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조화
풍경화는 눈 앞에 펼쳐진 전경(前景)을 그린 그림이다. 그것이 자연 경관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경관일 수도 있는데 인간이 눈에 그대로 보이는 경치를 서양화의 한 장르로 표현한 것이다. 풍경은 자연 속에서도 변하고, 삶의 공간에서도 변한다. 숲이 자라고 하천이 물길을 바꾸고 해안이 침식되며, 산과 계곡이 깎여나간다. 그 어떤 것도 그대로 인 것이 없다. 변화의 크기와 속도가 다를 뿐 지구 공간을 구성하는 사물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시골 또는 도시의 형태도 늘 달라진다.
풍경은 한자 바람 풍(風)자와 경치 경(景)자로 구성되었다. 풍(風)은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바람, 흘레하다, 울리다, 뜨다(汎), 풍속, 경치, 위엄, 병풍, 모양을 말하고, 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나타내는 표현을 말한다, 경(景)이란 ‘경치, 빛, 밝다, 크다, 형상하다, 사모하다’ 로도 읽는다. 주로 사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상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풍경이란 보이지 않는 의미와 보이는 대상의 아름다움을 서로 어울리도록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풍경화의 개념이 서양화를 그리는 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재료의 특성을 들 수가 있다. 주 재료인 수채(水彩)와 유화(油畫)이다. 수채는 물에 물감을 타서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데 맑고 투명하여 시원한 느낌을 준다. 또 유화는 기름으로 녹여쓰는 물감으로 늦게 마르는 기름인 린시드와 빨리 굳게 하는 테레핀을 적절히 혼용하면서 물감의 색과 강도, 굳기와 마르는 속도를 조절하면서 그림다. 그 바탕은 아마포로 만든 캔버스인데 이 둘은 서양화의 핵심 재료가 되며, 수채는 빨리 마르기 때문에 단숨에 그리는데 유리하고, 유채(油彩)는 발색이 아름답고 보존력이 뛰어나다는 장점 때문에 대형 작품에 적합하다.
풍경화는 자연이든, 인간 공동체의 모습이든, 바라보는 사람의 세계관이 투영된다. 바라보는 사람의 경험에서 얻어지고, 그 인식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표현된다. 이를 테면 풍경화에도 화가의 정신세계와 로컬 컬러가 분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이 음울하고 어두운 시대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일제 앞잡이들이 장밋빛 미래가 열릴 것 같았고, 해방된 후에도 진짜 그렀게 살고 있다. 연합국에 의한 일제의 태평양 전쟁 패배로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가 열리고 있었지만 금새 그 미래는 먹구름으로 덮여 버렸다. 36년간 주권없는 설움에서 해방의 기쁨을 맞은 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미소 점령군의 한반도 통치, 친일파의 미청산, 좌우이념의 갈등은 끝내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괴물이 탄생하여 2024년 이 시점까지도 해방공간에서 예견되었던 나쁜 결과가 그대로 존속되고 말았다.
청산하지 못한 빚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자가 붙어 더 무거워진다. 통일이라는 미해결 과제는 납덩이가 되었고, 다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누르는 반공이념에 가려 제 등장한 친일파의 금빛 귀환으로 우리의 친일 청산을 더욱 멀어지고 말았다. 역사는 국면마다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우리는 ‘친일에서 반공’으로 얼굴을 바꾼 이들에 의해 오늘날 극도로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있다.
해방공간의 풍경화
일제식민지 36년 동안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쁜 일본물이 들었다. 해방을 맞았으나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우리는 좌우대립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림에도 사상이 있다. 해방공간에선 미술인들의 작품이 보기 어려울뿐더러, 이념의 선택으로 인해 그들의 행적마저 불투명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스며든 역량은 시대가 정치적으로 변했다고 해도 그 몸이 있는 한 문화적으로 이어진다. 어제 일본에서 배워온 서양화가 오늘 해방 정국이 되었다고 해서 금방 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화가들은 배운대로 추구하는 이상을 향해 그림을 그릴을 것이고 거기에는 새로운 민족 정체성이 자리할 것이다.
해방공간에 제주에 왔던 육지미술인들이 몇 있었다. 해방을 맞아 남쪽 제주로 처음 온 화가은 박노사(朴魯史)와 이석주(李奭柱, 1918~ ?)가 있었다. 그들이 제주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격동기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전을 여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제주를 주제로 그린 풍경화 작품이 한 점 있다. 1948년 해변에서 불턱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 조병덕의 <해녀>라는 작품이 그것이다. 제작 연대가 1948년이면 4‧3이 있던 해인데 잠녀(해녀)들이 물옷을 입고 모여앉아 불을 쬐고 있는 모습을 그리 풍경화이다. 조병덕이 제주에 왔다면 4‧3과 관련돼 왔다가 해변에서 본 잠녀들의 인상일 것이다. 잠녀의 시선이 정명으로 쏠려 있는 것으로 보아 방문자나 사진기를 의식한 포즈이다.
조병덕(1916~2002)은 서울 출신으로 1940년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1~1945년 조선미술전람회(鮮展) 출품, 1942년에는<저녁준비>로 조선미술전람회(鮮展)최고상인 조선총독부상을 수상했다. 1949~1954년까지 국전 추천작가를 역임하였고, 1955~81년 국전 초대작가와 심시위원을 지냈다. 1954~1981년 이화여대 미대교수를 역임했다.
박노사는 1946년 5월 20일~25일까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돌하르방>, <풍경>, <인물> 등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가졌는데 육지 화가에 의해 해방 후 첫 개인전이 열린 것이다. 박노사라는 화가는 이름만 알려졌을 뿐 그가 무슨 이유로 제주에 왔으며, 어디에 살았고 언제 제주를 떠났는지 알 수가 없다.
또 1947년 민족통일이라는 염원 속에 점점 정국이 불안해지는 상황에서도 제주인 김광추의 인연으로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허백련의 문하생 허두정(許斗正)이 7월에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동양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석주 또한 1947년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입도하였는데 제주공립농업학교 미술교사로 지내면서 미술부 학생들과 제주의 풍경을 찾아 야외로 자주 나갔다. 이석주는 이렇게 그린 그림으로 1948년 2월 7일부터 2월 8일 양일간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도쿄문화학원 출신인 이정규(李政圭)와 함께 자신의 작품 30점을 가지고 2인전을 열자 ‘관람객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라고 제주신보는 전한다.
그런데 박노사와 이석주에 대한 기억을 그의 제자였던 강용택(1931~2021)이 몇 가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강용택은 제주공립농업학교 4학년이었는데 당시 그 학교의 미술선생이 박노사와 이석주였다. 강용택은 제주공립농업학교 2학년때 미술활동을 시작하여 1947년 미술교사 이석주의 지도아래 같은 해 11월 21일 남조선 과도정부에서 주최하는 전국신교육전람회에 출품하여 도화부문 가작에 입상하기도 했다. <사진2 이석주 얼굴>
이석주는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에서 출생하여, 1931년에 충청남도 홍천군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때 중퇴하였다. 이미 중학교 1학년 때에 학교미술소조에 들어가고, 2학년 때에는 교내미술전람회에서 2등을 했으며, 4힉년 때에 당시 동아일보가 주최한 전국학생미술전람회에서 유화로 이조백자를 그린 <정물>이 2등에 당선되었다.
이석주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선생님의 권고에 따라 화가의 길로 들어서서 서울의 ‘엔도회화연구소’와 중국의 ‘사까이노 화숙’의 연구생으로 1938년까지 있었다. 그 후 장춘에 있던 신경예술학원 서양과에서 3년 동안 공부하고 졸업 후 심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졌다.
1941년 이석주는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산(山)>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이때 서양화부에서 같이 입선한 화가로는 조병덕(趙秉悳), 김경승(金景承), 김인승(金仁承), 심형구(沈亨求), 주경(朱慶) 등이 있었다. 북한미술자료에는 이석주가 선전(鮮展)에 입선한 작품에 대해 “전문 창작자로서 내놓은 처녀작은 유화 20호짜리 <서울교회의 산>”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북한의 기록과 다른 강용택의 증언에 의하면, 이석주는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전(日展)에서 작품 <만추(晩秋)>로 특선한 그림을 제주도까지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북한의 기록과 다른 것은 일전이라든가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 다닌 프로필을 일부러 빼버렸을 것이라고 한다.
심양에서 열린 개인전에는 유화 <청량리 풍경>(1942년), <조선아동>(1943년, 40호) 등 30점을 출품하였다. 또 1944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유화 <인왕산>(1943년), <반점>(1944년), <농촌>(1944년, 25호) 등 30점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해방후 이석주는 서울에서 진보적인 미술가들과 함께 조형미술가동맹을 조직하였고, 1946년에는 남조선미술가동맹 대전시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대전중학교, 경기상업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1949년에 유화 <건조기>(1947년), <풍경>(1947년), <정물화>(1947년), <석류>(1948년), <한라산>(1949년) 등 30여점을 가지고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이제현;1999).
2020년 5월 5일 한국화가 강용택의 증언에 의하면, “이석주는 공립농업중학교(제주농업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였는데 그 기간은 1947년 9월 26일에서 1948년 3월 12일까지였고, 이석주는 제주에서 <한라산>을 두 점 그렸다고 한다. 한라산 그림 하나는 용연에서 원경으로 그렸고, 다른 하나는 동문에서 아라 남쪽으로 본 한라산을 그렸다”고 한다. 이 두 점의 한라산 그림을 그릴 때는 강용택이 동행했는데 1947년~1948년 3월 사이라고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한 이석주는 서울제1국장 지배인, 청진미술제작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유화 <농촌에도>(1952년, 50호), <풍어>(1952년) 등을 그렸다. 전후 이석주는 조선미술가동맹 현역미술가, 평안남도 미술창작사 미술가 등으로 있으면서 1981년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그 후의 행적을 알 수 없게 되면서 언제 타계했는지 그 시점도 모른 채 깡마른 얼굴의 사진 한 장을 남긴 채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사진4 강용택 작품>
다시 강용택의 박노사와 이석주에 대한 회고로 돌아가보면, 서양화가 박노사는 제주인보다도 먼저 남다른 돌하르방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1946년 말부터 1947년 중반까지 제주에 머물렀고, 학생이던 나의 자취방에서 팥 한 알도 넣지 못한 맨 좁쌀밥을 나누어 먹으며 미래를 논하던 그는 47년 봄 제주시북국민학교 동관(지금은 철거)에서 개인전을 가진 것을 끝으로 소식이 없다.”
강용택은 동문의 돌하르방의 위치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병원이지만(1990년) 몇 년 전에는 동양장여관 왼쪽으로 계단길이 있었는데 좌‧우에 중형 돌하르방이 세워져 있었다. 계단을 다 오르면 측후소가 있는 곳이다. 허술한 기와집 한 채 외에는 나무가 무성하여 음지가 되어 파란 이끼가 끼어 있어 여름철에도 시원한 느낌을 주는 <돌하르방>을 유화로 그렸는데 이 돌하르방은 제주도 상징이라며 화가 자신이 이 작품을 소장하겠다고 했다.”
이석주에 대한 강용택의 기억을 보면, 이석주는 유화 개인전을 제주시 북초등학교 본관 교실에서 열었다. 전시를 마치고 제주를 떠난 이석주를 찾아서 1948년 8월 여름방학때 제주를 떠날 때 적어준 서울 효자동 전차 종점 근처의 주소를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이석주에 대한 강용택의 당시 기억은 선명했다.
“1947년 9월부터 1948년 3월말까지 저는 줄곧 선생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사라봉, 용연, 용두암, 동문통 거리 등 선생님은 이젤과 Box(화구상자)를 들고 다녔습니다.”
강용택은 이석주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해방 전에 일전(日展)에서 특선된 작품은 잘 소장돼 있습니까? 제주에 함께 오셨던 kahsla과 아드님(5~6세)도 궁금합니다. 이제 아드님도 초로의 나이가 되었겠습니다.”
2020년 5월 5일 한국화가 강용택은 필자에게 미술교사 이석주 지도로 받은 남조선 과도정부 상장을 보여주며 그 때 회상을 행복하게 기억한 채 90살의 생애로 2021년 타계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