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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테넷 (1)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최신작 ‘테넷(Tenet)’은 공상과학영화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철학영화라고 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어쩌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전작 ‘메멘토’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나 테넷을 통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시간과 운명’이라는 주제는 철학적 명제에 가까워 보인다. 테넷에 굳이 장르의 이름표를 붙여야 한다면 ‘철학 공상과학 영화’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인셉션에서는 ‘꿈속의 세계에서는 현실보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다루고, 인터스텔라에서는 ‘나’의 시간과 ‘상대’의 시간의 속도가 다르게 흘러가는 모습을 그린다.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온 아직도 젊은 주인공은 100살이 다 된 딸의 임종을 지켜봐야 한다. 덩케르크에서는 1주일, 1일, 1시간이라는 제각각 다른 시간의 단위들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느 순간 하나로 만나는 모습을 포착해낸다. 

 

그리고 마침내 테넷에서 놀란 감독은 그 시간이라는 것의 흐름을 빠르고 느림 정도의 ‘상대성’이 아니라 아예 거꾸로 돌려 보기로 한다. 많은 철학자가 수많은 질문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이 ‘신’의 존재를 묻는 질문이라면, 놀란 감독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가장 본질적 질문은 ‘시간’이라는 존재인 듯하다. 

 

많은 사람은 신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관장한다고 믿지만, 놀란 감독의 세계관 속에서는 시간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관장한다. 이 세상에 하나의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영화 도입부 오페라 하우스에서 보여주는 정사각형의 석판은 놀란 감독이 테넷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하는 ‘시간의 철학’을 함축한다. 4가지 방향으로 읽을 수 있는 이 라틴어 석판은 잉글랜드와 폼페이 로마 유적 성벽에서 발견된 실제 유물이다.

 

 

“씨 뿌리는 아레포는 수레를 조심스럽게 잡는다(ROTAS OPERA TENET AREPO SATOR)”는 뜬금없는 문장으로 번역된다. [※참고 : 로타스는 수레바퀴, 오페라는 조심하여, 테넷은 붙들다, 아레포는 지명이름, 사토르는 씨 뿌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석판의 자모들을 다시 배열하면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아버지, 나를 깨끗이 하여 주옵소서(Oro Te Pater, Oro Te Pater, Sanas)”로 읽힌다고 한다. 이는 기독교도들이 박해받던 초기 로마시대에 기독교도들이 서로를 확인하기 위한 은밀한 ‘암호’로 사용됐다. 그 이후엔 액운을 막기 위한 소박한 민간의 부적쯤으로 널리 퍼졌다고 한다.

 

석판 속에 나오는 세이토(SATOR)는 영화 속에서 인류를 파괴하려는 조직의 우두머리의 이름으로, 아레포(AREPO)는 고야의 그림을 위조한 사람의 이름으로, 로타스(ROTAS)는 노르웨이 오슬로 증권회사 이름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영화 제목인 테넷(TENET)이 자리잡고 있다. 가로로 읽어도 세로로 읽어도 테넷(TENET)으로 읽히는 ‘회문(Pallindrome)’이다. 석판 가운데 TENET이라는 ‘회문’은 십자가 형상이다. 여기서 테넷은 ‘변치 않는 교리’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듯하다. 

 

십자가의 변치 않는 교리는 바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을 거꾸로 돌려도 변치 않는 것이다. 놀란 감독은 이 고대의 석판으로 자신의 운명론적인 세계관을 표현한다.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 쿠퍼는 딸에게 여자 이름으로는 대단히 생뚱맞은 ‘머피’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머피의 법칙’에서 따온 이름이다. 다분히 운명론적인 시각이다. 놀란 감독은 ‘머피’라는 이름으로 이미 정해진 운명은 피할 수 없듯이 정해져 있는 지구의 종말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놀란 감독의 운명론은 테넷에서는 한발 더 나아간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라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제목 TENET을 바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똑같듯이, 시간을 거꾸로 돌려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바꿀 수 없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 난감하거나 절망적인 상황에 봉착하면 ‘시간을 그때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이라는 소망을 해보곤 한다. 그리고 같은 잘못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러나 ‘일어날 일은 일어난 일이다’는 말처럼 인간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은 잘못들은 끊임없이 반복되곤 한다. 반성과 회개도 끝없이 되풀이될 뿐이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후회막급했던 시간에 다시 데려다줘도 그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 난데없이 유명인들의 ‘학폭’ 미투로 시끄럽다. 가해자들은 모두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못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새사람이 되겠다고 한다. 아마도 가해자 모두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이라는 한탄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고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또다시 ‘일어날’ 뿐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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