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과 이어진 부실한 통신망은 이미 붕괴했다. 간간이 사선을 뚫고 흙먼지 뒤집어쓰고 돌아온 장군들은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절망적인 보고만 늘어놓는다. 그럼에도 모두들 막연히 무언가 극적인 반전反轉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들 자신도 모르는 눈치다. 우주의 기운이 모여 미국, 영국, 소련에 한날한시에 회복불능의 대재앙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히틀러가 지하총통실에서 회의를 소집한다. 수뇌부들은 그들이 메시아(Messiah)라고 떠받들어온 히틀러가 ‘어떻게 좀 해주리라’는 일말의 기대를 안고 히틀러만 바라본다. 그들은 메시아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다. 1950년대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빌프리트 다임(Wilfried Daim)은 히틀러와 나치 수뇌부가 히틀러를 ‘진짜 메시아’로 설정한 새로운 종교로 기독교를 대체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다고 폭로한다. ‘뉴 메시아’ 히틀러는 지하총통실에 소집한 나치 수뇌부에 유럽 전선 지도를 펼쳐놓고 자신이 예비해 둔 ‘기적’을 전한다. 그들의 메시아는 이미 궤멸돼 사라진 지 오래인 독일의 정예 전차부대와 사단 병력을 동원해 연합군을 일거에 궤멸하는 ‘기적의 작전’에 혼
영화 다운폴(Downfall·2014년)은 우리 관객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듯하다. 우선 할리우드가 아닌 독일 영화다. 감독도 독일인 올리버 히르슈비겔(Oliver Hirschbiegel)로 낯설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피부로 느꼈던 ‘태평양 전쟁’이 아니라 바다 건너 유럽에서 전개된 2차 세계대전 얘기여서 아무래도 관심도가 떨어진다. 꽤나 ‘명품 영화’로 평가받는 영화 다운폴이 우리나라에서 상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만큼 이 영화는 모든 게 생소하다. 익숙한 소재인 히틀러의 마지막 14일을 다뤘는데도 그렇다. 먼저 감독부터 이야기해보자. 히르슈비겔 감독은 1971년 전 세계를 경악시켰던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Stanford Prison Experiment)’ 사건을 영화화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善)함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인간은 너무나 쉽게 악(惡)에 빠지며, ‘평범화된 악’은 그것을 제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그의 관점은 베를린의 ‘히틀러 총통 방공호’ 속에서 벌어진 ‘히틀러의 마지막 14일’을 향한 관조(觀照)로 이어진 듯하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독일어 원제목 ‘Der Unterga
영화의 마무리는 뜻밖에도 아만다(줄리아 로버츠 분)의 13살짜리 딸 로즈가 담당한다. 영화 내내 말수도 적고 부모에게 순종적인 착하고 예쁘장한 여자아이다. 당시 최고 흥행 드라마였던 ‘프렌즈(Friends)’에 과몰입 현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또래 아이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면서도 왠지 조금은 독특한 아이다. 어른들이 모두 패닉 상태에 빠지는 재난 상황에서도 로즈는 무표정하고 감정의 동요도 없고 공포도 느끼지 않는 듯하다. 거의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모습이다. 그런데 영화 마지막에 로즈가 보여주는 그 ‘해탈’의 정체가 드러난다. 재난 상황에서 아만다와 클레이(에단 호크 분) 부부가 집주인 조지와 근심스러운 대화를 나눈다. ‘근처 어딘가에 누군가 재난에 대비한 시설과 준비를 해놓은 집이 있다’는 카더라 통신 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로즈가 무표정하게 그 대화를 듣고 있다. 다음날 로즈가 실종된다. 어른들의 대화에서 엿들은 ‘그 집’에 가면 혹시 드라마 프렌즈의 최종회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무 말 없이 ‘가출’해버린 것이다. 감독이 부각하는 로즈는 소위 ‘알파 세대(Generation Alpha·2010년 이후 출생자)’다. 사회학자들은 ‘디
아만다(줄리아 로버츠 분)와 집주인 조지(마허샬라 알리 분)는 ‘초연결 사회’의 붕괴가 점차 본격화하고 초연결 사회의 기본인 전력 공급까지 끊어져 캄캄한 집에서 촛불을 밝혀놓고 와인을 마신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얼핏 꽤나 낭만적으로 보인다. ‘촛불과 와인’이 연출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아만다와 조지도 상황의 심각함을 잠시 잊는다. 지금까지 각각 품었던 불신과 혐오, 불쾌감도 접어두고 제법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눈다. 촛불과 와인은 인간혐오자들의 방어기제까지도 느슨하게 해주는 미덕을 지녔다. 아만다는 ‘좋은 분위기’를 빌려 조지에게 그를 불신하고 무례하게 굴었던 것을 정식으로 사과한다. 조지도 아만다의 사과를 너그럽고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만다는 행복한 꿈을 꾸는 표정으로 “우리는 곧 이 상황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낙관적인 희망을 품는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같이 웃고 있던 조지의 표정이 순간 점점 굳어진다. 조지는 다시 재난상황에 어울리는 표정으로 돌아가 침통하게 대꾸한다. “아니다. 우리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만다와 조지는 똑같이 재난이라는 ‘사실(Fact)’을 겪고 있다. 그러나 곧 일상
영화 속에서 주인공 아만다(줄리아 로버츠 분)와 집주인인 조지의 딸 루스는 첫 만남에서부터 앙숙이다. ‘인간혐오자’들의 만남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흑인인 조지와 루스 부녀父女는 맨해튼의 모든 ‘연결’이 끊기고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하자 주말 이틀 동안 아만다 가족에게 임대한 롱아일랜드 자신의 전원주택을 찾아와 ‘하룻밤’을 부탁한다. 아만다는 조지와 루스 부녀를 보자마자 ‘흑인혐오증’까지 더해진 ‘인간혐오증’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점잖은 교양인이자 어느 정도 ‘박애 정신’을 함양한 조지는 아만다의 선 넘는 무도와 무례에도 끝까지 ‘젠틀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막 대학을 졸업하고도 질풍노도기를 아직 통과하지 못한 듯한 루스는 흑인이란 이유로 부당한 의심을 보내고 무례하게 구는 아만다에게 적의를 드러낸다. 교양 있는 아버지 조지가 겨우 달래서 하룻밤을 지낸다. 다음날 아침부터 아만다 못지않게 인간을 혐오하는 루스는 아만다에게 작심한 듯 무례한 태도와 말들을 쏟아낸다. 두 인간혐오자의 본격적인 충돌이 시작된다. 보기에 아슬아슬하다. 그러던 중, 초연결사회의 붕괴가 가속화하면서 아만다의 아들 아치의 두통과 구역질이 심해진다. 이빨까지 하나둘 빠지는 이상증세도 심
샘 에스마일 감독은 영화 속에 2명의 ‘인간혐오자’를 등장시킨다. 한명은 주인공인 아만다(줄리아 로버츠 분)이고 다른 한명은 대니(케빈 베이커 분)라는 인물이다. 감독이 인간을 혐오하는 둘을 영화 전면에 세운 까닭은 뭘까. 영화 속 아만다는 스스로 인간혐오자라고 커밍아웃하면서 인간을 사랑한다거나 인간을 혐오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을 모두 ‘가식 덩어리’쯤으로 매도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간혐오자는 대니라는 인물이다. 워낙 ‘인간’이 싫어서 큰 저택에 혼자 사는 대니는 초연결 사회의 돌발적인 붕괴사태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지만 ‘각자도생’의 원칙 아래 누구와도 자신의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비밀리에 지하실에 핵전쟁이 터져도 버틸 만한 벙커를 만든다. 아울러 1년쯤 버틸 수 있는 비상식량과 물자도 비축한다. 혐오스러운 인간들은 모두 죽든 말든 나만 살면 된다. 마침내 재앙이 닥치고 마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덮친다. 그후 아만다의 16살짜리 아들 아치가 극심한 두통과 구역질을 하고 멀쩡했던 이까지 하나둘 빠지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아만다 부부의 13살짜리 딸 로즈는 행방불명이 된다. 아만다 부부는 패닉 상태에 빠진다. 아만다는 로
‘세계의 심장부’라는 뉴욕시에서 불과 1시간 남짓 떨어진 부촌 롱아일랜드에 세상과의 모든 연결망이 단절되는 재앙이 덮치지만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무언가 심각한 사고가 터진 게 분명한데 통신 자체가 끊겼으니 무슨 영문인지 알 도리가 없고, 불안감만 가중된다. 그때 하늘에서 눈처럼 ‘삐라’가 쏟아진다. 알 수 없는 아랍어로 쓰인 단 한 줄은 ‘미국에 죽음을(Death to America)’이라는 구호다. 국적을 불문하고 미국에 원한 맺힌 모든 이슬람 국가에서 표준화된 실제 반미(反美) 구호다. 워낙 간결하고도 강렬해서인지 9·11 테러 이후 많은 미국인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구호다. 이 구호가 적힌 삐라를 받아든 아만다의 가족들과 마을 주민들은 마른침을 삼킨다. 9·11 테러의 재현을 예감한다. 이 구호의 기원은 1979년 테헤란 미국대사관 인질사태 때 미 대사관을 포위한 이란 군중이 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모든 반미 집회에서 ‘개회선언문’처럼 자리매김했다. 흥미로운 건 반미 선동 선봉에 섰던 당시 국가최고지도자 호메이니의 태도다. 명색이 성직자였던 그는 군중집회에서는 이 저주의 구호를 허용했지만 라디오나 TV 방송에선 금지했다. 어떤 이유로든지 누군
아만다(줄리아 로버츠 분)의 가족은 주말 휴양지에서 인터넷과 TV, 전화, 전기 등 모든 유·무선의 ‘연결’이 예고 없이 순식간에 끊어지는 충격적인 사태에 맞닥뜨린다. 이를 ‘미증유(未曾有)’의 사태쯤으로 느낀 사람들은 충격과 혼란 속에 빠져 갈피를 잡지 못한다. 미증유의 사태란 이전에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영화 속 인터넷망의 붕괴는 미국사회에 한번도 없었던 일일까. 크고 작은 IT망의 교란 내지 붕괴 사태는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끊임없이 발생한다. 크고 작은 사이버 테러 사건도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한번도 없었던 사건인 것처럼 여긴다. 2001년 나심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라는 미국의 통계학자가 ‘블랙 스완 이론(Black Swan Theory)’을 발표했다. 그 이후 블랙 스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금융 시스템의 붕괴현상을 이르는 말로 널리 사용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블랙 스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자신이 아직 보지 못했거나 예상치 못했던 것일 뿐, 매우 드물지만 나타날 수 있는 사태를 의미한다. 반면, 이미 한번쯤 경험했고 그것이 발생할 가능성이
아마도 미국을 혐오하는 어느 집단의 강력한 ‘전자기 펄스 폭탄(Electromagnetic Pulse Bomb)’ 공격쯤으로 짐작되는 테러를 당한 미국의 모든 인터넷 시스템이 붕괴된다. 전자기 폭탄의 충격은 인간들의 전자기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물에게 내재된 방향감각기능까지 교란한다. 미국 남부 마이애미에나 있어야 할 플라밍고들이 아만다(줄리아 로버츠 분)의 수영장에 날아와 옹색하게 헤엄치고, 북부산림 속에 있어야 할 사슴 가족이 아만다의 펜션을 기웃거린다. 아만다의 펜션에 처음 등장한 3마리의 사슴 가족은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아만다의 가족도 정원에 나타난 사슴 가족을 사랑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숨죽이고 바라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수가 수백 마리로 늘어난다. 진영을 갖춘 ‘사슴 집단’의 모습은 결코 사랑스럽지도 흐뭇하지도 않다. 그저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묘한 것은 사슴들의 ‘표정’도 처음 3마리였을 때와는 판이하단 점이다. 더 이상 조심스러워하지도 않고 인간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 표정들이 뻔뻔하고 흉흉하고 공격적으로 바뀌어있다. 사슴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순하고 겁먹은 듯한 커다란 눈망울은 ‘집단광기(collective
아만다(줄리아 로버츠 분)의 가족은 인터넷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연결고리’와 단절된다. 비행기가 해변에 추락하고, 수백대의 ‘자율주행’ 테슬라들이 공장에서 뛰쳐나와 한 방향으로 질주하다 꼬리를 물고 추돌한다. ‘연결’의 단절과 거기에서 비롯된 혼란은 인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연결이 끊기자 모든 게 혼란스럽다. 숲속에 있어야 할 사슴들마저 방향을 잃은 채 아만다의 펜션에 몰려든다. 플로리다에나 있어야 할 플라밍고 떼도 아만다의 수영장에서 어리둥절하게 헤엄친다. 급기야 하늘에서 아랍어로 ‘미국에게 죽음을’이라고 쓰인 ‘삐라’가 눈처럼 쏟아진다. 아만다 가족의 불안과 공포는 극에 달한다. 그들은 이 모든 사태가 9‧11 테러처럼 미국을 증오하는 세력이 감행한 공격이고, 미국 정부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 공포의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유리에 금이 갈 정도의 강하고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덮친다. 모두들 귀를 막고 쩔쩔맨다. 몇 초 만에 소리는 사라졌는데, 13세 아들 아치에게 심각한 후유증이 발생한다. 두통과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는 발작증세를 보이다 멀쩡했던 이까지 빠지기 시작한다. 어금니를 너무 꽉 물었던 모양이다. 에스마일 감독은 소위
롱아일랜드 휴양지에 도착한 아만다(줄리아 로버츠 분)의 가족은 주말 2일간 임대한 고급 펜션에서 외부세계와 모든 ‘연결’이 차단되는 예상치 못했던 재난사태를 맞이한다. 가뜩이나 불안한 아만다 부부 앞에 야심한 시각에 방문객이 찾아온다. 불안한 마음에 몽둥이까지 챙겨들고 문을 열어보니 웬 파티복 차림의 흑인 부녀였다. 그는 자신을 조지(George·마허샬라 알리 분)라고 소개한다. 아만다 부부는 처음 보는 얼굴과 처음 듣는 이름이다. 조지는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며, 온라인에서 임대계약을 한 ‘G.H’가 바로 자신이며 G.H.는 George Henry의 이니셜이었다고 설명한다. 자신은 맨해튼에 살고 있는데, 맨해튼 전체에 정전 사태가 벌어져 부득이 이곳으로 왔으니 부디 하룻밤 재워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 est)’라는 라틴 경구에 깊이 공감하는 ‘인간혐오자’ 아만다는 갑자기 나타난 ‘하얀 늑대’도 아닌 ‘검은 늑대’를 도저히 집으로 들일 수 없다. 인간을 혐오하는 아만다가 흑인을 혐오하지 않을 리 없다. 조지는 아만다의 의심을 풀어줄 요량으로 상황을 열심히 설명한다. 지금 입고 있는 이 파티복은 마침
뉴욕시 브루클린 지역에서 광고 마케터로 일하는 아만다(줄리아 로버츠 분)는 어느 토요일 새벽 충동적으로 가족들과의 주말 도시탈출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다. 남편 클레이(에단 호크 분)는 초행길임에도 내비게이션을 켜고 출근길처럼 익숙하게 운전한다. 내비게이션이 없었다면 조수석에 앉은 아만다는 지도를 펼쳐들고 길라잡이하느라 클레이보다 더 신경이 곤두섰겠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 없다. 그런 번잡한 일은 내비게이션에 맡기고 느긋하게 창밖의 신록을 만끽할 수 있다. 인터넷 ‘초연결 세상’의 은총이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남매 16살 아치와 13살 로즈는 각자 무릎에 태블릿 PC를 올려놓고 집에서와 똑같이 인터넷 세상에 빠져든다. 아마 롱아일랜드까지 가는 1시간가량에 인터넷이 끊긴다면 아치와 로즈 모두 아만다의 여행계획에 난색을 표했을 듯하다. 우리는 고속도로를 시속 100㎞ 속도로 달리면서도 인터넷이 연결되는 놀라운 세상에 살고 있다. 로즈는 당시(1994~2004년) 미국의 전설적인 인기 드라마 ‘프렌즈(Friends)’에 몰입하고 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아치가 인상을 쓰고 창문을 내리면서 아만다에게 ‘로즈가 방귀 뀌었다’고 고발한다. 로즈는 방귀 뀌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