우 고단하고 무력하고 쇄약해져 있다.
간혹 그렇게 힘들면 왜 요양원에 보내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약속 때문이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신 후 17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 둘이서 함께 손가락을 걸고 맹세한 약속이, ‘요양원에는 절대로 보내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미국 생활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게, ‘노인 아파트에 같이 사시던 노인이 아파서 병원에 간다더니, 이어서 요양원으로 가셨다는 소식이 날아들고, 얼마 있다가 장례식의 부고장이 날아드는 것’이었다. 아, 어머니는 미국의 장례 방식(땅을 아주 깊게 파서 관을 내려놓은 후 흙을 덮고 그 위에 묘비를 세우는데, 우리나라 무덤처럼 솟아오른 봉분이 없어서, 그야말로 공원묘지가 소풍을 할 만한 공원처럼 그지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그렇게 무섭고 끔찍하더란다.
‘아버지 시신을 골충(계곡처럼 깊은 곳)에 던져버렸다’라는 게 어머니의 기억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에게 요양원이란 그 골충으로 가는 전 단계에 해당하는, 말하자면 죽음의 대기소에 불과한 것이리라(혹시나 미국의 장례에 대해 오해하지는 마시라. 이 부분은 단지 어머니의 사적인 경험에 해당하는 것이다).
2024년 10월에 결정된 장기요양등급 판정 결과에 대해 한 번의 기각 결정이 이루어졌다. 처분요지는 ‘의사소견서에 치매 상병이 있으나 장기요양인정조사표 행동변화영역 중 산정기준에서 인정되는 항목에 '증상없음'으로 조사되었다’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1) 사람들이 무엇을 훔쳤다고 믿거나 자기를 해하려 한다고 잘못 믿고 있다, 2) 화를 내며 폭언이나 폭행을 하는 등 위협적인 행동을 보인다, 3) 물건을 망가트리거나 부순다, 4) 공공장소에서 부적절한 성적 행동을 한다 등의 증상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따금 사위가 물건을 훔쳐 갔다고 믿고 소리 지르는 행위가 있다지만 방문 당시에 해당 행동 증상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게 결정적인 부결 사유다.
이제 곧 명절이다. 어머니는 슬하에 80여 명이 넘는 자손을 두셨다. 미국에 있는 20여 명을 제외해도 60명이 넘는 대가족이다. 문득 어머니의 장기요양 등급 판정을 두고 재심청구를 하면서 국가와 다투는 내 모양이 ‘이게 뭐지?’ 싶어진다. 어머니의 삶에 대한 책임을 나는 지금 누구에게 미루고 있는가? 천국에 계신 아버지가 나의 이 행위를 아니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시면 무어라고 하실까?
이쯤에서 김종두 시인의 ‘사는 게 뭣산디 1’을 펼쳐서 다시금 읽어본다. ‘사름 사는 일은 험한 산을 오르는 거여. 이녁만씩 인생의 탑을 쌓아 가는 거여. (중략) 산을 오르면 이내 해는 져불곡, 탑을 쌓고 나면 우리의 육신은 깃털이 되고 말주만, 버친 삶 짊어졍 살아 온 똠과 눈물, 이게 우리가 살아온 보람이여, 이게 사름 사는 거여.
아, 내 삶이 치매 어머니와 더불어 살아온 지난 3년의 시간이, 이제는 지치고 고단하고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다고 징징대지 말자. 명절이 되면 채 백일도 지나지 않은 물애기를 안고 올 가슴 부푼 손자의 등장, 이제 갓 돌이 지난 아기들이 기어다니며 웃음꽃을 피워낼 안방의 풍경, ‘왕할머니께 새배드리라’면 엎어져서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세울 증손들의 성장, 세뱃돈을 받느라 주느라 여념이 없을 가족애의 향연, 할머니의 103세 명절이 내년에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기도. 이 모든 사랑과 기쁨보다 더 귀한 것들이 나의 삶 어디에 숨어 있을 것인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