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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미나리 (1)

정이삭 감독의 화제작 ‘미나리’는 사실 감독부터 주연배우들까지 모두 생소하다. 오히려 ‘Plan B’라는 제작사 이름이 브래드 피트 이름값에 힘입어서인지 익숙한 편이다. 영화 출연진 중에 그나마 눈에 익은 이름은 조연으로 이름을 올린 윤여정뿐이다.

 

 

‘미나리’는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로 알려진, 미국에 이민 온 한 가정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 그렇듯 그저 조금은 답답하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하다. 호화 캐스팅에 어마어마한 물량을 투입해서 때려부수는 블록버스터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독립영화’ 같기도 한 ‘미나리’는 조금은 따분하기도 할 듯하다.

 

그럼에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윤여정에게 여우조연상까지 안겨줬다. 외국 관객들에겐 무명에 가까운 감독과 배우들이 200만 달러란 저예산으로 이뤄낸 대단한 성과다. 당연히 무엇이 수많은 영화제와 아카데미상 수상 위원회의 마음을 훔쳤을지 궁금해진다.

 

‘미나리’는 어느 한국인 이민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배우들만 한국인일 뿐, 그들이 만들어 나가고 풀어 나가는 문제들의 모습은 딱히 ‘한국적’이라기보다는 세계보편적이다. 한국인 가정이 보여주는 어쩌면 다분히 ‘미국적’인 모습들이 한국 관객들에게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묘한 배신감을 느끼게도 하지만, 서구 관객들에게는 오히려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겠다.

 

제이콥과 그의 아내 모니카는 아칸소주의 한적한 시골마을 닭농장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한다. 1시간에 평균 1000마리의 갓 부화한 병아리의 암수를 분류해내는 참으로 묘한 직업이다. 

 

부화한 지 30시간 이내의 작은 병아리의 항문을 손끝 촉감으로 느껴서 암수를 구분하는 직업이다. 저렇게 크고 투박한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이나 휴대전화 자판을 누르는 것도 묘기처럼 보이는 서양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손재주 좋고 손끝 감각이 좋다는 한국인이 전세계 병아리 감별사 60%를 점하고 있다고 한다.

 

 

부부가 닭 농장으로 출근하면 오갈 데가 마땅치 않은 5살짜리 아들 데이비드도 엄마 아빠의 일터에 따라가 병아리 감별 건물 주변을 맴돌며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병아리 감별만 10년 가까이 한 제이콥은 빛의 속도로 수컷 병아리들을 골라내고 말년병장 같은 여유 넘치고 권태로운 모습으로 건물 밖으로 나와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한대 피워 문다. 아들 데이비드가 별로 반가운 기색도 없이 제이콥 곁에 다가와 앉는다.

 

부자 간의 특별히 살가운 스킨십이나 대화, 눈빛은 없다. 대신 제이콥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데이비드에게 계속 연기를 뿜어대고 있는 건물의 높다란 굴뚝을 가리키며 저게 뭔지 아냐고 묻는다. 5살짜리 꼬마가 알 턱이 없다. 제이콥은 대단한 철학자처럼 담배 연기를 뿜으며 굴뚝 연기의 ‘정체’를 데이비드에게 알려준다.

 

키워봤자 알도 못 낳고 암컷만큼 살도 오르지 않고 맛도 없는 수컷 병아리들은 태어난 지 30시간 만에 노동력을 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처럼 가스실에서 살처분돼 소각장에서 연기로 사라진다.

 

제이콥은 5살짜리 아들에게 소각장 연기의 ‘교훈’을 자못 진지하게 설파한다. “저거 봐라. 쓸모없으면 저렇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너도 쓸모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교육 헌장’이다. 5살짜리 아들에게 바람직한 가르침인지 당황스럽다.

 

영화의 배경은 1980년 초반 미국이다. 소련(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하고 무자비한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바람이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하던 레이건 대통령 시대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무자비한 경쟁과 양극화 시대의 태동기였던 셈이다. 

 

 

병아리 감별사 제이콥은 ‘경쟁력’ 없는 수컷 병아리들을 찾아내 소각하는 작업을 하면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토인 ‘살아남으려면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눈치채고, 그 소중한 가르침을 데이비드에게 일러줬는지도 모르겠다.

 

쓸모없으면 무자비하게 폐기되는 게 어디 병아리뿐이겠는가. 병아리들이 태어난 지 30시간 이전에 감별사 앞에 서야 하듯, 우리도 대개 태어나서 30년 가까워지면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내가 쓸모 있는 인간인지 감별사들에게 판정을 받아야 한다. 모든 감별사들이 나를 쓸모없다고 판정을 내리면 그것은 곧 병아리 같은 죽음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유난히 많이 듣게 되는 ‘인재(人材)’라는 말이 참으로 듣기 거북하다. 사람이 어찌 나무처럼 ‘재목’ 취급을 받아야 할까. 사람을 어찌 나무처럼 어딘가에 ‘쓸 만한 재목’이면 다듬어서 쓰고, 아니면 잡목 불쏘시개로 아궁이에 처넣어버려도 좋은 존재일까. 영화 속에서 쓸모없다고 감별당한 수컷 병아리들의 운명이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운명과 같아 씁쓸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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