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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5)
유난히 관계 중시하는 우리 민족
관계 중시한다고 잘 유지되지 않아
인간 관계 끊는 초연결사회의 민낯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아마도 그 장르가 대개 ‘호러’이거나 ‘SF 판타지’로 분류되겠지만, 주제만 놓고보면 ‘치정극(癡情劇)’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치정이란 것이 꼭 남녀 사이에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라면,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장 처절한 치정극에 가깝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그야말로 ‘영끌’의 노력으로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탄생 과정까지는 새로운 생명체에게 열정과 사랑을 쏟아붓는다. 새로운 생명체와의 ‘관계’가 그의 기쁨과 삶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신이 탄생시킨 생명체의 ‘품질’에 실망하고 좌절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의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어주지도 않고, 지어준 이름이 없으니 당연히 불러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호칭이 애매한 사람을 꼭 불러야 할 때 대개 “저기요”라거나 “여보세요” 하거나 조금 만만하다 싶으면 “어이” 하기도 하는데,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괴물에게 그런 호칭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아예 ‘부르지(call)’ 않는다.

한 집에서 사는 반려동물들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외양간의 소에게도 모두 이름이 있는데 ‘괴물’에게는 도대체 이름조차 없다. 박사가 제3자에게 그 피조물을 말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그 생명체(the creature)’라고 지칭할 뿐이다.

괴물은 분명 이 영화의 주인공인데, 주인공에게 이름이 없는 대단히 특이한 영화이다. 어쩌면 주인공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창조자에게 이름도 없이 ‘그것’으로 불리는 생명은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 괴물은 태어난 지 채 100일도 지나기 전에 철이 든다.

◆ 사랑 충동 파괴 충동 


창조자로서 자신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하고 분노한다. 괴물은 거의 ‘타노스’급의 압도적인 ‘피지컬’로 처절한 응징과 복수에 나선다. 마치 쇄빙선처럼 북극의 얼음을 깨부숴가면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추격한다. 그렇게 영화는 한편의 괴기스러운 치정극으로 치닫는다.

거의 성자(聖者)의 행적을 보여줬던 존경할 만한 오스트리아의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ㆍ1878~1965년)는 인간이 세상과 맺는 근본적으로 다른 2가지 관계를 설명한다. 책의 제목 자체가 「나와 너(I and Thouㆍ1923년)」이다.

‘나-그것(Ichi-Es): 상대를 대상, 도구ㆍ수단으로 대하는 관계 맺기’ 그리고 ‘나-너(Ichi-Du): 나와 같은 인격체와의 관계 맺기’가 그것이다. 괴물은 자신과 프랑켄슈타인 박사와의 관계가 ‘나-너’의 그것이기를 갈망하지만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괴물과의 관계를 철저히 ‘나-그것’으로 규정한다. 
 

 

혹시 한국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김춘수(1922~2004년)의 시 ‘꽃’이 마르틴 부버의 ‘관계 철학’에서 영감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상대를 ‘그것(Es)’으로 대할 때 나는 ‘관리자’가 되지만, 그것을 ‘너(Du)’라고 부를 때 비로소 너도 나도 인간(꽃)이 된다. 마르틴 부버가 격식을 갖춘 2인칭 존칭인 ‘Sie(당신)’가 아닌 친한 2인칭인 ‘Du’를 사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괴물이 갈망했던 관계다. 마르틴 부버의 ‘관계철학’은 “모든 참된 삶은 만남(관계 맺기)이다(Alles wirkliche Leben ist Begegnung)”라는 한마디 명제로 압축된다. 그 ‘참된 만남’이라는 것은 나와 너로서의 만남이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너이고 싶었고 꽃이고 싶었지만, 박사는 그 생명체를 끝까지 그것(Es)으로 규정한다. 관계의 파탄과 비극의 시작과 종말이다.

유난히 관계 중시하는 민족 

 

우리는 유난히 관계를 중시하는 민족이라고 한다. ‘꽌시(관계)’라는 말이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암호로 작동하는 중국사회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몇년 전 발표된 어떤 사회지표조사에 꽤 인상적인 결과가 기억에 남는다.

전체의 60%가량이 “자신이 느끼는 기쁨과 행복은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답하는데, 동시에 약 60%가 “관계 때문에 고통스럽고 불행하다”고 이야기한다. 말 그대로 관계 때문에 살고 관계 때문에 죽는다. 

관계를 중시한다고 관계가 잘 유지되는 건 아니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순결에 집착한다고 더욱 순결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맺는 관계들이 ‘나-너’의 참된 관계가 되면 그 관계가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조금이라도 삐끗하면서 ‘나-그것’의 관계가 되는 순간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괴물의 관계처럼 지옥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사결과인 듯하다.

프로이트는 「쾌락원칙 너머에 있는 것(Beyond the Pleasure Principleㆍ1920년)」에서 우리가 찬미하는 ‘사랑(Eros)’의 충동에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파괴(Thanatos)’의 충동이 혼재한다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아마도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 폭력’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이 프로이트의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결합이론’일 듯하다. 
 

 

‘에로스’는 말 그대로 생명의 창조와 기쁨, 그리고 생명 유지의 본능이고 ‘타나토스’는 죽음과 파괴의 본능이다. 에로스를 관계 맺기의 본능이라고 한다면 타나토스는 관계 끊기의 본능이다. 아마도 마블 영화에 우주최강의 빌런으로 등장해서 뜬금없이 지구를 파괴하고 인류 제거의 욕망에 몸부림치는 ‘타노스’의 이름도 타나토스에서 차용한 듯싶다.

얼마 전, 어느 신문이 많은 젊은 사람들이 ‘관계 맺기’를 꺼리거나 두려워하고, 중년들조차 새로운 관계를 맺기보다 기왕의 관계마저 끊으려 하는 새로운 세태를 조명한다. 아마도 모두 그 관계들이 인간적인 나-너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대를 도구화하는 나-그것의 관계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거나, 우리가 맺는 관계들이 ‘에로스적’이지 못하고 ‘타나토스적’이 돼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초기 불경 숫타니파타(Sutta-nipata)에 이르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씀은 구도자(求道者)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인 줄 알았더니 어느새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 돼버린 듯하니 딱한 일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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