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상황에서 거지 항방(行幇)은 모두 민간 비밀집단이었지만 예외적으로 관청이 경영하는 개방도 있었다. 옛날 흑룡강(黑龍江) 쌍성부(雙城府)의 ‘걸개처(乞丐處)’가 관방의 개방이다. 옛날에 쌍성부 서남 모퉁이에 부익장(富翼長)이라는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에는 산병홍(傘屛紅) 대문이 있었고 대문에는 금색 문자로 쓴 ‘쌍성부 걸개처’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곳이 청나라 말기부터 민국을 거쳐 만주국 14년(1945)까지 약 반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떠들썩했던 쌍성부 관청이 경영했던 개방의 소재지였다. 외원에는 동서로 곁채 초가집 5동이 있었다. 처마가 낮고 종이 창문으로 돼있는 일명량암(一明兩暗)1) 형태였다. 실내 맞은편에 있던 온돌이 거지들의 숙식처였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의 해청방(海靑房) 5칸이 있었고 동서로 각 2칸이 배치되어 있었다. 모두 기둥과 대들보를 채화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거지처의 단두(團頭)가 머무는 곳이었다. 명의상에는 유랑하는 거지를 맡아 기르는 자선단체라 되어있지만 사실상은 항방(行幇)이라는 수단으로 거지에게 사기 치는 그야말로 염왕전(閻王殿)이나 다름없었다. 거지가 거지처에 들어가면 단두의 부하 아닌 부하, 노예나 다
거지 동업조직인 항방(行幇)은 여태껏 보지 못했던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곳곳에 흩어져 존재하였고 대부분 각자 나름대로 정돈되어 있었다. 사승(師承) 관계를 대단히 중히 여겼다. 그 사승 관계란 방주(幇主)를 잇는 관계였다. 방주는 모두 ‘도맡아 처리하는’ 권위를 가지고 자신에게 충직하며 믿을 수 있는 도제에게 건네주었다. 계승자는 도처에서 기반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안휘(安徽)성 육안(六安)현 거지 항방의 거지 두목 둘은 개봉(開封)에서 온 이삼고(李三顧)〔별명은 이호자(李胡子)〕와 녹현(鹿縣)의 기달개(祈達開)〔별명은 기노오(祈老五)〕 사형제로 청나라 도광 연간의 거지 임(林)에게서 사승되어 내려온 제6대 거지 두목이었다. 그들은 하남에서 안휘까지의 강호를 횡횡하며 기반을 닦았고 육안현에서 개방을 건립하였다. 이호자가 가끔 성황묘(城隍廟)에서 뱀을 부리며 약을 파는 것 이외에 그 둘이 매일 헤프게 쓰는 비용은, 주로 혼례식이나 장례식에서 얻어온 위로금과 고리대를 놓은 채권자를 대신하여 빚을 받은 후에 나눈 돈이었다. 이것이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 거지들이 빚을 받아내는 방식은 채권자보다도 흉악했다. 현지인들은 “거지 두목은 무술을 한다, 돈을 달라면 안
이외에 그들은 또 길거리 쓰레기를 청소하거나 관방 측간의 똥오줌을 치우고 길거리에서 죽은 시체를 치우는 일도 담당하였다. 화재 등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책임도 졌다. 1918년 포두 지역에서 흑사병이 유행하여 3000여 명이 죽었는데 그들이 책임지고 시체를 성 밖으로 옮긴 후 화장하였다. 죽은 시체를 피하려 할 때에는 그들이 나서서 운반하여 매장하고 검시관의 검시를 돕기도 했다. 주인이 없는 사형수의 시체가 있을 때에는 그들이 옷을 벗겨내고 깨끗이 빨아 헌 옷 파는 노점상에게 팔았다. 심지어는 시체에서 심장이나 뇌를 꺼내어 약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평상시에는 공업계, 상업계의 노동조합이 양산에게 일상용품이나 노임 등을 공급하였다. 매년 사대 명절이 되면 여러 상점에서 그들에게 따로 선물을 보냈다. 그 외에도 ‘부수입’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분수에 만족하여 본분을 지키면서 입에 풀칠하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양산을 삶을 돌보아주며 평생 의지할 수 있는 집단으로 여겼다. 그러나 양산에 가입하면 항방(行幇) 규칙을 반드시 따라야 했다. 일반적으로 업종을 바꾸어 다른 일을 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항방의 비밀도 엄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현재 내몽고자치구에 속해있는 포두(包頭, 바오터우)의 옛 시가지역 초시가(草市街) 북쪽에 ‘자인구(慈人溝)’라는 지역이 있다. 근 반세기 이전에는 그 지방을 ‘사인구(死人溝)’라 불렀다. 본래 관을 놓아두던 곳이었다. 많은 거지가 그곳에 구멍을 파서 모여 살았다. 그래서 점차 포두의 유명한 빈민굴로 변했다.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그곳에 범인을 잠시 구류하는 ‘흑방(黑防)’이 있었다고 전한다. 포두(包頭)에서 체포한 범인과 오원(五原), 동승(東勝), 싸라치(薩拉齊) 뒷산 지역에서 압송해 온 범인은 모두 그곳으로 이송하여 구류했다가 다시 싸라치의 큰 감옥으로 호송하였다. 포두의 흑사회 조직 ‘양산(梁山)’의 대본영 ― ‘충의당(忠義堂)’ ― 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양산(梁山)’이라는 말은 ‘쇄(鎖)’와 ‘리(里)’ 양 가문의 병칭이다. 어김없는 깡패 집단이었다. ‘쇄가(鎖家)’는 건륭 연간에 귀화성(歸化城) 공주부(公州府)에서 야경을 돌던 마삼홍(馬三紅)과 농사를 짓던 진사해(秦四海)가 창립했다고 전한다. 명나라 영락제 주체(朱棣)를 조사(祖師)로 모셨다. 마 씨, 진 씨 가문의 인원은 모두 취고수(구식 혼례나 장례식을 할 때의 악사)와 교자꾼이 골간이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북경의 ‘강방(杠房)’ 업종은 한때 흥성하였다. ‘강방’이란 전문적으로 장례(葬禮) 의장(儀仗)을 세주는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관을 덮는 수놓은 단자 덮개, 의장대용의 길을 여는 징, 우산, 부채, 깃발, 패, 수레, 가마 등을 빌려 주었다. 그와 동시에 의례하고 관을 메고 의장을 드는 인원을 대신하여 고용하기도 하고 관을 짜는 데에 필요한 목재 등 필요한 물품을 대신 구매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강방은 장례를 청부 맡아 처리하는 전문 직업이었다. 관을 메고 의장을 드는 것과 같은 막일은 비록 당시에 대단히 중히 여기는 의식 중 하나였기는 했지만 결국은 비천한 일에 속했다. 그래서 거지에게 임시로 일하여 돈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때의 품삯은 행하(行下)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방에 교부하는 금전을 빼더라도 평상시에 구걸하는 금전보다도 많았다. ‘효자(孝子)’에 충당되어 길을 따라가면서 지전을 뿌리기도 했다. 그래서 강방은 또 ‘화자두(化子頭)’라는 명칭이 붙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실제로 북경의 이른바 화자두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었다. 북경에서 과거에 푼돈을 구걸하는 것은 대부분 외지
옛날 동북지방에 또 다른 거지 항방(行幇)이 있었다. ‘이거(二柜)’가 그것이다. 그들은 1년에 두 계절에 대량으로 양식을 구걸하는 대광과는 달리, 여러 방식으로 흩어져서 각지를 유랑하면서 구걸하였다. 예를 들어 이른바 요구하는 ‘요적(要的)’, 즉 밥을 구걸하는 것은 2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밥을 담는 밥통을 들고 길거리에서 애걸하며 구걸하는 것, ‘찬밥 그릇을 요구하는 거지’였다.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 구걸하는 부류가 있었다. 예를 들어, 농사꾼으로 분장해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느니 병을 치료해야 한다느니 말하며 집집마다 다니면서 고기와 쌀을 구걸하거나, 길가는 사람으로 위장해 여비가 부족하니 도와달라느니 하며 구걸하는 사람으로 ‘밥을 구하는 거지’1)였다. 이것보다 더 많은 부류는 노래를 하며 구걸하는 부류였다. 예를 들어 ‘죽림(竹林)을 먹는 거지’로, 고달판(呱哒板, 박자를 맞추는 목판)을 치며 다녔다. ‘화상(華相)을 말하는 거지’로 사랍계(沙拉鷄)2)를 연주하고 다녔다. ‘검은 막대기를 가지고 노는 거지’로 담배설대를 치며 다녔다. ‘평고(平鼓)를 치는 거지’로, 합라파(哈拉巴, 소의 견갑골로 만든 악기)를 연주하며 다녔다. ‘자기를
실제로 옛날에 궁가항 부류의 거지 항방(行幇)은 중국 어디에나 존재하였다. 일정한 지역을 각자의 기본 활동 영역으로 산재되어 있었고 연결되어 있었다.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길림(吉林) 해룡(海龍) 일대에 ‘대광(大筐)’과 ‘이거(二柜)’ 두 종류의 거지 항방이 활동하였다. 이른바 ‘대광’은 거지 집단이었다. 절름발이, 소경, 병자와 같은 거지가 평일에는 도시에 살다가 봄과 여름에 향촌으로 내려가 양식을 구걸하였다. 양식을 구걸할 때 ‘낙자두(落子頭)’가 무리를 이끌었다. ‘순자(順子)’라 부르는 작은 몽둥이나 ‘흘미(吃米) 팻말’을 손에 들고 갔다. 그 팻말은 지현(知縣)이 준 것으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양식을 구한다’라는 증좌였다고 전한다. 이유가 충분하니 하는 말이 당당했다. 양식을 구할 때 쓰는 도구는 유관(柳罐, 버드나무 잔가지로 엮은 두레박 형태의 용기)이었다. 그래서 ‘대광(大筐)’이라 하였고 우두머리는 ‘광두(筐頭)’라 불렀다. 낙자두는 유관을 들고 무리와 함께 향촌으로 내려갔다. 주로 돈이 있는 천석꾼에게 양식을 요구했다. 그의 조수를 ‘방락자(幇落子)’라 불렀다. 낙자두는 조리 있게 말을 잘했고 대담했다. 황상이 효수할 것이라고 말하는
활념자는 소매치기하거나 닭을 훔치는 등 소도둑과 같은 부류다. 그 조사(祖師)는 둘이 있다고 전한다. 사(梭) 씨와 이(李) 씨로, 통주(通州) 상촌(上村)의 탈곡장에서 살았다. 어느 날, 둘이 집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술을 마셨다. 깨진 그릇에 가득 담긴 짠지가 전부였다. 깨진 주전자로 술을 따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가정〔嘉靖, 혹은 ‘가경(嘉慶)’, 구전이 정확하지 않아 애매하다〕 황제가 그곳에 몰래 방문하여 세 명이서 함께 술을 마시고 짠지를 안주로 먹었다. 나중에 황제는 하급 관리 자리를 줄 테니 일을 하라했으나 거절하자 둘에게 철포죽(鐵炮竹) 3개를 선물로 주고 군문(軍門, 청대에 제독에 대한 존칭)에 봉했다. 이후 사(梭)·이(李)는 한 파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이(梭李)는 믿을 수 없다’라고 했는데 그들이 궁가항의 정파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사념자는 그들을 업신여겨 그들과 왕래하지 않았다. 그들도 스승과 제자 사이에만 전했고 사람 수도 적었다. 활념자는 아문의 포졸과 결탁해 훔쳐온 물건을 포졸 등에게 뇌물로 주고 암암리에 보호를 받았다. 훔친 물건의 주인이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서 포졸을 찾아오면 포졸은 활념자에게 물건을 돌려주라고 했다. 훔
산동성 서북부에 인접한 하북성에 영진(寧津)현이 있다. 그곳에는 오랫동안 ‘궁가항(窮家行)’이라는 명칭의 방대한 개방(丐幇)이 존재하였다.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현 중국 정권이 들어서서야 사라졌다. 통상적으로 궁가항을 ‘염상(捻上)’이나 ‘염자(捻子)’라고 불렀다. 돌아갈 집이 없어 곳곳으로 유랑하며 걸식하는 사람들이 그 조직에 들어갔다. 금전이 생기기만 하면 먹고 마시고 도박에 탕진하였다. 헤프게 다 써버리고 저축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만년궁(萬年窮)’이라 불렀기에 ‘궁가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스스로 ‘이정항(理情行)’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사리, 인정을 강구하는 항방(行幇)이라는 뜻이다. 궁가항에는 ‘사념자(死捻子)’, ‘활념자(活捻子)’, ‘간상(杆上)’의 구분이 있었다. 그중 ‘사념자’가 정통이며 소속된 거지가 가장 많았다. ‘사념자’는 속칭 ‘규화자(叫化子)’라는 거지로, 푼돈을 구걸하는 거지였다. 동한(東漢) 말기의 곤궁하기로 유명한 명사 범염(范冉)1), 일명 범단(范丹)을 조사(祖師)로 모셨다고 전한다. 『후한서·범염전(范冉傳)』에 “환제(桓帝) 때에 범염은 내무장(萊蕪長)이 됐는데 모친 조상을 당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청나라 때에는 대체로 현(縣)을 중심으로 다스렸다. 각 지역의 거지를 관리하는 항방의 수령을 거지 두목이라는 뜻인 ‘개두(丐頭)’라 불렀다. 개두는 대부분 암흑가 흑사회(黑社會) 방회(幇會)의 핵심 인물이나 본바닥 건달, 불량배가 맡았다. 아문의 인가를 받았더라도 세력에 기대어 이루어졌다. 패권을 다투는 중에 각종 수단으로 여럿을 굴복시킨 후 자리를 차지하는 이도 있었다. 개두는 이른바 ‘몽둥이(杆子)’를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사실은 구걸할 때 가지고 다니는 타구봉(打狗棒)의 추상적 숭배에 불과하지만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개방에 속한 사람은 몽둥이로 활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간상인(杆上的)’이라 불렀다. 방주(幇主)의 ‘몽둥이’는 ‘상방보검’1)과 같아서 개방의 규율인 ‘방규(幇規)’를 위반한 거지를 징치하여 ‘때려죽여도 원망하지 않을’ 정도의 위력을 가졌었다. 신임 방주는 먼저 조사(祖師)와 ‘몽둥이(杆子)’에게 제사를 지내어 권력을 위임받았다고 명시하였다. 새로 개방에 가입한 거지는 반드시 방주에게 몽둥이를 증송해 관할에 복종을 표시하였다. 사실, 중국전통문화의 배경 속에는 ‘몽둥이(杆子)’는 타구봉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나이〔호한(好
이 이야기가 전개되기 전에 교묘하게 복선을 깐 줄거리가 하나있다. 당시 거지의 상황을 묘사한 풍속화라 할만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김노대가 막계를 데릴사위로 들인 후 신혼 한 달 만에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사위에게 동문과 친구를 초청하도록 하였다. 가문을 빛내려고 예니레 동안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현임 단주 김나자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단주 김나자는 생각하였다. “당신도 단주이고 나도 단주인데. 당신은 몇 대씩이나 단주로 있으면서 큰돈을 벌지 않았는가. 조상을 논하자면 피차없는데도 말이다. 조카딸 옥노가 사위를 맞이하는데 마땅히 나를 초청해 결혼 축하주를 대접해야 하지 않던가. 30일이 되어 예니레 동안 잔치를 벌이면서도 3촌 길이 1촌 넓이밖에 안 되는 초청장조차도 내게 보내지 않는단 말이냐. 당신 사위가 수재이긴 하지만, 나중에 상서, 재상이 된다한들 나는 삼촌이 아니더냐? 마주 앉지도 못한다는 말이더냐? 결국 사람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말.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말이지! 내 가서 한바탕 훼방을 놔주지. 남을 무시하면 스스로 망신당한다는 걸 보여주지!” 그래서 오륙십 명의 거지를 데리고 한꺼번에 김노대 집에 들이닥쳤다.
현재 찾아볼 수 있는 문헌을 보면 이른 시기에 출현한 중국 개방(丐幇) 형태를 기술한 문헌기록은 송원(宋元) 화본(話本)소설 중 『김옥노봉타박정랑(金玉奴棒打薄情郞)』〔김옥노가 박정한 낭군을 몽둥이로 때리다〕에 나타난 ‘단두(團頭)’다. 단체 우두머리라는 뜻인 ‘단두’는 개방의 방주(幇主)다. 이야기는 송대 항주에 7대까지 세습한, 도시 전체의 거지를 통할하는 단두 김노대(金老大)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거지가 구걸해 온 음식과 돈을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거지에게 고리대나 일숫돈을 놓아 부당한 이익을 취하거나 착취까지 일삼았다. 명나라 때 풍몽룡(馮夢龍)이 편찬한 『전상고금소설(全像古今小說)』 제27권 『김옥노봉타박정 랑』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때는 송나라 소흥(紹興)1) 연간에 임안(臨安)은 비록 건도(建都) 지역이요 부유한 고향이지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거지가 적지 않았다. 거지 중에 우두머리가 되는 자를 ‘단두’라 부르며 거지 무리를 관리하였다. 거지 무리가 구걸해 오면 단두는 ‘일두전’2)을 받았다. 비나 눈이 올 때면 단두는 멀건 죽을 쒀서 구걸할 곳이 없는 거지에게 먹였다. 낡은 옷도 단두가 관리하였다. 그래서 거지들은 자신을 낮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