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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미션 (5)

1750년대 남미 대륙은 유럽의 세력 균형이 요동치면서 혼란에 빠진다. 남미 대륙 전체의 패권을 장악해왔던 스페인에 신흥세력 포르투갈이 도전한다.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일전을 불사해 기존 패권을 고수하기보단 포르투갈과의 ‘거래’를 택하고 ‘마드리드 조약’을 체결한다. 이로부터 현재 브라질의 광대한 영토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확정된다.

 

 

문제는 브라질의 접경 지역에 살고 있던 과라니족에 대한 처분이다. 스페인의 제수이트 교단이 천신만고 끝에 교화하고 개척한 ‘과라니 공동체 지역’을 포르투갈이 요구하면서 그 지역에서 과라니족들을 쫓아내고자 하고, 스페인은 반대한다.

 

이 분쟁을 중재하고 판결하기 위해 교황청은 추기경 알타미라노를 현지에 파견한다. 알타미라노 추기경도 현지답사 결과 제수이트 교단이 ‘하나님을 섬기는 과라니족의 아름다운 공동체(community)’를 건설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과연 이들을 노예거래를 합법화하고 있는 야만스러운 포르투갈에 내어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고뇌에 빠진다.

 

문제의 핵심은 ‘공동체(commune)’라는 것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중세 이후 유럽에서 시작된 ‘코뮌(commune)’이란 사람들이 특정한 목적으로 모여 살면서 생산활동의 이익, 그리고 재산과 소유물, 자원을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제수이트 교단이 과라니족들과 건설한 교구는 전형적인 ‘코뮌’의 모습을 보여준다. 분명 아름다운 모습이다. 

 

가브리엘 신부는 알타미라노 추기경에게 이곳에서 올리는 생산 수익의 90%는 다시 과라니족들을 위해 쓰인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한다. 그런데 그 보고를 듣는 추기경의 표정이 뭔가 석연치 않다. 

 

포르투갈의 대표 혼타르는 ‘지금 프랑스에서도 급진주의자들이 이런 코뮌을 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불온한 것’이라고 분개한다. ‘코뮌 공동체’를 향한 그의 적개심은 백성들이 모두 ‘코뮌’이라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구성해 살아간다면 자본가와 권력자가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비롯된다.

 

 

알타미라노 추기경은 ‘코뮌 공동체’에 대해 ‘사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나?’라고 혼잣말처럼 반문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코뮌 공동체’를 옹호하지는 못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교황청도 문 닫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가브리엘 신부의 인도 아래 과라니족이 건설한 공동체는 결국 교황청과 스페인, 그리고 포르투갈의 ‘야합’ 속에 처참하게 파괴된다. 불타는 교회당에서 예수님의 성상을 들고 나오는 가브리엘 신부도 ‘예수님의 군대’에 의해 처형된다.

 

‘과라니 사태’가 종결된 후 추기경은 교회에 구원의 손길을 요구한 선교회와 과라니 신도들을 교회가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러나 심정적 불편함도 잠시일 뿐, 이내 ‘교황청 관료’로 돌아간다. “나는 흐름을 따른 것일 뿐이다. 세상은 워낙 그런 것”이라는 성직자라기보다는 장사치나 정치꾼이나 할 법한 독백을 하고 훌흘 털어버린다.

 

공동체주의(communitarian)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의 대척점에 서는 정치사상으로 20세기 후반에 등장했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마이클 월저, 찰스 테일러,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란 책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하버드대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 등이 아마도 대표적인 ‘공동체주의 옹호자들’일 듯하다. 이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를 절충한 제3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많은 공동체주의자는 자유주의와 달리 개인의 자유보다는 평등, 개인의 권리보다는 사회적 책임, 국가의 가치중립적 방임放任보다는 ‘가치판단’에 따른 결정을 중시한다. 근대 개인주의의 팽배에 따른 도덕적 공동체의 와해와 이기적 개인주의의 팽배에 의한 사회붕괴 현상을 성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최근 마이클 샌델 교수와 같은 ‘공동체주의자’의 주장과 맥이 닿아있는 의제인 듯한 ‘개발이익 환수제’ ‘음식점 총량제’와 같은 대안적 모색을 향한 공격과 비난이 거칠고 혼란스럽다. 공동체주의라는 이름은 공동체(community)에서 왔고, 공동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과의 나눔, 어울림을 의미하는 라틴어 ‘콤무네(commune)’에서 왔다.

 

분명 필요하고 아름다운 말이다. common이라는 아름다운 말의 어원이기도 하다. 이렇듯 아름다운 말이 공산주의(communism)와도 어원을 공유해서인지 우리는 과도할 정도로 공동체주의적 발상까지도 곧바로 ‘공산주의’ ‘전체주의’라고 진저리치는 모양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들, 그리고 교황까지 모두 ‘과라니 공동체’를 용납하지 않았던 이유와 지금의 자본가와 권력자들이 ‘공동체주의적 대안’을 반기지 않는 이유는 똑같이 단순명료하다. “이익의 90%를 공동체 구성원들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하면 우리는 어쩌라고?”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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