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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주역이 말하는 지혜와 철학(3)

◆ 췌괘

 

췌(萃)는 모이다, 집결하다 뜻이다. 많은 뛰어난 인물이 모이니 영웅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영재가 서로 모이면 반드시 하늘과 땅이 뒤집히듯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아름다운 미래가 창조된다.

 

인재가 부족하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고상함과 고상함이 모인다. 아름다움과 희망이 모인다.

 

전국시기에 진(秦)소왕(昭王, BC325~BC251)은 사람됨이 낙관적이었다. 기상이 넘쳐나 원대한 계획을 크게 펼쳐 천하통일을 바랐다. 그러나 천하통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기(單騎)로 창을 들고 적진에 뛰어들 듯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소왕은 천하의 현재를 끌어 모을 마음을 먹었다. 범저(範雎)는 원래 은사(隱士)였다. 시서와 병법을 두루 익혀 원대한 계략에 뛰어났다. 당시 유명한 현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범저는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다 진(秦)나라에 이르렀다. 진 소왕이 듣고는 범저를 초빙해 부하로 삼고 자신을 위하여 일을 시킬 생각을 했다. 그래서 친히 범저를 찾아갔다.

 

소왕은 범저를 보자마자 주변에 사람을 물린 후 독대하였다. 소왕이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서 가르침을 청했다.

 

“선생을 무엇을 가지고 내게 가르침을 주겠습니까?”

 

무릎을 굻은 것은 진심을 표현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범저는 우물우물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그러자 소왕은 다시 한 번 더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하며 말했다.

 

“선생은 어떻게 내게 가르침을 주겠습니까?”

 

두 번째 무릎을 꿇으면서 더욱 공경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어떤 불만스런 표정도 없었다. 그래도 범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왕은 화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해낸다는 마음으로 다시 무릎을 꿇었다.

 

“선생은 내게 가르침을 주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까?”

 

세 번째 무릎을 꿇자 범저의 마음이 움직였다. 실로 그렇지 않은가,

 

“정성이 지극하면 쇠와 돌도 열리지”1) 않던가.

 

소왕의 정성어린 행동을 보고 범저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범저는 자신이 진언하고 싶지 않은 걱정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범저가 걱정거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소왕은 네 번째 무릎을 꿇고서 말했다.

 

“선생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합니까? 진나라는 외지고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는 국가입니다. 나 또한 재능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선생이 우리나라에 왔다는 것은 하늘이 내게 선생을 성가시게 굴어서라도 선왕이 남긴 고업을 중단하지 말라는 계시를 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선생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이 선생에게 선왕을 도와 나를 버리지 않게 한 것입니다. 선생이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후부터 일이 크든 작든, 위로는 태후부터 아래로는 대신까지 모든 것에 대하여 선생께서 내게 하나하나 가르침을 주세요. 나에 대해서는 어떤 의심도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소왕의 뜻은 명확하다. 범저가 말을 하도록 모든 우려를 없애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범저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남김없이 하도록 만들었다. 결국은 자신이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범저의 말을 한 마디로 놓치지 않았다.

 

범저는 줄곧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소왕이 특별히 허락했지만 여전히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먼저 실험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대왕의 계책도 실수하는 바가 있습니다.”

 

소왕은 그 질책을 듣고도 화내지 않았다. 범저가 진언하려는 전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기를 잡아야 했다. 범저의 우려를 철저히 없애야 했다. 소왕은 다섯 번째 무릎을 꿇고 말했다.

 

“과인이 실수한 계책이 무엇인지 상세히 듣고 싶습니다!”

 

말은 더 정중하였고 태도는 더 공경스러웠다. 이때서야 범저도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았다. 더 빼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소왕을 도와 육국을 통일하는 데에 보좌하겠노라고 답하고 자신의 계책을 알려주었다.

 

범저는 기인이다. 자기 재능을 믿었고 청렴하였다. 속세를 경시하였다. 소왕은 인재를 사모할 정도였다. 인재를 얻고 인재를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제왕의 몸을 다섯 번이나 굽히면서 범저의 진언을 구했다. 결국 범저를 제단에서 내려오게 하여 기꺼이 자신을 위하여 힘을 다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자신이 세운 공명의 뜻을 이루게 만드는 것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현인을 모집한다는 평가를 이루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강산과 사직이 안정을 이루게 됐다는 점이다. 대업을 이루려는 원대한 계획이 실현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는 점은 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소왕이 마음을 비우고 현인을 받아들인 조치는 옳았다. 범저는 진나라를 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래서 채택(蔡澤)이 말했다.

 

“제후를 제압하고 삼천(三川) 일대를 도모한 위세로 의양(宜陽)을 튼튼하게 했으며, 양의 창자 같은 험지를 끊어 태항산의 길을 막고……천하가 모두 진나라를 두려워하니 진나라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졌고, 그대의 공적은 극에 달했소.”(『사기·범수채택열전(范睡蔡澤列傳)』)

 

이것은 소왕이 현인을 존중하고 능력 있는 자를 높여 받아들인 결과다. 현인을 존중했기에 많은 인재를 불러 모았다. 자신이 군웅을 웅시할 수 있는 자본이 됐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기틀이 됐다.

 

1) 精誠所至,金石爲開.(『후한서(後漢書)·광릉사왕형전(廣陵思王荊傳)』)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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