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은 최남단 항구도시 모슬포 출신의 젊은 작가로 2023년 제49회 제주특별자치도미술대전 대상 작가이다.
2024년 3월 20일부터 4월 8일까지 서울 인사아트센터내 제주갤러리에서 유화작품 22점으로 김산 초대개인전 ‘염원’을 선보이고 있다.
화가 김산은 제주대학교에 미술학과에 출강하고 있으며 현재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2010년 대학 2학년 때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9회의 개인전과 70여 회의 초대전·단체전에 참가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신진 작가 발굴 프로그램인 ‘젊은 모색 2021’에 선정된 바 있는 유망작가이며, 2024년 3월 이중섭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함께 열고 있다.
이번 서울 제주갤러리 초대전 ‘염원’은 작가가 죽음의 문턱에서 느꼈던 삶의 소중함에 대한 염원(念願)을 통해, 생명의 근원은 자연이며, 자연과 사람이 서로 교감해야만 상생공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자각에는 고향에서 느꼈던 ‘본향(本鄕)’에 대한 깊은 애정의 결과이며, 본향은 제주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써 거기에서 나오는 ‘본향의식’이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의 본질이라는 것을 작품마다 진득하게 담고 있다.
지나온 시간의 흔적을 찾아서
최근 김산의 그림은 신비한 기운으로 싸여 있다. 고전적인 영성(靈性)의 느낌이랄까, 울창한 숲에서 나오는 청량(淸涼)한 화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기운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림은 삶의 반영되기에 화가의 삶에 그 궁금증이 더해진다.
김산의 고향은 가파도와 마라도로 가는 뱃길의 작은 항구 도시 최남단 모슬포이다. 이 모슬포가 속한 대정읍은 과거 외세의 질곡(桎梏)의 역사가 스민 아픈 땅으로, 여전히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곳이다.
대정읍은 옛 대정현 지역으로 말만 들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의 알 정도로, 동계 정온과 추사 김정희 등 정치적인 이유로 많은 이들이 유배를 왔고, 1901년 신축민중항쟁의 장두 이재수의 고장이며, 황사영의 아내이자 천주교인 정 마리아의 슬픈 묘역이 있는 곳이다.
모슬포의 해안은 조선시대 왜구들의 침범이 잦았고, 그 앞을 흐르는 구로시오(黑潮) 해류는 동인도회사 하멜을 비롯하여, 중국, 필리핀, 베트남, 일본 오키나와, 규슈 지역의 어민들을 데리고 오고, 반대로 제주민을 그 곳으로 데려가 이어도의 희망을 품게 했다.
현대사에서는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알뜨르 비행장이 있었고, 일본군이 패망하여 떠나자 미군이 다시 관여하면서, 한국전쟁 때 육군 제1훈련소가 만들어지고, 중국군 포로수용소 등 피난민을 포함한 군사기지촌이 되었다. 전후에는 미군부대 맥라브 기지를 만들어 휴양지라는 이름으로 운영했으며, 지금은 미군으로부터 한국 공군에게 이관된 모슬봉 레이더기지가 동북아시아를 감시하고 있다.
김산의 증조부는 4·3항쟁에 연루돼 6·25때 예비검속으로 구금된 후 섯알오름에서 희생돼 백조일손(百祖一孫)에 묻혔다. 당 조모(祖母)는 해녀(잠녀)로 일생을 보내며 본향당에서 바다의 공포를 이겨냈었다.
김산의 그림에는 그의 가계(家系)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김산의 작품은 마치 리트머스(litmus)지(紙) 처럼 자신의 가족사와 제주사가 중첩되면서 4·3, 굿, 폭낭, 본향의 의미들을 해석한 것이다. 김산의 독특한 성장배경과 맞닿아 있다고나 할까.
‘사회적 풍경’이나 ‘백록’의 주제는 그 가족사의 확장이며, 사실적인 묘사 방식을 지향하는 것도 그런 역사 인식과 장소 경험을 반영한 것이고, 초현실적인 관점을 비치는 것도 낭만주의적인 이상향의 시각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모 세대의 역사와 시대정신을 MZ세대로 횡단하여 재해석 하고 있는 것이다.
김산은 대학생 신분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어릴 적에 시골 고향(모슬포)에서 해녀 할머니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자란 것을 계기로 김산은 2010년 대학 2년을 마치고, 할머니의 바다를 주제로 삼아 '어머니의 바다'전을 이중섭 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서 끝마치고 군 입대를 했다. 이때 해녀 할머니의 일생에 관심을 가지고, 해녀굿, 물질, 해녀들의 바다이야기를 그릴 수 있었다.
제대후 대학을 졸업하면서 폭낭(팽나무)의 생명력에 매료돼 한동안 볼펜으로 흑백작업과 아크릴릭 칼라 작업을 했다. 그 후 곶(자왈)에 시선을 돌려 곶이 풍기는 원시적인 느낌을 받고 식물의 관찰을 통해서 자연생태에도 마치 인간처럼 삶과 죽음이 엄연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시골 고향이 전해주는 본향(本鄕:마을수호신)의 의미가 매우 강렬해서 이후 폭낭, 사회적 풍경, 백록, 곶(자왈)의 주제에 상징성을 되살릴 수 있었다. 사회적 풍경에는 다시 산담과 4·3의 동굴, 두 할머니(성할머니와 처할머니)의 초상, 숲이 등장했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버스정류장, 동자석 같이 기억상실된 일상의 풍경에도 눈을 돌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21'에 선정 작가가 돼 부스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작품은 경험에서 얻은 삶의 형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한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는 대상인데도 어떤 때는 크게, 어떤 때는 작게 보인다“고 했다. 이때 대상은 사물이거나 풍경 아니면 물체일 것이며,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스스로 삶의 경험에 대한 느낌, 보는 방법에 따라 그렇게 보이게 된다. 또 대상은 색채의 시각적인 변화에 의해서 물체의 확장과 축소, 공간 거리에 따라 대기 원근의 음영적 빛의 작용에도 영향이 미친다.
결국 다빈치는 "경험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경험을 중시 여겼다. 그는 “감각을 통과하지 않는 정신적 행위는 모두 공허하다”라고 할 정도로 감각적 경험을 최선으로 여겼다. 경험은 시간을 전제로 하여 자신의 삶을 깊이 있고, 익숙하게 만든다. 곧 인생이 경험 자체인 것이다. 생명체인 인간은 모든 삶의 정보가 이 경험에서 나오므로, 누구나 공간에 대한 지각 경험은 다르겠지만 어느 누구도 그 경험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화가의 경험은 자신의 사회적 환경에 따라 인상적으로 강렬하게 남은 것들이 작품의 주제 담론이 되는 것이다.
하나의 인상(印象)은 지각되는 순간 경험으로 남고, 그 인상에 대한 느낌들이 몸의 기억인 관념이 된다. 우리는 온갖 시각적 관념 속에서 살아가며 응고된 이념의 그물에 둘러져 있어 볼 것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념으로 둘러싸인 마음은 흔들리기도 하지만 견고하게 고착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상상적 관념은 실재의 환영(幻影)처럼 꿈과 같이 사실주의로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것은 회화가 단지 현실의 재현적인 모방이 아닌, 사실적이지만 비현실적인 상징, 즉 가상현실의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시각은 지각으로써 마음을 움직인다. 오래 전 내면에 쌓인 무의식에서, 외부적 사건, 상황에 따라 동요하는 현실의 감정까지 오감 지각은 항상 유동(流動)하는 감정을 일으킨다. 예술은 바로 이 몸의 경험적 느낌의 결과이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는 "작품은 하나의 경험"이며, 사실상 "예술은 작품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정신"이라고 하여, 오로지 작품 속에 화가의 정신세계가 있으며, "예술의 목표 자체가 예술"이라고 말한다.
폴 발레리(Paul Valéry, 1875~1945)는 “화가는 평생을 다하여 회화를 찾는다. 그때 평생(삶 전체)은 그 목표도 수단도 확실치 않은 창작에 대한 탐구”를 하게 되는데, 그 창작은 “불확실성과 절대적 열정만이 있는 탐구”라고 말하고 있어 기약없는 예술의 길을 말하고 있다.
사실,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놀이 문화에서 유래한다. 요한 하위징아(Huizinga, Johan, 1872~1945)의 말처럼 문명사회의 예술은 신화와 의례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예술도 놀이라는 원초적인 토양에서 자양분을 받고 있다.
현대인의 마음에 자리하는 신화적 상상력은 우리들의 오래된 원초성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신비, 성스러움, 고고함에 대한 그 과거의 우러름은 오늘날은 게시(揭示)의 가치가 되고 있다.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데 한 화가의 경험은 멀게는 이론적으로 얻어지고, 가깝게는 생활 속에서 획득된다.
우리는 마을길에서, 또는 숲길에서 수많은 사물들과 만난다. 부드러운 바람을 스쳐가고 고개를 내민 나뭇가지를 건드리며 투박한 돌담을 돌아서 먼 산을 마주한다. 돌길, 습지, 밭담, 새, 구름, 나비, 나무, 넝쿨, 이웃의 풍경, 사람들을 바라본다.
경험하는 것, 즉 살아가는 것은 바라봄의 연속이며 스쳐감의 경로이기에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지나가는 것들도 있다. 이것을 우리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인생에선 매순간 삶의 아름다움과 고통, 기쁨과 좌절이 기다리고 있으며, 충만함과 억울함, 또 보람과 희망, 분노와 평안이 교차하거나 뒤섞인다.
흔히 사물들 간 스치고, 지나가고, 만나는 것을 관계라고 하는데 어떤 관계는 신중하고 어떤 관계는 의미 없이 잊힌다. 어떤 관계에선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혹은 어떤 만남에서는 타자의 실체를 깨닫기도 한다. 언제나 삶은 자신을 속이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결국 인생은 자신의 문제들을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과정인 것이다.
사물자체는 세계 전체이며 사물들은 고유한 속성이 있다. 이를 테면 숲에서는 나무와 풀, 서식하는 동물이 중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공간에서 중심이 된다는 것은 보는 자의 시선의 선택이다. 지정된 사물들에서 그것들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장소의 현장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거기의 사물들의 속성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소에는 인간의 시선 방향에 따라 빛나는 존재들이 있다. 하나의 공간에서 빛나는 존재들은 무엇이나 될 수 있지만 그것의 선택은 오로지 화가의 영혼에서 할 일이다. 예술은 사물의 이미지를 강렬한 인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숲과 같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일 수도, 오래된 시간 너머 백록같이 과거의 존재자를 불러올 수도 있다. 예술은 무엇이든 소환할 수 있으며 상상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술은 작품으로부터 규정되어야만 한다. 작품을 보면 화가의 정신세계가 보이고 자신의 ‘존재 드러냄’이 보이고, 또 다른 무한한 ‘세계가 열려있음’이 보인다. 현실과 허구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고뇌하는 화가의 열정도 보인다. 그 열정의 결과들은 불확실성을 압축시킨 담론 주제의 빛남으로 모아진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