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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5)

영화의 남녀 주인공은 분명 괴팍한 소설가 멜빈 유달과 식당 웨이트리스 캐롤 코넬리다. 하지만 영화의 전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조그만 강아지 버델도 만만치 않다. 이 강아지는 영화의 포스터에도 잭 니콜슨과 함께 당당히 투톱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이 ‘무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심상치 않다.

 

 

버델은 유달과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사는 게이 화가 사이먼 비숍의 반려견이다.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젊은 화가의 반려견이니 서로가 죽고 못 사는 사이일 것 같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비숍은 버델에 죽고 못 살지만, 버델은 딱히 그렇지도 않다. 상당히 쿨하고 주인과 거리를 둔다.

 

어느 날 비숍이 강도를 만나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고 입원해 있는 동안 유달이 임시로 맡아 돌본다. 지독한 위생 결벽증이 있는 유달과 털북숭이 강아지 버델은 예상외로 궁합이 잘 맞는다. 유달과 산책할 때면 유달처럼 보도블록 경계를 절대 밟지 않는 강박증도 닮았다. 버델을 돌보면서 유달의 글쓰기도 일사천리도 나간다. 사실 이 견종은 브뤼셀 그리폰(Griffon Bruxellois)이다.

 

유난히 까칠하고 사람을 잘 따르지 않고 ‘사회성’이 결여된 견종이라 어릴 때 훈련을 잘 시켜야 반려견 구실을 하는 견종으로 알려져 있다. 유달은 자기를 빼닮아 항상 거리를 두고 ‘비사회적’이지만 묘하게 창작을 자극하는 버델이라는 뮤즈(muse)를 제대로 만난 셈이다.

 

여전히 몰골은 만신창이지만 일단 퇴원부터 한 비숍이 귀가한 날 버델도 원주인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버델은 자기를 닮은 유달을 졸졸 따르고 유달의 피아노 연주를 그리워하고 비숍에게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비숍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버델은 화가 비숍에게 단순한 반려견이 아닌 뮤즈였다. 뮤즈를 상실한 순간 예술가 비숍의 예술혼도 사라지고 만다. 비숍의 뮤즈가 유달의 뮤즈가 돼버린 셈이다. 

 

 

뮤즈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가 아홉 밤을 함께 지내면서 낳은 9명의 여신들로, 이들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과 예술을 관장한다. 뮤즈는 중세 이래 작가를 포함한 모든 예술가에게 창조의 영감을 제공하는 존재를 일컫는 말이 됐다. 이런 면에서 뮤즈 9명의 어머니가 ‘기억의 여신’이라는 설정이 흥미롭다. 뮤즈란 관찰자로 하여금 기억의 창고 속에 잠들어 있던 무엇인가를 깨워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비숍은 어마어마한 병원비로 파산 지경에 내몰리지만, 자신의 뮤즈였던 버델이 자신에게서 멀어졌다는 상실감에 비하면 파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비숍은 모든 창작 의지마저 상실한 채 자포자기 상태가 된다.

 

단테의 뮤즈 베아트리체, 니체와 릴케, 프로이트의 공동 뮤즈였던 루 살로메, 앤디 워홀의 뮤즈였다는 에디 세즈윅, 쇼팽의 뮤즈로 알려진 조르주 상드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작가와 예술가들의 뮤즈들은 모두 상당히 지적知的이고 독립적이고 개성 넘치는 여성들이었던 모양이다. 

 

워낙 개성 넘치고 자유분방하다 보니 다분히 ‘악녀’의 면모도 보이는 인물들이다. 공통적으로 ‘남성 편력’도 심하고 요즘 시각으로 보면 ‘전투적 페미’의 모습도 보인다. 「개미」의 작가로 유명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리스 신화 속 9명의 뮤즈에 1명을 더해 영화를 관장하는 여신으로 마릴린 먼로를 올려놓는다. 마릴린 먼로의 삶 역시 근현대의 유명한 뮤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버델이라는 강아지 ‘뮤즈’를 잃고 황망해하던 비숍은 유달, 캐롤과 함께 떠난 볼티모어 여행에서 자신의 새로운 뮤즈 캐롤을 발견한다. 버델처럼 도도하고 까칠하고 독립심 강하고 할 말은 하는 여자다. 캐롤의 누드 스케치를 하면서 창작 욕구가 뿜뿜 솟구친다. 파산과 ‘게이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외면이라는 현실의 상처와 고통을 모두 날려버리고 다시 작품에 몰두한다.

 

유달과 비숍 두 창작자들은 캐롤과 버델이라는 두 까칠한 뮤즈들을 니체와 릴케, 프로이트가 루 살로메라는 뮤즈를 공유했듯이 사이좋게 공유한다. 아마도 ‘다행히’ 비숍이 게이라서 가능한 해피엔딩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제목처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이다. 

 

요즘 ‘페미’ 논쟁이 ‘여혐’ ‘남혐’으로 번져 궤도를 이탈한 열차처럼 시끄럽더니 정치인들까지 가세해 더욱 어지럽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많은 논쟁의 주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조금은 ‘튀는’ 여성들의 언행에 사회적 분위기가 이토록 예민했다면 위대한 작품들에 영감을 불어넣어 줬던 수많은 역사적 뮤즈의 탄생도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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