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찾아와 자신의 ‘짝’을 만들어 달라고 대놓고 ‘말’을 하면서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그의 피조물인 괴물과의 관계가 파국을 맞는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와는 이 부분에서 결이 다르다. 아담의 외로워하는 모습을 본 하나님은 아담이 요구하지 않아도 ‘이브’를 만들어 ‘짝’을 이뤄주지만,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다르다. 영화 속 ‘괴물’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나는 너무 외롭고 비참하다. 그러니 짝을 만들어달라’고 읍소한다. 하지만 박사는 매몰차게 거부한다. 그 괴물이 짝을 이뤄 번식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과학자로서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괴물이 납득할 만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세상 밖으로 던져버린다. 여기에서 괴물의 분노가 폭발하고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증오하는 마음이 극한으로 치닫고 북극 끝까지라도 쫓아가 복수하겠다는 증오심을 불태운다. “네가 나를 사회에서 추방했으니, 나를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모두 파괴하겠다”고 선언한다. 괴물의 분노는 결혼도 안/못하고, 출산도 안/못하는 우리의 20ㆍ30대와도 닮았다. 짚신도 짝이 있다고 믿어왔던 우리네는 ‘짚신도 짚신’ 나름이라는 현실에 직면한다. 괴물은 짝을 찾을
독일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ㆍ1941년)」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책임의 무거움을 짚어준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는 ‘생명 창조’의 자유가 있다. 자신이 생명을 창조할 자유가 있으니 생명을 창조할 능력만 있으면 생명을 창조하면 된다. 그런데 그에겐 ‘책임 의식’ 따윈 없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연출한 리들리 스캇 감독은 전작 ‘프로메테우스(2012년)’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을 선보였다. 과학자 찰리와 인간이 창조한 안드로이드 데이비드(마이클 패스벤더 분)의 대화 한 토막이다. 안드로이드가 찰리 박사에게 묻는다. “인간은 왜 우리를 만들었지?” 찰리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왜? 우리가 만들 수 있으니까 만들었지.” 그는 자유에 따라야 하는 ‘책임’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들이 창조한 안드로이드와 눈높이를 맞춰야 할 책임을 소홀히 한 과학자들은 안드로이드 데이비드에게 몰살당한다.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낳을 자유도 있다고 마구 낳아서는 안 된다. 고통이 수반되는 양육의 책임이 따른다. 프랑켄슈타인 박사 역시 ‘생명 창조’의 성공에 따라올 부와 명성의 ‘보
자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한 분야에 탁월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덕후’ 스타일이다. 열정에 사로잡혀 무엇에 한번 꽂히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일로매진(一路邁進)한다. 도파민이 용솟음치고 끼니도 거르고 잠도 안 자지만 피곤한 줄도 모르고 ‘생명창조’의 ‘덕질’에 몰입한다. 어쩌면 마약 중독환자의 모습이다. 덕질은 대개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열정’이다. 도파민(Dopamine)이 뿜뿜 뿜어져 나온다. 그러나 ‘열정적’인 뜨거움은 대개 오래가지 않는다. 열정의 유효기간은 일반적으로 18개월에서 36개월이라고 한다. 그 뜨거운 열정이 진정된 뒤에도 그 곁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랑’의 감정일 듯하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 도파민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옥시토신(Oxytocin)’이 분비된다고 한다. 도파민은 마실수록 갈증을 느끼고 더 많은 것들을 욕망하게 만들지만, 옥시토신은 상대와 공감하고 눈높이를 맞추고 부족해도 괜찮다고 느끼게 한다. 도파민이 계속 뿜어져 열정이 진정되지 않는 것이 곧 ‘중독’이다. ‘Passion’이라는 말이 열정이라는 뜻과 ‘수난’이라는 뜻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 흥미롭다. 열정과 사랑의 차이다. 로버트 스턴버그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아마도 그 장르가 대개 ‘호러’이거나 ‘SF 판타지’로 분류되겠지만, 주제만 놓고보면 ‘치정극(癡情劇)’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치정이란 것이 꼭 남녀 사이에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라면,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장 처절한 치정극에 가깝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그야말로 ‘영끌’의 노력으로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탄생 과정까지는 새로운 생명체에게 열정과 사랑을 쏟아붓는다. 새로운 생명체와의 ‘관계’가 그의 기쁨과 삶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신이 탄생시킨 생명체의 ‘품질’에 실망하고 좌절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의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어주지도 않고, 지어준 이름이 없으니 당연히 불러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호칭이 애매한 사람을 꼭 불러야 할 때 대개 “저기요”라거나 “여보세요” 하거나 조금 만만하다 싶으면 “어이” 하기도 하는데,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괴물에게 그런 호칭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아예 ‘부르지(call)’ 않는다. 한 집에서 사는 반려동물들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외양간의 소에게도 모두 이름이 있는데 ‘괴물’에게는 도대체 이름조차 없다. 박사가 제3자에게 그 피조물을 말할 때는 어쩔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그의 창조물인 ‘괴물’은 서로 다른 ‘생명관(view of life)’을 놓고 부딪힌다. 흔히 문화나 이념, 종교의 차이만 해도 화해가 힘든 법인데 ‘관점(view)’이 다르다면 난감한 문제가 된다. 인생관, 세계관도 그렇지만 어쩌면 서로 다른 ‘생명관’은 더욱 합치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생명관은 대단히 근대적이고 기계적이다. 생명은 조작의 대상이며, 기술적으로 창조 가능한 현상으로 파악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생명관은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에 안 들거나 ‘보편적ㆍ실용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생명체는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명도 여느 ‘상품’과 마찬가지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의 창조한 생명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선 보기에 아름답지 못하고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다. 취소와 제거가 답이다. 그러나 생명을 바라보는 괴물의 관점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전혀 다르다. 생명은 사랑과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괴물은 자신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와의 관계 설정에 실패하고 사랑받지도 못한다. 결국 괴물은 “나는 사랑받지 못했기에 악해졌다”고 자신의
위대한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천신만고 끝에 창조한 피조물은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몰골도 흉측하고 무엇보다 ‘지적 능력’이 전혀 없어 보이는 ‘괴물’이다. 자신의 창조물에 실망한 박사는 결국 그 괴물을 스스로 부정하고 없애버리려 한다. 신(神)이 자신이 창조한 인간이 온갖 흉측한 짓들로 날 새는 줄도 모르자 차라리 홍수로 절멸(絶滅) 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프랑켄슈타인 박사도 괴물을 쇠사슬에 묶어 실험실에 가둔 채 실험실을 폭파해버린다. ‘위대한 인간’을 무력화하고 살아남은 ‘위대한 괴물’은 실험실을 탈출해 숲속 오두막에서 손녀와 사는 맹인 노인의 집에 숨어든다. 괴물은 그곳 헛간에 숨어 맹인 노인이 손녀에게 자상하게 글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서 말과 글을 깨친다. 괴물에게 지적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의 교육 방식이 틀려먹었던 것이다. 노인이 세상을 등지고 숲속에 홀로 숨어사는 사연은 밝히지 않지만 그의 방대하고 수준 높은 서가(書架) 목록을 보면 아마도 상당히 교육받은 노인인 듯하다. 괴물은 그중에서도 퍼시 비시 셸리의 시 ‘오지만디아스(Ozymandias)’를 펼쳐들고 그중에 한 구절을 감격적으로 읽는다. ◆ 영화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판소리 ‘춘향가’에서 가장 극적인 모습은 아무래도 이도령이 “암행어사 출두요”를 외치면서 탐관 변학도의 뻑적지근한 생일연회장에 들이닥쳐 변학도를 응징하고 춘향이를 구해내는 장면이겠다. 그러나 가장 ‘감동적인’ 대사 한마디를 꼽으라면 아마 춘향이의 모친인 퇴기 ‘월매(月梅)’의 대사일 듯하다. “이렇게 된 마당에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오(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는가).” 수청을 거부하다 곤장을 맞고 사경을 헤매는 춘향이를 구해줄 마지막 희망이던 이도령이 과거에 낙방하고 거지 꼴로 돌아온 모습에 낙심하던 월매가 이내 냉정을 되찾고 내뱉은 말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자신의 피조물과 벌이는 처절한 비극을 보노라면 어쩔 수 없이 월매가 내뱉는 수원수구라는 한마디가 먼저 떠오른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월매만큼만 인간적으로 성숙했다면 아마도 그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도령이 낙방하고 싶어 낙방한 것도 아니고, 굳이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원망의 화살을 돌리려 한다면 이도령을 사위로 맞아들인 자신의 ‘선구안’을 탓할 수밖에 없다. 프랑켄슈타인 박사 역시 자신의 창조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수원수구’의 자세로 당연히 자신의 ‘실력 부족’을 탓해야
“창조주여, 제가 간청했나이까? 흙으로 저를 빚어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제가 읍소라도 했나이까? 어둠 속에서 끌어내 달라고?(Did I request thee, Maker, from my lay to mould me Man? Did I solicit thee from darkness to promote me?)” 존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Paradise Lost)」에 나오는 이 구절은 메리 셸리(Mary Shelleyㆍ1797~1851년)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초판본 표지에 마치 소설의 부제(副題)처럼 박혀 있는 ‘제사(題詞, 책의 첫머리에 그 책과 관계되는 노래나 시를 적은 글)’다. 「실낙원」 10권에서 등장하는 지옥에 떨어진 인류의 조상 아담(Adam)의 절규이기도 하다. 이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창조주가 금지한 선악과를 먹고 지옥에 떨어진 아담이 절망과 고통 속에서 내뱉는 비명이다. 자신의 존재와 가혹한 운명을 한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겨우 그까짓 선악과 하나 따먹었다고 ‘믿거라’ 했던 창조주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원망과 억울함의 호소 같기도 하다. ‘프랑켄슈타인’에 사용된 이 제사는 존재의 원치 않은 탄생, 창조자(Maker
존 루스(커트 러셀 분)가 워런 소령(새무얼 잭슨 분)의 신원 확인 절차를 마치고 마차에 동승을 허락하면서, 자신이 호송 중이던 데이지에게 워런을 소개한다. 미국인들은 워낙 사교적이라 그런지 상대방이 모르는 사람이 있다 싶으면 거의 본능적으로 ‘소개’를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개를 한다. 워런 소령이 모자챙을 조금 들어 인사를 한다. 현상수배범인 데이지에게도 ‘문명인’답게 최대한 예의를 갖춘다. 그러자 마차에 앉아있던 데이지가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안녕, 깜둥이(Hi, Nigger)”라고 답례한다. ‘Nigger’라는 말은 요즘도 점잖은 사람들은 차마 입에 담기 어려워 ‘N-word’로 순화해서 옮기는 혐오 표현이다. 워런 소령은 백인들의 그런 혐오 표현에 이미 익숙한지 그저 저능아처럼 웃어 보인다. 사회적 약자는 혐오를 감내해야 한다. 혐오가 혐오스러운 장면이다. 남북전쟁 당시 흑인이 소령까지 진급했다면 최고로 출세한 흑인이다. 그러나 데이지 같은 가장 ‘저렴’한 백인도 자신이 최고의 흑인보다 서열이 높다고 믿는다. 소개가 끝나고, 루스가 워런 소령에게 마차에 동승할 것을 허락하자, 데이지는 현상수배범 주제에 “나더러 깜둥이(nigger)와 동승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영화에서 설정한 무대장치인 ‘미니의 잡화점’은 평범하지만 특이하다. 영화의 90%가량을 이 좁은 잡화점에서 촬영한다. 얼핏 협소하고 폐쇄된 배심원실에서 모든 장면을 촬영한 헨리 폰다 주연의 클래식 영화 ‘12인의 분노한 사람들(12 Angry Menㆍ1957년)’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70㎜ 영화라고 하면 대개 스펙터클한 영화를 기대하지만, 좁아터진 잡화점에서 일관하는 ‘헤이트풀 8’은 전혀 스펙터클하지 않다. 대신 70㎜ 필름 덕분에 좁은 잡화점의 구석구석까지 ‘원 샷’으로 잡으면서 디테일한 장치들이 현장감 있게 전달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 좁은 잡화점에서의 2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와이오밍주(州) 허허벌판에 자리 잡은 미니의 잡화점에 살인적인 눈폭풍을 피하기 위해 서로 목적이 다른 ‘헤이트풀’한 악당들이 모여든다. 흑인과 백인, 멕시칸이 서로 혐오하고, 현상수배범과 현상금 사냥꾼이 서로를 죽일 기회만 엿본다. 당연히 누구도 원치 않지만 피할 수도 없는 딱한 상황이다. 눈폭풍이 지나갈 때까지는 불편한 동거를 감내하는 수밖에 없다. 최소한 상대방이 먼저 총을 뽑아들기 전까지는 적당히 자신의 본모습과 속마음을 감추고,
현상금 사냥꾼 존 루스(커트 러셀 분)가 생포한 현상수배범은 현상금 1만 달러가 걸린 ‘미친 데이지(Crazy Daisy)’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악명 높은 ‘여자 무법자’다. 크레이지 데이지라는 라임이 훌륭하다. 결과론적이지만 이 ‘미친 데이지’는 존 루스가 아무리 현상금에 욕심이 나도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될 현상수배범이다. 물불 안 가리는 ‘미친 악당’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다. 더욱이 미친 데이지는 와이오밍주州를 무대로 도적질을 하고 다니는 ‘미친 5인조 갱단’ 도밍그레이(Domingray)파의 부두목이다. 미친 데이지 뒤에는 ‘미친 도밍그레이파’가 있으니 현상금 1만 달러에 목숨 걸지 않은 다음에야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지나가야 할 수배범이다. 예상대로 도밍그레이 갱단의 나머지 4명의 미친 무법자들이 미리 ‘미니의 잡화점’에 들이닥쳐 주인과 식솔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루스가 호송하는 미친 데이지를 구출하기 위해 기다린다. 도밍그레이파는 두목인 조디(채닝 테이텀 분)를 비롯한 5인조 갱단이다. 타란티노 감독이 갱단을 5인조로 설정한 것이 흥미롭다. ‘5’라는 숫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균형과 완성을 상징하는 숫자다. 아마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손가락이 5
현상금 사냥꾼 존 루스(커트 러셀 분)가 1만 달러 현상금이 걸린 데이지를 붙잡아 베테랑 마부가 모는 호화로운 육두마차를 전세 내어 황량한 와이오밍주 벌판에 몰아치는 눈폭풍을 뚫고 달리고 있다. 그 정도면 제아무리 사나운 눈폭풍도 두렵지 않다. 루스는 안락한 마차 좌석에서 느긋하게 설원(雪原)을 감상한다. 그러나 마차는커녕 늙어빠진 말도 없는 ‘뚜벅이’들에게 눈폭풍은 곧 죽음이다. 루스의 마차 앞에 ‘뚜벅이’ 여행자 워런 소령(새무얼 잭슨 분)이 기차선로에 서서 기차를 막아서듯 루스의 마차를 세우고 동승을 구걸한다. 현상금 사냥꾼 루스가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일 리는 없다. 보통사람일 뿐이다. 본래 모든 경전(經典)들은 보통사람들은 아마도 영원히 지킬 수 없는 덕목들만을 골라서 요구한다. 그래서 모든 경전들은 수천년이 흘러도 여전히 용도 폐기되지 않는다. 당연히 루스 역시 곤경에 처한 ‘흑인 이웃’을 적극적으로 구해 줄 마음이 있을 리 없다. 루스는 이 의심스러운 ‘설원의 뚜벅이’에게 대포만 한 장총을 겨누고 길을 비키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쏘아버릴 기세다. 마차를 얻어 타야만 하는 워런 소령은 ‘아부 모드’로 일관한다. 시종 ‘모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