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회의 예산 대폭삭감에 대해 원 지사는 담담하게 수용했다.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다. 줄만큼 주고 본인이 원하는 바를 얻었다는 입장이 느껴진다.
구성지 도의회 의장의 '협치예산' 제안으로 촉발된 제주도와 도의회 간의 예산갈등이 일단 막을 내렸다. 수많은 논란을 야기시켰지만 예산안은 통과됐고 가장 우려했던 '준예산'사태는 막았다. 1682억원이라는 '분노의 칼질'에 대해 원희룡 지사는 담담하게 받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원 지사는 비상체제로 도정을 운영할 지언정 의회의 ‘예산 증액 관행’이라는 대마를 살려주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예산 대폭삭감의 대가로 도의회가 예산 증액을 포기한 상황에서 도가 ‘재의’등 다른 협상카드를 선택할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준예산 편성이라는 파국도 없이 법적인 힘을 빌지도 않은 채 소정의 목표는 달성됐다. 어찌보면 추후 추경예산 확보를 통해 필요한 예산은 확보가 가능하겠지만 ‘예산증액 관행의 중단’이라는 전례를 되돌리기는 어려워 진 것이다.
기존의 관행을 어떻게든 유지해보려는 도의회의 다양한 시도는 번번이 도의 역습에 부딪혔고 단순한 반발이라고 여겨지던 도의 유도등을 더듬거리듯 따라가 보니 종착역에 온 느낌이다.
뒤늦게 놀란 의회가 마지막 승부수로 예산의 대폭삭감 카드를 썼지만 이미 전세를 역전시킬만한 ‘패’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시 한번 원 지사에게는 칼날을 쥐어준 형국이 됐다. 다른 곳에 칼을 쓸 수 있게 됐다.
예산갈등은 도와 의회의 단순한 대립 이상이다. 도의회가 도정과의 기싸움이라고 판단했다면 원 지사는 개혁의 대상으로 본 측면이 강하다.
중앙무대 정치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애초 원 지사의 행보는 '협치'라는 용어처럼 도의회와도 원만한 '협력'을 우선시 할 것으로 비쳐졌다. 그래서인지 원 지사가 예산문제에서 보여준 '원칙'의 고수는 기존 제주정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낯설고 당황스러운 행보다.
더구나 의회의 입장에 대해 박정하 정무부지사와 박영부 기조실장이 보여준 발빠른 대응은 의회의 공분을 사기도 했지만 이미 '각본'과 '각오'가 있었다는 판단을 가능케 했다.
의회는 이 점에서 당황했다. 쉬운 길을 택하고 싶었던 의회는 별 생각 없이 원칙에서 벗어난 '예산증액'을 택했고 '의원 1인당 20억원 요구'라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서 준예산사태가 벌어진다면 비난의 타겟이 의회가 될 것은 무엇보다 명확해 보였다. 명분에서 밀린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결국 항목별 '부동의' 카드까지 꺼낸 도는 의회로부터 예산증액이라는 본래의 의도를 철회할 수 밖에 없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물론 1682억원이라는 대규모 칼질을 했지만 그 의미가 커 보이지는 않는다.
의회는 도의 대의회 정책에 대해 지나치게 감정적인 대응을 많이 했다. 그래서는 도정을 견제하기에는 역부족이 될 것이 분명하다.
원 지사는 예산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거나 의회와의 협력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도내의 비판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4년간의 도정이 넘어야 할 첫 장벽으로 도의회에 대해 자신의 정치 스타일을 명확하게 경험토록 했고 일단 결과는 성공적이다.
메시지는 단순해 보인다.
‘협력은 언제나 원칙 안에서만 가능하다’
또 다른 하나는 "나의 길을 갈 테니 방해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강력한 메시지다.
다른 하나 새해에는 원 지사의 칼날이 행정조직 내부로 향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규모 삭감예산은 공무원들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는 좋은 구실이다. 원 지사의 정책방향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공무원들에게는 개혁을 단행하는 좋은 구실이 될 것이다.
2014년 말미에 담담하게 예산삭감을 받은 원 지사의 행보는 이제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범위를 넓힐 것이다.
어느 분야에 고강도 원칙을 들이댈지 궁금하다. [제이누리=이재근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