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능력이 좋은 사람들은 상대방을 감싸고 보듬어준다. 하지만 상대방의 아픈 곳을 잘 후벼 파는 사람들도 공감능력이 뛰어나다. 남이 아파하는 걸 공감해야 남의 아픈 곳을 찌를 수 있어서다. 문제는 공감능력을 후자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사회가 시끄러워진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어떨까.
멜빈 유달(잭 니콜슨)은 ‘잘나가는’ 소설가다. 그것도 로맨스 소설 작가다. 그렇다면 유달은 당연히 뛰어난 공감능력의 소유자라야 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미묘한 ‘사랑’ 감정을 정교하게 다루지 못한다면 로맨스 소설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고,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사실 영화에서 멜빈 유달이 벌이는 행각을 언뜻 보면 ‘공감능력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유달의 공감능력은 소설가답게 뛰어난 편이다.
지정석이 있는 것도 아닌 일반 식당에서 매일 자신이 앉는 자리를 고집하다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먼저 온 손님을 쫓아내고 기어이 자기 자리를 차지한다. 이 과정에서도 유달은 자신의 뛰어난 공감능력을 십분 발휘한다. 유달은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에 앉아있는 커플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직접 요청하지 않는다. 대신 그 옆을 서성이며 구시렁거려 그 커플들이 스스로 불편해서 식당을 나가버리게 한다. 역시 로맨스 소설 베스트셀러 작가다운 뛰어난 공감능력이다.
마침내 자기 자리를 탈환하고 집에서 가져온 플라스틱 포크와 나이프를 늘어놓는 유달에게 영문 모르는 웨이트리스가 한마디 하자 상관하지 말라고 냅다 고함을 지른다. 유달의 ‘만행’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식당 지배인이 유달에게 단호하게 레드카드를 꺼낸다. 주심에게 레드카드를 받고 그라운드에서 쫓겨나는 유달을 향해 관중이 일제히 야유와 환호를 보낸다.
유달의 공감능력이 정말 제로였다면 지배인이 자신에게 왜 퇴장을 명령했는지, 그리고 쫓겨나는 자신을 향해 식당손님들이 왜 그토록 환호와 야유를 보내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지배인의 퇴장명령을 거부하고 경찰이라도 불렀음 직하다. 또한 ‘부당하게’ 식당을 쫓겨나는 자신을 향해 야유를 퍼붓는 손님들 사이를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지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야유하는 식당 손님 중 만만한 놈 하나 멱살이라도 잡았을 일이다.
그러나 유달은 자신의 행동에 격분한 지배인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고, 쫓겨나는 자신에게 야유를 퍼붓는 손님들의 마음도 백번 ‘공감’한다. 그래서 지배인에게 ‘얌전히 먹고 가겠다’며 사정을 하고, 야유하는 손님들에게는 맥없이 손을 한번 들어보이고 식당에서 퇴출당하는 수모를 수용한다.
영화 속 식당 시퀀스에서 공감능력이 뛰어난 인물들은 유달과 유달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식당을 떠난 커플들뿐이다. 그 커플은 유달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유달이 자신들의 자리에 앉고 싶어 한다는 것을 ‘공감’하고 유달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식당을 떠나는 공감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배인이나 웨이트리스, 그리고 손님들은 유달이 왜 그런 ‘기행’을 벌이는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상상하고 공감하지 못한다. 당연히 유달에게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공감능력 뛰어난 유달은 화내지 않고 공감능력 떨어지는 그들의 화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유달의 이웃 게이 화가 비숍은 강도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수주간 병원에 입원했다 돌아왔는데, 그사이에 반려견 버델은 자신을 까맣게 잊고 임시주인이었던 이웃집 유달을 더 따른다. 당연히 비숍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유달은 비숍의 상실감 또한 십분 공감한다. 유달은 자신을 졸졸 따르는 강아지 버델에게 비숍한테 가라고 온갖 방법으로 눈치를 준다. 공감능력이 없는 것은 오히려 비숍 같다.
유달은 그렇게 공감능력이 출중하면서도 걸핏하면 상대에게 ‘독설’을 쏟아내어 상대를 기겁하게 만들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독설’ 역시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재주다. 독설은 상대가 가장 아파할 만한 ‘감정’을 후벼 파는 재주다. 상대가 아파할 감정선을 헤아리지 못하면 독설 역시 날카롭지 못하고 둔탁할 수밖에 없겠다. 베스트셀러 작가답게 상상력과 공감능력이 탁월한 유달의 독설은 상대가 혼비백산하고 턱이 덜덜 떨리고 미치고 펄쩍 뛰게 할 정도로 탁월하다.
사회가 다양화하고 파편화하면서 ‘공감’의 문제가 여기저기서 제기된다. 유난히 ‘공감’을 표제어로 하는 출판물들도 많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공감의 부재’는 아닌 듯하다. 인터넷 댓글들이나 정치인들 사이에 오가는 ‘험한 말’들을 보면 이들의 공감능력은 충분해 보인다. 다만 상대가 아파할 것들에 대한 공감능력만 출중한 듯하다.
아프게 하고 싶은 상대를 아프게 하는 것도 분명 공감능력이겠다. 아프게 하고 싶은 상대를 아프게 할 수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공감의 부재’가 아니다. 공감능력 뛰어난 사람들이 상대를 감싸고 보듬어 주는 ‘좋은 공감능력’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상대를 후벼 파는 ‘나쁜 공감능력’만 남았다는 것이 문제인 듯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