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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길 가는 그대의 물음' ... 제주문화이야기(20) 작가 김산 ... 염원, 오래된 숲에서 사는 백록의 물음(2)

김산의 상징적인 담론들

 

‘폭낭’은 제주어로 팽나무를 말한다. 제주에서 폭낭은 깊은 의미가 있다.

 

폭낭은 오래된 마을일수록 수령(樹齡)과 형태가 을씨년스러울만큼 기괴하지만 그 나무의 역할도 중요하다. 특히 바닷가 마을일수록 그 형태가 상상을 초월하며 풍향수(風向樹)로써 한라산을 향해 빗자루처럼 누워있다.

 

폭낭의 역할 중 한 가지는 폭낭이 있는 곳이 마을의 중심지가 된다는 사실이다. 평소에는 더위를 쫓는 쉼터의 역할도 하고, 마을 소식도 서로 전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지만 긴급할 때 마을 공회(公會)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또한 폭낭은 대표적인 神木(신목)이 되기도 한다. 본향당 안에 오방색 물색(컬러)을 걸고 신체(神體)가 되는 것이다. 해안 마을은 신체가 석상이나 잡목이 되지만 중산간 마을에선 폭낭이 주요 신체가 되고 있다. 김산이 폭낭을 마을의 중요 사건을 지켜본 목격자, 시간의 증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나무가 인간보다 훨씬 오래도록 역사 앞에 의연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풍경’이라는 담론은 풍경 속에 은닉(隱匿)된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찾는 것이었다. 멀리서 자연 그대로 보이는 풍경도 가까이에서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으로 생채기를 입고 있다. 전쟁, 벌채, 산불, 채집, 사냥, 산행 등 생존과 관련된 직·간접적인 이유들의 흔적이 가득한데 토기 파편, 안경, 소뼈, 농기구, 비닐까지 인간 삶의 파편들은 아름다운 숲에 몰래 숨어 있다.

 

자연이 어떻게 서서히 사회화되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풍경의 일부처럼, 때로는 너무 어색하게 말이다. 몰래 숨긴 것의 보물찾기처럼 숲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결코 보이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은 자아의 통찰에 달려 있다. 

 

‘동자석’ 은 영혼에 대한 사유(思惟)에서 시작되었다. 어릴 때 산(山;무덤)에서 자주 보았던 동자석이 어른이 돼 새롭게 소환된 것이다. 동자석은 귀여운 아이 석상으로 먼저 떠난 이들을 위해 자손들이 효성으로 세운 현무암 조각이다.

 

석상 아이는 외로운 조상과 벗이 되어 온갖 심부름을 한다. 동자석은 떠난 조상을 위해 자손들이 예의, 효도, 그리움, 봉양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유독 제주도에 많이 만들어졌다.

 

여린 나비는 투박한 동자석과 대조를 이룬다. 아이 석상이 자손들 마음의 상징이라면, 나비는 조상의 영혼이 환생한 것으로 생각되는 자연적 실체이다.

 

굿에서 ‘나부(나비)’는 조상의 영혼으로 관념돼 한지 조각으로 날려 보낸다. 동자석과 나비는 서로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인간의 육신과 영혼의 상보성(相補性), 조상과 후손이 교감하는 시간, 돌의 강함과 유기체의 유연함을 서로 대응시키고 있는 관계다. 무기물과 유기물도 모두 자연에서 나서, 결국 현실에서 만나고 다시 원래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작가의 영원회귀사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백록(白鹿)’은 한라산 신선 사상에 입각한 표현이므로 제주에서 장수와 평화를 상징하는 담론이 된다. 

 

 

백록, 숲의 빛나는 만남

 

김산은 요즘 신비한 숲을 그리고 있다. 한 마리의 백록은 지금 한라산에 없지만 작가의 마음에는 늘 살고 있다. 백록의 숲은 과거 제주 원시림을 상징하기도 하고, 한라산 자락에 있는 곶의 모습이기도 하다. 원형(archetype)의 숲 사이 한 마리 흰 사슴은 제주의 상징으로 빛을 발한다.

 

고려시대 제주에는 노장 사상, 무속과 불교가 유행하였는데 ‘당(堂:본 향당)오백 절(寺)오백’이라고 하여 제주섬 곳곳에 신당과 절간이 매우 많았었다. 예전 한라산은 사슴, 노루들의 놀이동산과 같았으나 조선시대에 해마다 다량의 사슴, 노루 가죽을 진상하다보니 19세기 말에 이르러 한라산 사슴이 멸종하였다. 흰 사슴은 조선 초기부터 한라산에서 포획하여 조정에 바친 기록이 있고, 전설에 사슴 무리를 돌보는 신선이야기가 전해온다.

 

구전에 의하면, 한라산은 홍산(紅山), 청산(靑山), 백산(白山) 세 가지로 불렀다. 봄에는 붉은 진달래, 참꽃이 가득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빨갛게 물들어 홍산이라 하고, 여름엔 수목이 푸르러서 청산(靑山)이 되며, 겨울에는 흰 눈이 덮여 백산(白山)이라고 했다. 계절 따라 변화무쌍한 한라산에서는 남극노인성을 볼 수 있으며, 신선이 날마다 백록(白鹿)을 데리고 와 물을 먹이는 곳이라서 백록담이라고 불렀다. 한라산은 예로부터 이처럼 노인성, 신선, 흰 사슴, 불로초, 영지버섯 등 도가의 장수사상이 깃든 곳으로 유명했다.

 

한라산을 꼭짓점으로 보면 제주도는 남북의 길이가 짧고 동서의 길이가 긴 타원형의 섬이다. 180만 년 전 화산으로 만들어진 섬이기에 가는 곳마다 검은 색 현무암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그 산허리 아래로 에워싸고 있는 곶이라고 부르는 숲이 여러 군데 있는데 오늘날은 곶자왈이라 부르고 있다. 곶은 우거진 숲을 말하며 한자로는 ‘수(藪)’로 쓴다. 지역민들은 오래전부터 ‘술’이라고 불렀다. 

 

 

곶자왈은 근래에 만들어진 합성어로 곶=산 숲, 또는 깊숙한 산속의 수풀이고, 대규모로 숲을 형성하고 있다. 연관된 명사로 곶질(길). 곶밧(밭), 곶쉐(소), 곶돌(아아용암판석) 등의 말이 있다. 자왈=가시밭, 또는 작은 잡목이나 수풀이 우거진 가시덤불 지대로 작은 규모이고 곶가까이나 또는 밭 구석에 형성된다. 연관된 말로 가시자왈(가시가 많은 자왈)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실상 곶은 원시림 숲이 있는 장소이다.

 

제주는 바다로 둘러진 울울창창한 고도(孤島)였지만 몽골이 일본 정벌을 위해 한라산에서 벌목하여 수백 척의 전선(戰船)을 만들었거나 목장용 목책(木柵), 초가의 자재(資材), 진상선(進上船) 제작, 숯 재료 벌채, 화전(火田) 개간 등에 의해서 오늘의 숲의 모습이 되었다.

 

김산의 숲에 대한 모티프는 곶(자왈)에서 시작되었다. 곶은 제주인의 생활근거지로 대개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사냥, 땔감과 열매의 채취, 목양(牧養), 숯가마 운영, 도피 은둔, 비념의 장소이기도 했다. 숲은 제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 장소가 된다. 숲으로 보여도 숲 이상의 사회적 장소였던 것이다.

 

김산의 백록은 한라산의 자연과 제주인의 삶의 소망으로써 장수사상을 근원에 두고 있다. 숲은 신성한 곳으로써 백록의 길이자 우주(하늘)의 기운이 내리는 영역이다. 이때 백록은 작가의 염원의 상징으로써 세계, 인간, 생태, 사물 모두를 아우르는 수평적 관계의 길로 안내하는 매개자가 된다.

 

특히 사실적인 묘사와 대기 원근법의 표현은 세속에서 벗어난 성스러운 신비주의를 더하고 있어서 마치 오늘날의 문명을 역설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자연스럽게 현재의 우리 세계를 비판적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것이 인간과 공생하는 관계라면, 여기에서 백록은 인간의 온갖 행위들을 응시하는 신성한 존재로서 현현(顯現)한 것이다. 인간다움의 마지막 모습이, 우리에게 여전히 양심이 남아있을 때까지라고 한다면 그래도 인류의 미래에 희망을 가져볼만하다.

 

김산의 염원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숲의 생태적 ‘아름다움이 그대로 있음으로’ 묻고, 백록이 빛나는 ‘순백(純白)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것으로 답하고’ 있다. 모든 색의 마지막은 처음 바탕색(素色)일 것이라는 믿음에서 김산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인간이여, 숲을 버리고 우리는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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