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춘향가’에서 가장 극적인 모습은 아무래도 이도령이 “암행어사 출두요”를 외치면서 탐관 변학도의 뻑적지근한 생일연회장에 들이닥쳐 변학도를 응징하고 춘향이를 구해내는 장면이겠다. 그러나 가장 ‘감동적인’ 대사 한마디를 꼽으라면 아마 춘향이의 모친인 퇴기 ‘월매(月梅)’의 대사일 듯하다.
“이렇게 된 마당에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오(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는가).” 수청을 거부하다 곤장을 맞고 사경을 헤매는 춘향이를 구해줄 마지막 희망이던 이도령이 과거에 낙방하고 거지 꼴로 돌아온 모습에 낙심하던 월매가 이내 냉정을 되찾고 내뱉은 말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자신의 피조물과 벌이는 처절한 비극을 보노라면 어쩔 수 없이 월매가 내뱉는 수원수구라는 한마디가 먼저 떠오른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월매만큼만 인간적으로 성숙했다면 아마도 그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도령이 낙방하고 싶어 낙방한 것도 아니고, 굳이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원망의 화살을 돌리려 한다면 이도령을 사위로 맞아들인 자신의 ‘선구안’을 탓할 수밖에 없다. 프랑켄슈타인 박사 역시 자신의 창조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수원수구’의 자세로 당연히 자신의 ‘실력 부족’을 탓해야 마땅할 텐데 엉뚱하게도 피조물을 탓하고 미워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재주는 뛰어나지만 그다지 지성(知性)이나 덕성(德性)을 갖춘 인물은 아닌 듯 보인다. 한마디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승박덕(才勝薄德)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도 프랑켄슈타인보다는 동생 윌리엄을 편애하고, 과학계 동료들도 그를 가까이하기 꺼리고 그가 가진 재주조차도 온전히 인정하지 않는다.
◆ 월매와 프랑켄슈타인의 다른 점
그들을 탓할 일만은 아닌 듯하다. 공자가 ‘천재불용(天才不用)’이라는 말로 덕(德) 없이 재주만 뛰어난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 멀리하라 했다는데, 어쩌면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여기에 해당하는지도 모르겠다.
공자의 가르침은 대개는 맞는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경우에도 맞는 듯하다. 재승박덕해 보이는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연구에 몰두하는데, 그 의도가 ‘사랑’으로 보이지는 않고, 오직 ‘인정욕구’와 ‘공명심’으로 일관한다.
뛰어난 재주는 있으나 덕이 없는 이 연구의 결과물은 아무에게도 의미 없거나 혹은 재앙이 되는 ‘괴물’의 탄생이다. 그러나 괴물로 태어난 자신의 창조물을 대하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일관된 ‘재승박덕’함이 불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된다.
우선 그 흉측한 몰골에 실망한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더 절망하게 만든 건 이 괴물의 형편없는 학습능력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말을 가르쳐도 이 괴물의 언어능력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름인 ‘빅터(Victor)’ 단 한마디에서 멈춘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기의 아버지가 자기에게 그랬듯이 학대와 매를 드는 스파르타식 교육까지 동원하지만 괴물의 학습 진도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자식)을 불 질러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다.
괴물의 분노는 어쩌면 당연하다. 괴물은 자신의 흉측한 외모에 사과를 해야 마땅할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오히려 모든 원망과 비난을 쏟아붓자 자신의 창조자(어버이)를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자신을 괴물로 세상에 내놓은 책임을 물으려 든다.
‘계엄령 발포 1주년(12월 3일)’을 맞아 당시 집권당이었던 야당에서 ‘대국민 사과’를 둘러싸고 설왕설래하더니 마침내 당대표가 ‘사과문’이라는 것을 발표했다는데, 그 사과문을 ‘한 줄 요약’하자면 대강 이런 모양이다. “비상계엄으로 국민께 불편을 끼쳐 미안하다. 그러나 계엄은 민주당이 야기한 국정마비 때문이었다.”
‘계몽령 시즌2’ 같기도 하고, 사과문인지 변명문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괴물 같은 사과문이다. ‘Apology’라는 말이 사과로도 번역되고 변명으로도 번역되는 것을 보면 사과와 변명은 원래 자웅동체이거나 그 경계가 모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끔 사과를 한다면서 변명만 늘어놓아 상대의 부아를 돋우는 것도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 비상계엄 1년, 사과하지 않는 세력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지적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그 지적을 절대 인정하려들지 않는 사람을 ‘방어적(Defensive)’이라고 점잖게 표현한다. 심리분석학의 개척자라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ㆍ1856~1939년)가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명명한 현상을 연구한 기록이 흥미롭다.
프로이트 특유의 개념인 자아(ego), 원초아(id), 초자아(superego) 등을 이리저리 엮어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결국은 외부세계와의 갈등과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적 요구가 ‘방어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는 게 핵심이다.
대내외적인 갈등이나 불안상태에서 그 ‘방어기제’라는 것이 작동하면 “그럴 리가 없다”고 현실을 아예 통째로 부정해버리기도 하고, 여우의 ‘신 포도’처럼 현실을 왜곡해서 받아들이기도 하고, “어쩔 수가 없었다”고 자기합리화에 몰두하기도 하고,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남 탓’으로 돌려버리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이런 방어기제의 발동을 미성숙한 인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렇다고 자기를 지키기 위해 발동되는 ‘방어기제’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성숙한 인간은 방어기제를 이타적(利他的) 행위나 유머로 승화시키기도 하고 예술로 승화시킨다고도 한다. 프로이트의 해석이 맞는다면 야당의 계엄 사과문을 보면 우리네 정치가 미성숙하고 우리네 정치인들의 인격이 미성숙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그 사과문 아닌 변명문에 아무런 유머도, 이타적 자세도 없고, 전혀 예술적이지도 않은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우습지만은 않은 오래된 우스갯소리 하나. ‘아’ 발음이 안 되는 ‘문제’를 지닌 어느 신병이 입대해서 처음으로 보초 근무를 섰다. 그날 암호는 ‘고구마’. 보초근무 교대를 위해 초소에 다가가자 초병이 암호를 대라고 한다. 자신있게 ‘고구미’라고 암호를 댄다. 초병이 다시 물어도 더욱 똑똑히 ‘고구미’라고 답한다.
그러자 초병이 총을 발사한다. 총에 맞은 이 신병은 “이… 김진기?(아… 감잔가?)”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많은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모두가 아는 본인의 문제를 본인만 모르거나 문제의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기도 한다. 그래서 남 탓이 넘쳐나고 사과 대신 변명만 난무하게 되는 모양이다. 모두 월매만 같아라.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