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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길 가는 그대의 물음' ... 제주문화 이야기(8) '탐라순력도'가 알려주는 제주

◇ 돌을 역이용하는 사람들

 

필자는 일찍이 제주 전통문화의 키워드를 돌, 바람, 여자, 말, 가뭄을 상징으로 삼아서 ‘석다(石多), 풍다(風多), 여다(女多), 마다(馬多), 한다(旱多)’의 섬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 다섯 개의 상징적 개념으로 제주를 보게 되면 생산 문화적인 의미가 쉽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 중 석다(石多)는 현대 지질학적인 개념으로 생각지 않더라도 전통사회에 수많은 기록에서 보듯이 제주가 돌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척박(瘠薄)’하다 라고 했다. “척박(瘠薄):땅이 가물어서 기름지지 못함”을 말한다. 화산섬이기 때문에 검은 색 화산회토가 대부분이고 “이 땅(제주)에는 바위와 돌이 널려 있어, 흙이 덮인 것이 몇 치 뿐이다.” “토질이 푸석푸석하고 메말라 밭을 개간 하려면 반드시 소나 말을 몰고 와서 밭을 밟아주어야 한다(밭ᄇᆞᆯ리기).” 그래서 사람들은 적어도 계속 농사를 지으려면 거름을 얻기 위해서 소나 말무리를 밭담 안에 몰아넣어 며칠을 가두어서 그들의 분뇨를 거름이 되게끔 밭 여기저기에 남기도록 했다. 이를 ‘바령’이라고 한다. 그렇게 바령한 밭은 기름지고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는 것이다.

 

 

삶은 생각보다 모질고 사람은 의외로 지혜롭다. 돌로 된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야속한 땅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식량을 구하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여성들은 바다로 나가 ‘ᄌᆞᆷ네(潛女)’가 되었고, 남자들은 배를 타거나 목도일을 해야만 했고 수자리를 서거나 진상의 곁꾼으로 동원됐다.

 

18세기초 이형상 목사 때에 여성들이 많은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염집(서민가) 여성들은 용천(湧泉)에서 물을 길어오는 일, 곡식을 베는 일, 땔나무를 마련하는 일, 나무통으로 물을 나를 때에도 등짐을 지지 않는다. 제주에서는 물건을 나를 때에도 머리에 이고 다니지 않는데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다치기 때문에 등짐을 지고 땅을 보면서 걸어야 한다.

 

18세기 초 당시 제주 여인들의 복장들도 반나체나 다름없었다. 여인들은 삼으로 엮은 줄을 허리에 돌려 두르고 몇 자(尺)의 굵은 베를 바늘로 꿰매고는 그 삼줄 앞면에 매달아 오로지 음부(陰部) 만을 가려서 옷과 치마를 벗고 몸뚱이와 볼기짝을 드러내 다님으로 보기가 매우 참담했다. 유교 원리주의자였던 이형상 목사의 눈에 비친 제주 여성의 일상에서의 그 모습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여인들에게 수치스러움을 알게 하여 급기야 영을 내려 꼴 사나운 그런 패션을 금지시켰다.

 

이형상은 「제주 풍속(土風)」 이라는 시에서 제주 풍속의 전모를 말하고 있다.

 

섬은 이름난 곳이어서 땅은 더욱 그윽한데

문재(文才)는 모자라도 무재(武才)는 뛰어나다네

휘파람으로 소를 몰아 밭을 모두 밟아줘야 하고

절구 찧을 때도 사투리로 함께 노래하네

여인이 물 긷고 물질하지만 남자는 반대로 한가하다네

백성들 가난하여도 사치에 들떠 있어 기이한 풍속이로세

사계절 가죽옷 입고 있어 풍정(風情)이 야박한데도

누가 헤진 옷에 잠방이 입은 사람 근심을 알아주랴.

 

많으면 많은 것을 이용하게 되므로 결국 그것이 부족하기에 이른다. 인구의 증가는 생산도 늘게 하지만 소비도 따라서 늘게 한다. 생산수단의 진보는 문명의 길을 따라서 온다. 농업중심의 조선시대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전답의 상태에 집중되었는데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농지의 안정적인 확보가 관건이었다. 이는 안정적인 수취제도에 목적이 있었다.

 

 

◇ 국가의 운영자금 전세(田稅)

 

이형상 목사 재임 시절의 밭의 등급은 하중(下中)이었다. 그 밭은 흙이 검고 부풀어 오른다. 그래서 곡식 씨는 마땅히 기장, 피, 산도, 차조, 콩, 보리, 메밀, 사탕수수 등을 심어야 하는데 특히 사탕수수는 맛이 달고 무성하게 자라는 것으로 보아 섬의 토질에 잘 맞았다.

 

논은 매우 적어서 대정현에 약간이 논이 있으며, 정의현에는 매우 적고, 제주목에는 더 적다. 1702년(숙종 28)의 제주의 전답은 3,357목(結), 33짐(負), 9뭇(束)이고, 정의현 전답은 140목, 32짐, 5뭇이며, 대정현 전답은 149목 91짐 4뭇이었다.

 

삼(參)은 잘 자라지 않았고, 면(綿)은 매우 귀해서 대정현에 목화(木花, 멘네)를 심은 자가 있었는데 솜털이 성글어서 옷 만드는데 좋지 않았다. 또 산림에 널린 것이 뽕나무이지만, 섬사람들이 누에를 치고 길쌈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으므로 이형상이 삼읍에 재배법을 알아듣도록 가르쳤다.

 

그렇다면 전답과 관련해서 공납을 대신하여 소위 새로운 조세법, 즉 대동법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의 조세체계는 근본적으로 조용조(租庸調) 체계였다. 즉 토지가 있으면 조(租)가 있어 전답에 부과하여 곡물로 징수하는데 이를 전세라고 한다. 몸이 있으면 용(庸)이 있어 사람에게 부과하여 요역을 징발하고, 호(戶)가 있으면 조(調)가 있어 집에 공물을 징수하였다. 특히 전세는 국가를 경영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근본이 되는 세금이기 때문에 상세(常稅)라고 했다. 즉 전세는 나라의 경상비인 녹봉과 군사비 등의 지출을 위한 세금이었기 때문에 국초부터 그 과세 체계를 법으로 제정하여 철저히 관리했다. 전세가 무엇보다도 쓰임새가 중요하기 때문에 조세 규모도 컸고, 토지면적 조사에 그만큼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선의 토지제도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결부제(結負制)인데 토지파악과 조세 부과의 기준이 되어 결(結:목) 부(負:짐), 속(束:뭇), 파(把:줌)의 단위로 측정했다. 전세 부과 원칙은 9등연분법(九等年分法)과 전분6등법(田分六等法)을 시대에 따라 채택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전국적으로 170 만결에 달하던 토지 면적이 왜란 후에는 3분의 1로 줄어서 54만 결 밖에 안 되었다. 당장 조세 수입에 비상이 걸렸다. 이에 토지의 개간을 장려하고 양전(量田)을 실시한 결과 숙종(1674~1720) 때에는 토지 면적이 140만 결로 증대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조세 수입은 그에 상응하여 늘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왕자·옹주 등에게 준 궁방전(宮房田)이나 관청·군영 소속의 둔전(屯田:주둔한 군사들에게 군량을 지급키 위해 마련한 밭)과 같은 면세지(免稅地)가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또 중앙의 세도가인 권신(權臣)이나 지방의 토호들의 토지 점유가 늘어난 것도 같은 이유가 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로 인해 조세의 감소에 대한 대비책이 긴급히 필요하게 되었다.

 

조세 수익의 부족은 국가 재정의 위기가 되었으므로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부에서 주장해오던 공납(貢納)을 미곡(쌀과 곡식)으로 바치게 하는 수미법(收米法) 이 다시 논의 되면서 급기야 시행되기에 이른다. 

 

 

1608년 광해군의 즉위년에 영의정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주장에 따라서 먼저 경기도에서 시행되었고, 인조 원년(1623)에는 강원도에 실시되었다. 그리고 효종(1649~1659) 때인 효종 2년(1651) 1월에 김육(金堉, 1580~1658)은 영의정에 오를 수 있었고, 이에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더욱이 김육은 효종의 총애가 커지면서 김육의 손녀(차남 김우명의 딸)를 세자빈으로 세울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외척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쥘 수 있었다. 대동법은 김육이 사망한 한참 뒤인 1708년(숙종 34)에 드디어 전국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다.

 

대동법이란 대동미(大同米)라는 명칭 아래 밭(田) 1결에 대하여 미(米) 12말(斗) 씩 징수하게 되었는데 이를 혹은 포(大同布)나 돈(大同錢)으로 납부할 수 있게도 하였고 이를 관할하는 관청이라고 하여 선혜청(宣惠廳)을 두었다.

 

이 대동법이 시행된 후에도 필요에 따라 농민들로부터 공물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원칙적으로 공납제도는 폐지되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대동법이란 ‘ᄂᆞᆷ의 대동’ 이라는 말이 있듯이 원래 경기 삼남에는 1결에 쌀 12말을, 양전(量田)이 되지 않은 읍에는 4말을 더하며, 영동(대관령 동쪽)·영서(대관령 서쪽)에는 2말을 더하고, 그리고 해서(황해도)에는 상정법(詳定法)을 시행하여 15말을 거두니, 이를 통틀어 ‘대동(大同)’이라 하였다.

 

이형상의 저서인 『남환박물(南宦博物)』 「부역(賦役)」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당시 제주 세법의 윤곽을 알 수 있다. 

 

 

“세법이 바르지 않다. 당초 경계를 지을 때 이미 측량하지 않았다. 곧 올해의 세금도 적게 내었다. 묵힌 밭과 재해를 입은 것을 제외하고, 결(結)에 따라 거두어 들인다. 전세(田稅)는 매 짐(負)마다 쌀과 콩은 1되 5홉이고, 산미(山米)와 전미(田米)는 곧 7홉 5작이다. 이른바 대동(大同)이라고 하는 것은 위아래 할 것 없이 남정(男丁)들을 뽑아 한 사람에게 전미 5되를 매긴다. 이밖에 결역(結役)은 없다. 표고버석과 백랍(白蠟)은 군병(軍兵)에게서 받고, 미역과 전복, 물고기, 게 등은 포한(鮑漢:포작인)에게서 받는다. 무릇 여러 역역(力役:요역;노동력)과 땔나무, ᄎᆞᆯ(꼴), 꿩(산촌의 남자에게), 닭(해안의 남자에게)들의 물품은 모두 백성들에게 부담 지운다.”

 

◇ 제주도 보물 그림첩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탐라순력도』는 지금으로부터 320년 전의 제주의 군사, 관방, 지리, 풍속 등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기록화다. 이 『탐라순력도』는 당시 제주 목사였던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1702년(숙종 28) 3월 제주목사로 도임하여, 같은 해 10월 29일부터 11월 20일까지 22일 동안 제주 전역을 순력하였는데, 이 때 제주의 화공(畵工) 김남길(金南吉)을 시켜 기록화로 그 과정을 상세하게 남겼다.

 

<탐라순력도>는 제주도 지도 1면, 순력 장면 40면, 서문 2면 등으로 1703년 8월에 완성되었다. 이 기록화는 320년 전 제주의 문화와 풍물, 관방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첩으로 시사, 강사, 사후, 시회, 조점, 점마, 전최, 배잔, 양로, 공마, 감귤봉진, 시취, 구마, 수렵, 방록, 풍악, 범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도첩은 1979년 병와 이형상 저작들과 함께 일괄 보물 제625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주시가 1998년 이형상의 후손으로부터 원본을 입수하여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 위탁 소장하고 있다. 이 『탐라순력도』는 18세기 실경산수의 사실적인 단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첩이다.

 

『탐라순력도』는 기록화의 일종으로 우리나라에 이런 이름으로 전해오는 그림으로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순력(巡歷)이란, 매번 봄과 가을에 절제사가 직접 방어의 실태와 군민의 풍속을 살피는 것(每番春秋節制使親審防禦形正及軍民風俗謂之巡歷)”이라고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변방에 부임하는 수령이 제주도 방어체계인 3성(城) 9진(鎭)의 군기(軍器)와 군사들의 실태를 점검하는 그림으로, 제목, 순력 그림, 좌목 등 3단 구성으로 제작된 기록화이자 실용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3단 구성의 이전 사례로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계회도(契會圖)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다시 이 3단 구성 방식은 「제주도문자도」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탐라순력도』 서문을 쓴 선비가 오노인(吳老) 필(筆)이라고 했으나 1703년 5월 19일 오시복(吳始復)의 간찰에 “말씀한 서(序)를 쓰려고 하니 요즈음 기분 나쁜 생각이 들어 붓을 잡을 틈이 없었는데 조금 기다리면 며칠 사이에 즉시 그에 부응하려합니다만, 인편으로 즉시 드리지 못하여 깊이 탄식하고 있습니다.”라는 편지글이 있으므로 오노인(吳老)이 감산 유배인 오시복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순력 행사는 이형상 목사 이전에 이미 제주 목사 이원진(李元鎭, 1594~?), 제주안핵겸순무어사 이증(李增,1628~1686) 등이 정기적으로 군사를 점검하기 위해 순력을 다녔는데 변방 제주의 3성 9진 체계를 중심으로 군민(軍民)을 점검했었다.

 

 

◇ 최초로 몰골법으로 그린 돌담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성을 지키려고 쌓은 돌담을 성담이라고 한다. 세 읍성과 아홉 진성이 이에 해당한다. 「관방도(關防圖)」에 나오는 성담들은 대개가 계화(界畫)로 그려졌다. 계화법이란 자를 이용하여 정밀하게 사물(성곽)의 윤곽선을 그리는 회화 기법으로 건물, 누각, 성벽 등을 그릴 때 주로 사용한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에서는 계화법으로 그리는 곳이 「제주전최(濟州殿最)」 나 「감귤봉진(柑橘封進)」 등의 기와집이나 담장, 그리고 여러 진(鎭)에 소속된 봉수대나 연대의 돌담을 직선으로 그릴 때 사용하고 있다.

 

특히 「제주전최(濟州殿最)」의 성담은 직사각형 모양의 장대석 돌을 하나씩 엇갈리게 3단으로 쌓고 있으며, 목관아(濟州牧官衙) 사고석 담장에도 적용하고 있는데 담장에 쌓은 돌은 사각형의 현무암을 백회를 바른 후 조적(造積)하였다. 관청의 담장은 경계구분이 주된 목적일 것이며, 또 각 관청이 업무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시각적인 차단을 하여 관청의 고유 기능을 보호하도록 하는 역할이 있다.

 

 

그러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 나오는 3성 9진의 성담들은 모두 오히려 자유로운 곡선으로 선묘를 하고 있는데 그 3단의 돌담을 나타내는 선묘는 그냥 손으로 프리하게 그려서 성담을 두르고는 3개의 선으로 된 성담 바로 위에 성가퀴를 요철(凹凸) 모양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귤림풍악(橘林風樂)」의 돌담은 사뭇 다르다. 과수원을 보호하기 위해 밖으로는 돌담을 둘렀으며 그 안에는 크게 자란 대나무가 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직선으로 높이 자란 대나무 사이로 방풍용 돌담을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과원 방풍용 돌담을 축성(築城)이라고 한다.

 

축성은 말 그대로 성처럼 쌓은 것이고, 그것의 목적은 오로지 바람을 보호하는 것이다. 축성은 겹담으로써 일종의 잣벡담과 같은 모양이면서 견고하게 쌓고 있다. 축성을 그린 기법으로는 몰골법을 적용하여 단번에 붓에 묻은 먹의 농도와 번지는 것만으로 물체를 표현하는 동양화 기법이다. 붓을 한 번에 눌러 단번에 형태를 나타낸다. 축성을 표현하려고 농도를 조절한 모습이 역력하다. 몰골법으로 돌담을 그린 최초의 그림이 「귤림풍악(橘林風樂)」 대나무 뒤에 숨어있다.

 

돌담 그림을 최초로 그린 화가는 김남길이다. 그가 제주의 화공인지 아니면 공재 윤두서의 제자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1703년 이형상의 명을 받아서 기록화를 그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김왕직, 『한국건축용어사전』, 동녘, 2007.

오기수, 『대동법』, 보림, 2019.

이형상, 『남환박물』, 이상규, 오창명 역주, 푸른역사, 2009,

이형상, 『탐라록』, 이진영 역주,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 2020,

李基白, 『韓國史新論-新修版』, 一潮閣, 1990,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강의』, 한ᄋᆞᆯ아카데미, 1991.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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