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필화는 비단에 채색으로 그리는 중국화의 화법이다. 우아하고 화려한 것이 공필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중국과 인접한 우리나라는 채색화는 도화서 화원이나, 서민의 민화에 발달했고 문인화는 양반 사대부가 즐겨 그렸다. 제주는 아름다운 자연의 섬으로, 공기가 맑고 숲의 향기가 감미로우며, 비단결 같은 바다가 푸르게 열려 있어서 그 곳에 가면 누구라도 지친 일상의 병을 자연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이 제주도가 치유의 정원이 되는 까닭이고, 그 그림이 마음의 위안이 되는 이유가 아닐까. 마왕퇴, 고개지에게서 비롯되는 공필화 공필화란 역사적으로 볼 때 그 기원은 동기창이 북종화라는 장르로 분류하기 훨씬 이전으로 올라간다. 공필화라는 말이 주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공필호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매우 자세하고 정밀하게 그리는 회화 기법으로 외형묘사에 치중하여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세필(細筆)가 화려한 색채를 공들여 사용한다. 화원화가(畫員畫家)나 직업화가들이 그리는 그림으로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문인화와는 상대적 개념이기도 하다. 다시말해서 공필화는 채색 중심의 화법인 북종화로 정립되면서 더욱 정교하고 섬세한 경치와 사물을 표현하는 중국화의 표현방법이며
3. 중산간이라는 말의 기원 ‘산간(山間)지대’라는 말은 『삼국사기(三國史記,1145(인종 23년)』 「고구려본기」에 보이고, ‘산간(山間)’은 중국 당나라 정사(正史)인 『구당서(舊唐書, A.D.940)』에도 나오는 매우 오래된 용어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높아 수려한 지역이어서 산지(山地)가 발달해 있어서 페르낭 브로델(P.Braudel)의 말마따나 “산지의 사람들은 넓고 소통이 힘든 공간 속에 파묻혀 있어 대개 경작이 불가능하든지 혹은 아주 힘들어서 문명의 재건에 필요한 접촉과 교환이 어렵다”라고 했다. 그런 곳에서는 삶에 필요한 핵심 물품들을 모두 자체 조달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와 문명, 경제는 모두 후진성과 빈곤함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다. 제주도의 산지(山地)는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한라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지만 산지의 규모가 크지 않고, 사면이 바다인 관계로 해안마을이 발달하였으며, 그 한라산과 해안 사이에 초지(草地)와 곶(藪: 2000년대 이후 곶자왈이라는 신생어로 사용)이 형성돼 있어서 고려시대 몽골점령기에는 목장을 동·서 아막의 행정에 의해 운영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삼읍으 10소장 체계로 나누어서 목장지로 활용되었다.
1. 토포필리아 우리는 가장 작은 단위로 집에 살고 있지만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 집은 장소이기에 편안하고, 마을은 보다 넓은 공간이기에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段義孚, Yi Fu Tuan)은 ‘장소는 안전을 상징하고, 마을은 자유를 상징한다’라고 말한다. 사람이 사는 곳인 집(home)이라는 이름을 가진 각각의 공간이 다른 여러 집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마을을 이루는 것이고, 그 마을이 자신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게 함으로써 그곳의 특별한 장소감(sense of place)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장소감이란 한 개인이, 자신이 자란 고향, 곧 그 장소를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을 감성의 근원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객지에서 내가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바로 내가 자란 마을이 주었던 편안함과 자유를 누렸던 만족감에 대한 투사(投射)라고나 할까. 삶의 안정적인 발판이 되는 것으로 제일 우선인 것이 바로 집이며,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서 집을 이루어 사는 공동체 마을, 즉 고향이라는 이유가 그 삶의 자유를 위한 시작이 되는 것이다. 고향은 애틋한 경험과 친밀한 장소이자 애착이 가는 친밀한 공간으로 이푸 투 안은 ‘토포필리아
언어가 있어야 세계가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모든 것이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혹은 무언가 닮은 모양의 추상(抽象) 형태와 확실하게 사물을 지칭할 수 있는 구상(具象) 형태로 구분할 수가 있다. 형태와 언어는 매우 밀접하다. 먼저 자연(우주)이 있었고, 사람이 있은 후 감탄사든 공포의 비명이든, 앓는 소리든 어떤 소리가 있었다. 자연 주변에 형태가 있으므로해서 비로소 사물에 대한 언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을 전제로 발달했다. 우리가 아는 수많은 사물의 이름이 그렇게 해서 명명되었고, 언어가 있으면 대상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를 테면 ‘말(馬, horse)’이라는 언어는 가리키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만일 그런 대상이 없었다면 말(馬)이라는 언어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앞에 말(馬) 조각이 있다. 실제 말(馬)은 아니어도 모두 말(馬)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람들은 실제 말(馬)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말(馬)이라고 불러도 누구 한 사람 이의(異義)를 제기 하지 않는다. 자기가 아는 말(馬)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말(馬) 작품에 대한 ‘변형(deformation)’이나 ‘왜곡(dis
강영호(1943~2021)는 사실주의 화가로 한국의 옛 기물이나 제주의 풍광을 즐겨 그렸다. 제주시 도남 출신으로 1963년 오현고를 졸업하고, 1967년 홍익대 서양화과와 조선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개인전 17회, 2010년 17회 개인전 이후 지병이 악화되어 작품 활동을 중단하였다. 국내외 다수의 개인전과 한·러 교류전, 아시아미술대전, 10개국 예술교류전, 서양화 중견작가 초대전 등에 참가하였다. 제주대 강사, 한국미술협회제주도지부장, 한국예총제주도지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문우회, 상형전, 이상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2015년 연갤러리 특별기획전 '강영호 화백 초대전'을 마지막으로 투병하다가 2021년 8월 타계하였다. '탐라이야기'(1993년)는 강영호 화가가 줄곧 관심을 가져온 제주의 옛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탐라의 옛 사람들이 남기고 간 유물에서 진정한 제주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 작품이다. 애기대백이 허벅, 각지불, 불상, 석류가 서로 뿜어내는 조형적 아름다움이 과거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탐라이야기는 화면 전체가 과거의 회상처럼 보이려고 면을 겹치고 있으며, 점묘적인 마티에르가 사물 서로가 공간
부현일(1939~2022)의 호는 남도(南島),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서 출생했다. 작은 키에 어진 심성을 가진 사람 좋은 아저씨 인상을 가진 화가다. 한국화에서 매란국죽의 사군자를 가르치던 부현일은 마치 서당 훈장처럼 이해심이 많은 인물로 천성이 온순한 성격에다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는 제주대 한국화 교수였다. 1964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5년 동안 부산·마산 등지에서 중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1979년 제주대 미술교육과 강사, 1980년 전임강사로 임용되면서 제주대 미술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하였다. 1980년 제주 산호다방에서 제주풍경을 그린 20점으로 첫 개인전을 시작해 2008년까지 7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자연에 대해 진지하고 언제나 외경심(畏敬心)을 가지면서, 실경(實景)에 바탕을 둔 제주의 풍광을 소탈한 필치로 담아내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제주도립미술관 관장을 역임하는 동안 온갖 이해관계에 따르는 예술 행정가의 쓰라린 어려움을 절감하면서 그 휴유증으로 인해 결국 암과 투병하는 말년을 보냈다. 국내외 다수의 초대전 및 교류전에 출품하였다. 한국미술협회, 제주한국화협회, 정연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가버린 인생 돌이킬 수 없다 시간은 조석이 밀려오듯 많은 사람들을 어디론가 데려간다. 그 누구도 시간에 저항할 수가 없다는 것은 진리이며, 그 시간의 물살을 거슬러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세를 상상한다. 특히 종교인들은 현실의 편안함과 더불어 더욱 적극적으로 영생을 꿈꾼다. 그렇다. 종교는 믿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믿는다는 것은 생각일 뿐 실존은 바뀔 수가 없다. 그 누구도 부활이라는 것에 대해 반증하지 못하였으므로 그것은 현실적으로 착각에 불과하다. 그저 생각뿐인 것. 삶이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감이 있다. 생명체의 태어남과 죽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모르는 생명체의 위대한 행로는 그 자페로 경이롭다. 최근 작고한 제주 작가는 누구인가. 2020년대 작고한 제주 작가는 강용택, 강광, 강영호, 백광익, 강길원 등 5명이다. 강광은 제주대 강사로 왔었고, 강길원은 제주대 교수로 재임했는데 본적이 육지 출신이지만, 직업상 제주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후진을 가르쳤다. 김창열은 한국전쟁 당시 경찰관으로 제주에 온 화가다. 그 인연으로 저지리 예술인 마을에 김창열미술관이 건립되었다. 강용택, 강영호, 백광익은 토박이다. 제주
서양화가 백성원의 제5회 개인전이 제주시 아라갤러리(대표 이숙희)에서 신작 15점, 오브제 9점 등 총 24점을 가지고 2024년 7월 13일부터 7월 28일까지 2주간 열리고 있다. 제주를 시각혼합 기법으로 바라보는 백 화가는 새로움을 시도하기 위해 신촌을 미학적으로 방황하던 시절 만난 제2의 회화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백성원은 세계미술사에서 점묘법이라는 신인상주의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제주적인 회화의 창작방법론으로 전환하려는 현대미술의 응용적인 개척자가 돼 고뇌하고 있는 작가이다. 오늘따라 신천의 기운이 리듬을 타고 맑은 기운이 느껴진다. <편집자 주> 그림은 마음 속 언어, 존재 드러내기 보는 것은 최고의 즐거움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속엣 말을 해버리면 후련한 것과 같이 말이다. 아름다움에는 내면적 즐거움을 주는 황홀함과 감미로움이 숨어있는데 그림은 시를 읽으면 떠오르는 기쁨처럼 어떤 형태를 그려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매우 감미로운 감정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운 미적 감정은 때로 신비롭기도 하다.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영성(靈性)이 있다. 자신마저도 그 깊이를 모르는 창조적
풍경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조화 풍경화는 눈 앞에 펼쳐진 전경(前景)을 그린 그림이다. 그것이 자연 경관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경관일 수도 있는데 인간이 눈에 그대로 보이는 경치를 서양화의 한 장르로 표현한 것이다. 풍경은 자연 속에서도 변하고, 삶의 공간에서도 변한다. 숲이 자라고 하천이 물길을 바꾸고 해안이 침식되며, 산과 계곡이 깎여나간다. 그 어떤 것도 그대로 인 것이 없다. 변화의 크기와 속도가 다를 뿐 지구 공간을 구성하는 사물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시골 또는 도시의 형태도 늘 달라진다. 풍경은 한자 바람 풍(風)자와 경치 경(景)자로 구성되었다. 풍(風)은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바람, 흘레하다, 울리다, 뜨다(汎), 풍속, 경치, 위엄, 병풍, 모양을 말하고, 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나타내는 표현을 말한다, 경(景)이란 ‘경치, 빛, 밝다, 크다, 형상하다, 사모하다’ 로도 읽는다. 주로 사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상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풍경이란 보이지 않는 의미와 보이는 대상의 아름다움을 서로 어울리도록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풍경화의 개념이 서양화를 그리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되묻기 우리는 생각을 하며 산다. 어느 오름이라고 이름을 들으면, 벌써 그곳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갈 것인가? 하고 아는 만큼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그 곳이 이름만 들어 알 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라면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 장소가 외국이면 그곳에 가본 적이 없으므로, 우리는 어디? 어떤 곳인지 몰라 매우 당황하게 된다.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분명 알지 못하는 것에 늘 긴장한다. 우리 문명은 지금껏 알지 못하는 것들을 소통시켜 온 것에 다름 아니다. 이름이라도 있으면 유추하거나 짐작을 할 수 있을 텐데, 또 그 이름 자체에서 드러나는 의미를 찾으려고 할 텐데 말이다. 그러니까 이름은 의미를 쉽게 구분하거나 찾으려는 행위의 결과다. 어떤 이름인 경우 생긴 모양이나 혹은 어떤 사람의 사건과 관련이 있었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특별함이 있는 이유가 있을 때 명명된다. 결국 이름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서로 알 수 있도록 공동 사용하기 위한 소통의 목적으로 지어졌다. 그래서 이름에는 나름대로 스스로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한자 문화권에 사는 우리는 한글에 많은 한자를 병행해야만 이해하는 글이 많다. 이는 한글도 한
1. 남반미술에서부터 20세기 일본 미술 일본의 근대는 메이지 유신과 함께 찾아왔다. 메이지 시대는 일본의 신구(新舊) 세력이 새롭게 재편되는 격동의 시기이기도 한다. 1889년은 일본 제국 헌법이 발포된 해이고 이어서 이듬해 교육칙어가 발포되면서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체제가 확립되어 갔다. 이렇듯 일본의 근대적인 미술은 곧 그런 근대체제 위에서 피어난 것이지만 일본의 근대미술은 메이지 유신과 함께 시작된 것은 아니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내항으로부터 1858년의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에 의해 에도 막부에 서양화(西洋化)의 시작을 알렸고, 쇄국정책의 붕괴와 함께 바야흐로 일본근대체제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일본의 개항 항구 요코하마에는 미국, 러시아, 영국의 상선들이 빈번히 왕래하면서 외국인 거류지로 정비되어 갔다. 요코하마는 국제도시로써 서양의 문물과 기술, 예술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다.1) 일본미술사에서 서양 풍경화의 일본 유입은 1571년 최초의 포르투갈 배가 나가사키에 입항하면서부터 서서히 점화되고 있었다. 1639년(寬永 16)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 막부가 쇄국정책을 실행하기까지 약 70년간 외국 무역 상관(商館)이 운
풍경화(landscape painting)는 자연의 경치를 그린 그림, 혹은 자연과 함께 생활하는 전경을 그린 그림이다. 거기에는 산, 숲, 들판, 바다, 강, 호수, 개울, 계곡, 마을 등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모든 아름다움에는 관능적인 감정이 깊숙이 숨어있다. 풍경화는 회화의 한 장르로써, 르네상스 시기에 독립적으로 생겨난 개념이다. 물론 풍경화라는 장르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풍경 그림들은 동‧서양에 존재했다. 서양의 풍경화를 동양에서는 ‘산수화(山水畵)’라고 불렀지만, 두 지역이 종교적 세계관이 달랐고, 기름으로 그리는 유화와 물로 그리는 수묵이라는 재료가 다른 만큼 그 기법 또한 달랐으며, 특히 자연을 대하는 방식에서 크게 차이가 났다. 독립적인 풍경화가 나타나기 전, 순수한 미적 관조의 풍경을 그린 그림은 B.C. 30~20년경 ‘리비아의 저택(Villa of Livia)’에 프레스코로 그려진 아름다운 정원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지금으로부터 2100년 전 그려진 풍경 그림으로 아름다운 숲속에 과일나무와 자유롭고 노는 여러 마리 새가 그려졌다. 장소가 지하실 실내 윗벽에 초록과 청색의 싱그러운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도록 시원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