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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가을의전설 (5)

‘가을의 전설’에는 곰이 3번 등장한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신 스틸러’다. 곰으로 시작해 곰으로 끝난다. ‘한칼’의 내레이션에 의하면 15살 되던 해 트리스탄은 자신의 운명을 찾겠다고 느닷없이 야밤에 숲속에 찾아들어가 잠자는 곰을 깨워 맞짱을 뜬다. 교실에서 낮잠 자고 있는 학교의 ‘짱’을 깨워 한판 뜨자고 하는 ‘중2병’ 걸린 15살 소년의 모습이다.

 

 

트리스탄은 가슴에 상처를 입지만, 대신 곰 발톱을 하나 뽑아버린다. 눈 비비고 일어나 비몽사몽 중에 발톱을 뽑힌 곰이 어이없어서 고개를 저으며 숲속으로 사라짐으로써 결투는 트리스탄의 승리로 끝난다. 곰이 잘했다. ‘중2’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성인이 된 트리스탄은 어느날 사냥에 나섰다가 곰을 발견하고 총을 겨누지만, 이내 총을 거둬들이고 곰은 숲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트리스탄은 아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주류밀매업자와 부패한 경찰관을 찾아 복수하고, 자신을 체포하러 온 경찰들까지 일망타진하고 홀연히 목장을 떠나 종적을 감춘다. 내레이터인 인디언 ‘한칼’이 트리스탄의 최후를 전한다. “모두들 트리스탄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대로 트리스탄과 부딪친 모든 것들은 죽어갔지만, 트리스탄은 오래 살았다. 트리스탄은 60세가 넘어 캐나다 산림 어느 곳에서 곰과 싸우다 죽었다. 그것은 ‘좋은 죽음(good death)’이었다.”

 

‘한칼’에게 인디언 ‘홈 스쿨링’을 받은 15살 트리스탄은 왜 잠자는 곰을 깨워 맞짱 뜨려 했을까. 성인이 된 트리스탄은 왜 곰에게 향했던 총구를 거둬들였을까. 노인이 된 트리스탄이 칼을 빼들고 곰과 싸우다 맞이한 최후를 ‘한칼’은 왜 ‘좋은 죽음’이라고 했을까. 많은 북방계 민족들이 곰을 숭배하지만, 아메리카 인디언의 곰 숭배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은 각별하다. 그들은 생명체와 무생명체를 가릴 것 없이 삼라만상(森羅萬象)에 모두 영혼과 정령(精靈)이 깃들어 있다고 믿지만, 그중에서도 곰은 최고의 정령이 깃든 신성한 존재다.

 

곰은 사람과 가장 흡사하게 먹으며, 사람과 같이 두발로도 걷고, 새끼 사랑이 사람처럼 극진하다. 더욱 감탄스러운 건 곰은 인간을 압도하는 막강한 힘을 지녔으면서도 호랑이나 사자처럼 사납고 난폭한 약탈자가 아니란 점이다. 결정적으로 사람은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저 ‘피안(彼岸)의 세계’를 곰은 자유롭게 오간다. 곰은 죽음(동면)에서 ‘부활’하는 경이로운 존재다.

 

 

15살 트리스탄은 성년식을 치르듯 곰을 찾아 ‘맞짱’ 뜸으로써 곰의 정령을 받고, 곰으로부터 용맹한 전사임을 인정받으려 한다. 성년이 돼 사냥에 나선 트리스탄은 곰에게 겨눴던 총구를 거둔다. 곰은 감히 사냥의 대상이 아니다. 사냥할 것이 있고 사냥해선 안 될 것이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트리스탄 ‘할아버지’는 총이 아닌 칼을 들고 곰과 싸우다 최후를 맞는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곰이 트리스탄을 저승으로 인도한다. 최고의 죽음이다.

 

그것이 ‘미신’이든 ‘애니미즘’이든 ‘토테미즘’이든 여러 가지 이름의 ‘종교’든, 어느 시대나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무의식적인 가치가 ‘신앙’이다. 어느 시대에나 어떤 형태로든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불안하고 마음 붙일 곳이 없어 살아가기 어렵다. 인류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은 삼라만상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원시적인 애니미즘이 다신교로 이어지고, 다신교는 다시 계층화되면서 일신교로 이어진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현대 문명은 ‘경제’와 ‘발전’이라는 ‘신앙’이 지배한다. 애니미즘이든 다신교든 일신교든 모든 신앙의 대상이 ‘경제’와 ‘발전’에 그 자리를 내어주는 듯하다. 인생의 목적은 경제적 욕망을 달성하는 것이 돼간다. 현대 물질문명은 욕망과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통해 소비적이고 파괴적인 심성을 키워간다. 정말 우리 주변의 삼라만상 모두에 정령이 깃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믿는다면 최소한 지금처럼 물질적 욕망을 앞세워 무분별하게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진 않았을 듯하다.

 

인간의 끝을 모르는 욕망 탓에 지구 오존층에 구멍이 뚫리고, 북극 얼음이 모두 녹아내리며, 시베리아가 열대지방처럼 펄펄 끓어오르는 지금.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은 어쩌면 일론 머스크가 그랬던 것처럼 ‘지구는 수명을 다해가니 화성에 식민지를 건설해 집단 이주하자’는 해법보단 자연의 삼라만상을 모두 외경畏敬하는 ‘원시 애니미즘’일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바이러스 기세가 여전히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모두들 ‘경제’가 무너질까봐 엄격한 방역통제도 망설인다. ‘경제’야말로 무너져서는 안 될 현대사회의 ‘신전(神殿)’이다.

 

수많은 우상(偶像)을 섬기는 신전이 있어왔지만, ‘위대한’ 현대사회는 ‘경제’라는 새로운 우상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사회가 된 듯하다. 정치인, 학자, 예술인, 의사에 종교인들까지 모두 ‘경제의 신전’에 몰려들어 ‘돈’을 갈구하고 찬미한다. 곰을 두려워하고 섬겼던 인디언의 애니미즘이 원시적이고 야만적이었다고 한다면, 과연 지금 ‘경제’를 두려워하고 섬기는 우리는 그보다 덜 야만적으로 살고 있는 걸까.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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