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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아포칼립토 (6)

영화 ‘아포칼립토’에 등장하는 인디언의 이름은 소박하고 정겹다. 주인공은 ‘표범 발’이고 그의 아버지는 ‘단단한 하늘’이며 주인공의 외동아들은 ‘달리는 거북’이다. 주인공은 이름 그대로 뜀박질이 일품이다. ‘표범 발’의 아들은 ‘달리는 거북’이다. 꼼지락거리며 노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아버지 ‘단단한 하늘’은 차돌멩이처럼 작지만 다부지다.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인디언 이름은 케빈 코스트너가 감독·주연을 맡았던 영화의 제목 ‘늑대와 함께 춤을’일 듯하다. 평원에서 외롭게 늑대 한 마리를 벗 삼아 지내는 주인공을 멀리서 지켜보던 인디언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인디언들은 자연과 영혼을 두려워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달과 함께 걷다’도 있고, ‘숨죽인 천둥’도 있고, ‘수다스러운 개구리’ ‘심장을 노리는 독수리’도 있다. 서구의 ‘마이클’이니 ‘제임스’니 하는 개인적인 특성과 의미도 없는 무미건조한 이름들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동명이인이 생길 가능성도 훨씬 낮을 듯하다.

 

노예상인들의 습격을 받은 ‘표범 발’의 부락은 쑥대밭이 되고, ‘표범 발’의 아버지는 현장에서 살해당한다. 노예상인들에게 노인은 돈이 안 된다. ‘표범 발’은 만삭의 아내와 아들 ‘달리는 거북’을 우물 속에 숨겨두고 죽기 살기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폭포절벽에 다다른 ‘표범 발’은 번지점프하듯 강물 속으로 뛰어내린다.

 

급류 속을 헤쳐 나온 ‘표범 발’은 절벽 위에서 황당해하는 노예상인들을 올려다보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친다. “나의 아버지는 ‘단단한 하늘’이고 숲속 사냥꾼이다. 나는 ‘표범 발’이고 나도 숲속 사냥꾼이다. 나의 아들도 나의 뒤를 이어 숲속에서 사냥을 할 것이다.”

 

 

그 긴박하고 험악한 상황에서 무척이나 뜬금없이 들리는 ‘자기소개’다. 그러나 이것은 인디언식 ‘자기소개’라고 한다. 1500년대 유럽에서 남미로 진출한 초기 지배자들은 그들과 교류하는 토착 인디언들의 자기소개에 당황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스페인 사람이 이름을 물어보면 이들은 자신의 7대조 할아버지 이름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말하곤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나의 7대조 할아버지는 ‘달과 함께 걷다’이며, 그의 아들은 ‘숨죽인 천둥’이고, 그의 아들은 ‘수다스러운 개구리’다. 또 그의 아들은 ‘심장을 노리는 독수리’이고 그의 아들은 ‘새벽의 야생마’이며, 그의 아들은 ‘살찐 황소’다. 그의 아들은 ‘단단한 하늘’이고 나는 ‘단단한 하늘’의 아들인 ‘표범 발’이다” 이런 식이었던 모양이다.

 

절벽에서 강물로 뛰어든 ‘표범 발’은 경황이 없어서 노예상인들에게 자기 아버지 ‘단단한 하늘’까지만 약식으로 소개한 듯하다. 그들에게 ‘시간’이란 현재의 한순간이 아니었다. 과거 200년과 미래의 200년까지 400여년을 ‘한순간’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놀라울 정도로 긴 호흡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6대조 할아버지들까지 자신의 뿌리로 찬미했는데, 인디언들은 한술 더 떠서 7대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쁘고 성질 급한 스페인 사람들 속 터지게 하는 ‘자기소개’ 방식이었던 모양이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와 다윗의 계보처럼 장황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마야인들이 스페인에게 빼앗긴 것이 어디 땅뿐이겠는가. 빼앗겼던 땅은 되찾을 수 있지만 그들이 빼앗긴 이름과 그 이름들에 담긴 정신은 되찾지 못한다. ‘달과 함께 걷다’와 ‘수다스러운 개구리’ ‘숨죽인 천둥’들이 오늘은 그저 아무런 의미 없는 ‘호세’ ‘미구엘’ ‘헤수스’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아무도 자신의 명함에 7대조 할아버지 이름까지 빼곡히 인쇄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행히 일본으로부터 땅도 되찾고 이름도 되찾았지만, 6대조까지 기억할 정도의 긴 호흡은 잃어버린 듯하다. 요즘은 6대조는 고사하고 조부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고 부모 제사도 번거로워한다. 하루를 15분 단위로 끊어 살아야 하는 현대생활에서 시간을 과거 200년 미래 200년을 묶어 호흡하기란 진정 어려운 모양이다. 점점 짧아져만 가고 ‘지금’만이 중요해진 이 시대의 호흡은 참으로 많은 것을 버리고 또 파괴하는 듯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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