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년을 넘게 살아낸 후에는 다시 어린아이로 태어나는 걸까. 마치 한 살 아이처럼 하루 종일을 끄덕끄덕 조시는 어머니가, 잠꼬대를 하신다. “장로님, 날 찾아줍서! 나 손 잡아 줍서...”. 아버지께서 대포교회의 장로가 되신 후로, 어머니는 늘 아버지를 ‘우리 장로님’이라고 불렀다. 아, 어머니가 몹시도 외로우시구나. 가슴이 저리도록 그리우신 게다. “어머니, 아버지는 천국에서 하루 종일 어머니를 지켜봠수게. 아버지가 어떻게 어머니를 한순간이라도 잊으시쿠과? 보지 않고 어떵 살 수 이시카, 예?”
그럴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동서녘으로 이웃해서 사셨다. 마을 사람들은 리사무소가 있는 못동네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방향을 따라 ‘동동네, 섯동네, 알동네, 웃동네’라 불렀다. 아버지는 해가 떠오르는 동동네 허 장 할으방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그 유명한 동의보감의 허 준, 홍길동전의 허 균처럼, 양 천 허씨들은 이름을 외자로 썼다.
아버지는 1923년 1월 20일생, 양천 허씨 가문의 34세손이자, 제주도로 들어온 조상의 계보로는 24세손이다. 입도조(入道祖)인 송암공 허손(許愻)은 고려말에 대제학의 벼슬을 지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같이 조선을 세우자는 제안을 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거절을 하였다. 결국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는 제주도 귀양길로 이어졌고, 우리의 고향이 제주도가 되는 근원이 되었다.
어쩌다가 계획에 없는 족보 이야기가 나오고 말았다. 요는 아버지가 뼈대 있는 양반 자손의 종손으로 태어났지만, 그것이 아버지 인생의 큰 획을 가르는 요인이 되었음을 암시하고자 함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현대화의 추세에 따라 장손의 이름을 외자가 아닌, 태행(太行)으로, 풀이하자면 ‘크게 행하라’고 지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둘째 부인을 얻어서 조강지처를 내버리는 바람에 어려서부터 증조부 손에서 자랐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께서는 어머니를 바로 그 옆집에서 자라나게 하심으로, 아버지의 미래에 따뜻한 봄볕이 들도록 기획하셨다.
40대에 남편을 잃은 외할머니는 오직 당신 몸 하나로 4남2녀를 키워내야 했고, 5살에 아버지를 여읜 어머니는 일찌감치 해녀가 되어서 어머니의 살림밑천이 되었다. ‘똘 나민 도새기 잡앙 잔치허곡, 똘 셋이민 혼 해에 밭 혼 파니썩 산다(딸 낳으면 돼지 잡아서 잔치하고, 딸 셋이면 한 해에 밭을 한 뙤기씩 산다)’는 제주도의 속담이 ‘쇠로도 못 나난 제주예조로 나신예(소로도 못 태어나서 제주여자로 났단다)라는 속담과 어우러져 여인의 노동력을 부추겼다.
그야말로 제주도 여자들은 돌과 바람으로 이루어진 자연에 맞서서 그 이상의 강한 혼신으로 자식들을 키워냈다. 기실로 돌, 바람, 여자를 삼다도라 일컬은 이들은 남자들임에 틀림이 없을 터지만, 그것은 제주도 어머니들의 숙명이었다.
대포마을 해녀들 중에서 ‘1등은 못해도 2등은 했다’는 어머니를 눈여겨 본 허 장 할아버지는, 당신의 종손 며느리로 일찌감치 어머니를 점찍어 놓으셨다. 종손이 18살쯤 되자,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손자 며느리로 들이시고는 같은 집에서 살림을 꾸리게 하셨다. 샛메누리인 수창이 어멍한테는 ‘일은 느린 것이 말만 허멍 밥은 하영 먹는다’라면서 큰소리로 타박을 하시면서, 손지며느리인 어머니한테는 ‘어찌 그리 손발이 재냐(빠르냐)’라고 하시면서 이웃집이나 가게 심부름을 시키곤 하셨다.
그럴수록 일 욕심이 많은 어머니는 동이 트면 밭으로 나가서 검질을 매다가 물때가 되면 바다로 달려가서 물질을 하였다. 해가 긴 여름에는 다시 밭으로 가서 남은 일을 하다가 해가 떨어지고 검질이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몸을 일으키셨다.
그러한 어머니의 생활은 자연스레 딸들에게도 공유되어, 우리는 해가 뜨면 밭으로 가서 일을 하다가 종이 울릴 쯤이면 학교로 달려가고, 공부가 끝나면 밭으로 달려갔다. 소풍이나 영화관람, 수학여행 등 공부가 없는 날에는 ‘가사조력’이라는 결석계를 제출하고 어머니와 함께 밭고랑에 앉았다.
그런 날에는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의 염장을 지르는 소리를 하나같이 질러댔다. “정열이 어멍은 조크라. 송아지 곹은 똘들이 저추룩 하난!”. 말인즉슨 어머니를 ‘일만 아는 쇠’라는 게 아닌가.
그래서일까? 어머니는 큰딸을 제주시로 보냈다. 우리 마을 최초의 여고생이었다. 이어서 둘째딸도 제주시로 보내더니, 아들은 대학까지 시켰다. 거기까지였다. 셋째 딸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공부시킬 여력이 없없다. 눈물을 머금고서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서울로 보냈다. 언니들이 어떻게든 돌보아주기를 기도하며 기대하셨으리라.
하지만 셋째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고, 야간고등학교라도 다녀보겠다면서 제주시로 올라갔다. 넷째와 다섯째는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중문에서 가사조력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틈에 나는 교복도 없이 중학교 입학식을 맞았고, 언니들은 그날 아침 동생이 입고 갈 교복을 찾아 온 동네를 뒤졌다. 다행히 교복을 하나 구했는데, 불행히도 허리가 잘록 들어간 고등학생용이었다. 까만색이 바래면 회색이 아니라 보라색에 더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즈음에 우리집은 대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일곱명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어머니는 밤낮으로 돈을 꾸러 다니는 게 부업이 되었다. ‘계에 들어서 운수가 좋게 앞번호에 당첨되면 목돈을 먼저 타서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내리라’던 어머니의 꿈이 물거품이 되자, 나는 공짜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실업계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어쩌다가 수석으로 입학한 나에게 단체로 교복을 계약하게 된 지싸롱의 마담님은 공짜로 선물해 주셨고, 그게 도화선이 되었는지 학교는 약속에 없던 책과 책가방까지 덤으로 주었다. 아, 나는 그날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이 거기 계신지’ 물어보았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교복이 없어서 언니들이 온 동네를 뒤져서 찾아낸 고등학생 교복. 그 빛바랜 옷을 입고서 가방도 없이 책도 없이 학교로 달려가던 계집아이의 서러움을 분명히 높은 곳에서 지켜보고 계셨으리라.
어제는 미국에 있는 큰아이가 카톡을 해 왔다. “엄마, 넷플릭스에 들어가서 ‘폭삭 속았수다’를 봐 봅서. 아니 꼭 봐야 돼!”. 하, 그 녀석은 안다. 내가 여간하면 TV를 보지 않는다는 걸. 지금 거실에 있는 저 넓은 스크린의 평면 TV도 아들이 사서 보내온 것이다. 다른 엄마들처럼 주말에는 드라마도 보고, 개그콘서트, 열린 음악회도 보면서, 웃기도 하고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해야 심신이 건강해진다고. 엄마가 오래 살아야 열심히 살아야 할 자기의 언덕이 유지되지 않겠냐고.
모처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TV를 켰다. 넷플릭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폭삭 속았수다’를 클릭하자, 제주 바다와 물질하는 해녀들이 나온다. 대부분 해녀들이 거의 모두 불턱으로 올라와서 옷을 갈아입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혼자서 억척같이 물질을 계속하는 해녀가 있다. 수십번씩 자맥질하면서 숨이 끊어져라 숨비질을 하더니, 드디어 전복 하나를 떼고서야 ‘이제는 됐다’ 싶은 안도감이 눈가에 어린다. ‘호오이∼’ 하는 그녀의 숨비소리가 불턱에 있는 동료들의 얼굴에도 안심으로 내려 앉는다.
전복은 깊은 바다, 큰 바위로 둘러싸인 엉장(굴) 속이나 여(크고 작은 바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작은 섬)처럼 여간해서는 찾기 어렵고 찾더라도 떼어내기가 쉽지 않은 곳에 은밀히 숨어 있다. 그래서 전복은 망사리에 가득한 소라보다도 귀하고, 상군해녀로서의 기량을 증명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 오죽하면 전복은 ‘영등할망이나 조상님이 점지해 주어야 보인다’고 말할까.
그 해녀 어머니에게는 ‘애순’이라는 10살짜리 딸이 있다. 살림을 도맡아 하고 동생들을 돌보면서도 공부를 잘해서 100점을 받아 온다. 어머니를 닮아서 성품도 굳세고 성질도 있어서 학교에서는 반장을 능가하는 부반장이다. 극심한 가난과 몸에 부치는 노동으로 병이 든 어머니가 29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야말로 호강 한 번 못해 보시고, 폭삭 속기만 하셨다. 졸지에 가장이 된 애순이가 동생들을 돌보면서 어머니처럼 살아간다. 시인의 꿈은 가슴 깊이 접어두고서 억척같은 제주여인이 되어 돌처럼 바람처럼 세파를 견뎌낸다.
1970년대 중반 들어서 제주도에 밀감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우리도 그렇게 살았다. 아침에 동이 트면 식사 당번을 남겨두고서 여자아이들은 모두 밭으로 나갔다. 검질(김)을 매다가 학교 종이 울릴 쯤이면, 얼른 밥덩이를 몇 개 집어삼키고서 학교를 향 해 냅다 내달렸다. 학교가 파하면 그 걸음으로 밭으로 갔다. 해가 기울어질 쯤이면 저녁 식사 당번을 보내놓고는 어두워서 검질(잡초)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일을 하였다. 그야말로 학교는 졸업장을 따기 위한 간판에 불과했다. 대학 진학률이 20%를 겨우 넘긴 시절이었으니, 실업계 고등학교라도 갈 수 있으면 천만다행이었다.
어떻게 우리 아들이 애순이를 보면서 엄마를 떠올렸을까? 언제가 내 손을 만지면서 ‘엄마 손은 참 위대하네’라고 농담을 던지더니.... 유독 내 손이 크고 거치니까 그런 소리를 했거니 싶었는데, 마음에 둔 얘기였네 싶다.
제주의 60∼70년대가 드라마가 되어 온 국민을 울리는 요즘, 나도 어느새 60대 중반의 노인이 되어 있다. 문득 김종두 시인의 시 한편이 떠오른다.
‘어머니, 그 시절은 지들컷도 하도 귀해영 삭다리도 봉강 댕겨십주. 고망 터진 옷도 입엉 댕겨사 후제 잘 살댄 허멍, 밥은 호끔 먹곡 물은 하영 먹어사 얼른 큰댄 허지 않읍디가. 끄니 때마다 밥상머리 토다 앉앙, 우리 다섯 남매 들락거리는 숟가락질 뵈려보시던 어머니. 경 허멍도 생일 때만은 곤밥에 뽈래 초령 배불려 주어 싶주. 조식들 멕이고 입지는 일이 경도 어려웠던 시절. 머리수건 벗지 못헌채 살아 온 탐라의 어머니, 제주 여인이여.'(지들컷: 땔감, 하도: 아주, 삭다리: 삭은 나뭇가지, 봉강:주워서, 고망:구멍, 호끔: 조금, 하영: 많이, 토다 앉앙: 지켜 앉아서, 곤밥: 쌀밥, 촐래 초령:반찬 차려서, 주어십주: 주었지요) [제주여인 4, 사는게 뭣 산디, 김종두, 2000]

어머니에게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폭삭 속았수다’를 보면서 어머니를 떠올리는 아들과 딸들이 있으니, 제주의 어머니들은 결코 외롭지 않겠다. 아니 ‘폭삭 속았수다’가 전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국민 드라마가 되었으니, 이제 제주의 어머니들은 더 이상 서럽지 않겠다. 아니다. 애초에 우리 제주도 어머니들은 외롭거나 서러움을 품지 않는 설문대 할망의 후예들이 아니신가. 그래도 제주의 아들·딸들이 ‘폭삭 속아수다’라고 말해준다면,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눈물짓지 아니할 어머니들은 없을 터. 그래서 제주도는 딸들의 섬으로 영원히 이어지리라. 드라마 속에서 만큼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