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3 (화)

  • 맑음동두천 4.0℃
  • 맑음강릉 8.4℃
  • 맑음서울 5.2℃
  • 구름많음대전 6.7℃
  • 구름많음대구 9.1℃
  • 구름많음울산 10.3℃
  • 구름많음광주 7.6℃
  • 구름많음부산 12.2℃
  • 구름많음고창 6.5℃
  • 흐림제주 10.9℃
  • 맑음강화 3.7℃
  • 맑음보은 5.2℃
  • 구름조금금산 6.4℃
  • 구름많음강진군 9.3℃
  • 구름많음경주시 10.3℃
  • 구름많음거제 11.5℃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바벨 (4)

미국 샌디에이고에 사는 리차드 부부는 아이를 잃고 회복하기 어려운 고통과 상심에 빠진다. 아이를 잃은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 과정에서 부부는 미묘한 마음의 갈등을 겪는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마주했을 때 다른 누군가에게 고통의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기진맥진한 리차드 부부는 모로코 여행을 떠난다. 

 

 

리차드 부부는 잠시라도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 출발의 전기를 찾고 싶었던 듯하다. 인간이란 눈에 보이는 게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 아이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샌디에이고를 벗어나 황량한 모로코 사막을 대하면 생각도 바뀔지 모른다.

 

그보다 조금 앞선 시간. 아내의 자살이라는 충격과 상실감에 빠진 일본의 한 사업가는 모로코로 사냥여행을 떠난다. 모로코는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 시대 이후 로마·이슬람 세력의 부침을 겪은 역사의 흥망성쇠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역이기도 하다. 

 

아이를 잃은 리차드 부부나 아내를 잃은 일본인 사업가나 모두 허무한 카르타고와 로마의 영광이 잠들어 있는 ‘황성옛터’에서 ‘세상의 허무함’을 느끼고 상처를 치유받으러 모로코를 찾았는지도 모르겠다.[※참고: 기원전 9세기경 고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번영한 페니키아의 식민도시로 세워진 카르타고는 BC 6세기 지중해의 무역왕국으로 발돋움했다. 로마와 지중해를 두고 패권을 다투다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 후 로마의 속주로 전락했다.]

 

또한 비슷한 시간에 멕시코에서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가 결혼식을 날짜를 잡는다. 이들 모두 그저 자신의 상황에 따라 자신들의 ‘스토리’를 써나갈 뿐이다. 리차드 부부가 일본인 사업가 상황을 알 턱이 없고 당연히 고려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멕시코 젊은 남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이 써 내려가는 ‘스토리’에 간섭하게 되고, 자신들의 ‘스토리’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간섭받는다. 일본인 사업가가 사냥여행을 마치고 여행가이드에게 선물로 준 사냥총은 돌고 돌아 양치는 아이의 손에 들어간다. 그 아이는 리차드 부부를 태운 관광버스를 향해 사냥총의 성능을 시험한다. 

 

 

샌디에이고에서 리차드 부부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던 멕시코 가정부 아멜리아는 리차드 부부가 모로코 여행에서 제때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에 부부의 아이들을 데리고 멕시코에서 올리는 아들의 결혼식에 간다. 결국 이들 모두 자신들이 원하던 ‘스토리’와는 동떨어진 어처구니없는 ‘스토리’를 쓰게 된다. 모두 ‘인생 스토리’ 자체가 달라지기도 하고 헝클어진다. 모두 각자 제 갈 길을 가다가 교차로에서 서로 뒤엉켜 갈 길을 잃어버리는 꼴이다.

 

복합해지고 다양해지는 사회에서 자신이 구상했던 ‘스토리’를 온전히 써 내려가는 게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제 모두가 자신만의 ‘스토리’를 쓰고 싶어 하는 시대에 언제 어디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간섭’이 들어올지 아무도 예상하고 대비하기 어렵다. 그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위’는 이제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 대통령도 국가 조직 전체를 일사불란하게 통제할 수 없고, 사장님도 회사 전체를 통제할 수 없다. 4인 가족의 가장조차도 한 가정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기 불가능하다.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어느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자신의 연주회에서 연주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객석에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계속 울렸다. 연주자 머릿속의 모든 음표가 뒤죽박죽되고 연주자는 절망과 분노 속에 무대를 떠나버렸다. 똑같은 상황이 어느 재즈 피아니스트의 연주회에서도 일어났다. 

 

그러나 이 재즈 연주자는 악보를 고집하는 클래식 연주자와는 달리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리는 객석을 한번 힐끗 보고는 이내 웃으면서 계속 울려대는 벨소리에 맞춰 곡을 변주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순발력과 즉흥성을 보였다. 휴대전화 벨소리란 무시무시한 간섭이 있었지만, 정해져 있는 악보만을 고집하는 클래식 연주자는 그 간섭에 자신의 스토리가 모두 헝클어진 반면, 재즈 연주자는 그 간섭까지 자신의 음악 속에 녹여 자신의 스토리를 완성한 셈이다.

 

 

클래식 음악과 하모니 오케스트라는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악보와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스토리’에 충실하다. 반면 재즈 연주에는 정해진 악보도 없고 지휘자도 없다. 연주자들은 집단적으로 즉흥연주를 한다. 모두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연주자들의 감흥과 간섭에 자신을 얹는다.

 

민주화되고 평등하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현대사회에는 더 이상 클래식한 ‘하모니 오케스트라’는 썩 어울리지 못하는 듯하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간섭을 재즈 연주자처럼 순발력 있게 즉흥적으로 수용해가면서 자신만의 스토리를 써 내려가야 한다. 

 

연주회장에서 난데없이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라는 사소한 간섭도 못 견디고 분노해서 무대를 박차버리는 연주자는 요즘 비난의 집중포화를 얻어맞는 그야말로 꼰대가 되는 세상이다. 우리네 정책과 행정, 그리고 정치를 담당한 많은 엘리트가 더 이상 ‘클래식 하모니 오케스트라’를 고집하는 꼰대가 아닌 재즈 뮤지션이었으면 좋을 듯하다. 세상의 변화가 재즈 뮤지션을 요구하니까 말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31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