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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테넷 (5)

고대사회를 지배한 변수 중 하나는 ‘무당의 한마디’였다. 중세사회에선 ‘천국의 예언’이 사람들의 삶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현대에도 미래의 예언자들이 있다. 과학자, 기술기업, 그리고 언론이다. 이들의 예언은 통찰력이나 비전이란 이름으로 대체되곤 한다.

 

 

시간을 오가는 ‘타임머신’ 영화는 대개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바꾸어버리는 상상을 담는데, ‘테넷’은 특이하게도 미래로 넘어가 현재를 바꾸는 상상을 담는다. 역사학자 E.H. 카(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정의한다. 

 

과거에 일어난 ‘사실’은 박제처럼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역사가나 혹은 현재의 특정한 필요에 의해 현대인들의 생각과 관점으로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중국의 거친 ‘동북공정(東北工程)’이 그렇고 말썽 많은 하버드대학 램지어 교수라는 사람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그렇다. 고구려 연개소문이 1000년 후에 갑자기 중국인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일본에 끌려갔던 위안부가 갑자기 몸을 판 여자로 재규정되기도 한다. 

 

참으로 고약한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현재가 과거를 재구성하고 새로운 과거를 창조해 내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는 그렇게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인 셈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로가 서로를 바꿔 나간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테넷’에서 현재와 과거의 대화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대화를 담는다. 통상적으로 ‘현재’는 ‘미래’를 향해 수많은 메시지와 정보를 전달한다. 박물관의 유물들과 수많은 도서관의 장서들이 모두 ‘미래’를 향해 발신되는 ‘현재’의 메시지와 정보들이다. 아마도 미래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듣고 볼 것이다. 

 

그러나 ‘현재’를 사는 우리들은 ‘미래’에서 발신되는 메시지와 정보들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전작 ‘인터스텔라’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현재의 우리가 미래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고, 미래를 바꿔 현재를 바꾸는 꿈을 꾼다.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사후’의 미래를 알 수 없다. 자신의 내일, 10년 후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어서 미래와 단절돼 있는 것일까. 영화에서처럼 굳이 어떤 영웅이 ‘타임캡슐’에 들어가 미래를 조작하고 모든 사물에 ‘인버전’ 기술을 입혀야만 미래가 현재를 바꿀 수 있는 것일까.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미래는 항상 우리의 현재에 영향을 미쳐왔고, 미래가 현재에 미치는 힘은 점점 강력해지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던 미래를 ‘예언’하는 힘이 그것이다. 맥스 더블린(Max Dublin)은 그 힘을 아예 ‘예언의 독재(The Tyranny of Prophecy)’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고대사회에서 어느 마을에 새로운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믿을 만한’ 무당의 한마디면 한 마을이 도륙당하는 것은 다반사다. 중세시대는 ‘천국의 예언’이 모든 사회를 규정한다. 모든 사람이 짓지도 않은 죄를 씻어주고 천국에 가도록 해준다는 교황청의 ‘면죄부’를 사기 위해 현재의 모든 가치를 포기하기도 한다. 

 

그렇게 인간들은 끊임없이 미래와 대화를 해왔고 미래는 끊임없이 현재의 인간을 지배해왔다. 꼭 고대사회나 중세의 ‘암흑시대’가 아니어도 1992년 10월 28일 밤 12시에 대한민국에서 ‘선택받은 자’들만이 몸이 공중으로 떠올라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던 ‘휴거소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많은 사람이 ‘미래의 예언’에 따라 현재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모두 모여 몸이 하늘로 올라가기만을 기다렸다. 10월 28일에 천국에 들기 위해서는 아이가 없어야 한다는 ‘말씀’에 따라 낙태를 선택한 임신부도 있었고, 외아들을 정신병원에 감금한 아빠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예언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고대사회와 중세시대의 미래 예언자(prophecy)들이 무당이나 혹은 교황이었다면 현대사회에선 과학자, 기술기업, 그리고 언론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듯하다.

 

 

이들이 인공지능(AI), 안드로이드, 화성 식민지 등등 미래를 독점적으로 예언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학교에서 직장에서 자신들의 삶을 그 예언에 맞춰놓고 미래와 대화하며 살아간다. 고대시대 사막의 예언자들의 사자후가 사람들의 삶을 지배했듯, 이제 거대기업과 과학기술자들이 독점적으로 예언하는 미래가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중세시대 교황청이 설파하는 ‘천국’의 예언과도 같이 강력하다.

 

미래에 대한 다른 의제(agenda)들은 과연 없는 것일까. 미래의 또다른 대화상대는 없는 것일까. 안드로이드 인간이 과연 꼭 필요한 것일지, 지구라도 온전히 잘 지키는 것이 화성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것보다 나을지에 대한 논의는 사라진다. 그야말로 ‘예언의 독재’다. 예언의 독재는 통찰력이나 비전이란 이름으로 대체되곤 한다.

 

많은 사람이 천국에 가보지도 못한 이들이 말하는 천국을 믿듯이, 화성에 살아보지 않은 예언의 독재자 일론 머스크가 말하는 ‘화성 식민지’에서의 삶을 신뢰하는 이들이 많다. 면죄부를 사듯이 일론 머스크의 예언에 그들은 자신들의 오늘을 투자한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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