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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소설] 라이브 카페,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13)

13.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봄비
내리면
생각나는 사람

 

카페가 쉬는 날, 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에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도 하게 되었다. 서울에 살 때 종종 오르던 북한산도 다녀왔다. 살던 집은 구기동으로 북한산 아래 동네고, 나는 이 높은 산을 뒷동산이듯 즐겨 오르내리곤 했었다. 산에 접어든지 불과 30여 분, 퉁퉁한 배를 열어놓고 하늘 향에 두 팔 벌려 누워 있는 것 같아 보이는 널찍한 바위에 덥석 앉아, 올라왔던 길을 내려다보면 방금 온 길 뒤로 서울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언제 보아도 서울은 정말 무지 크다. 산 초입에서 산 김밥을 꺼내 우린 입에 넣었다. 아버지와 자주 앉았다 가곤 하던 우리의 바위-이래서 우리끼리는 부자바위라고 불렀다-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집게손가락으로 지도를 그려나간다. 우리가 앉은 오른쪽(서쪽)으로 김포공항이 보이고, 비행기를 타고 있듯 밑으로 한참 손가락을 상상으로 짚어 가면 한반도 땅 아래 조각처럼 떨어져 있는,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카페로도 간다. 왼쪽으로 손가락만 옮기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시는 하남시도 다녀올 수가 있다. 남산은 물론, 관악산, 청계산, 한라산도 손가락 하나로 다 그릴 수 있는 곳, 북한산의 비봉바위다.

 

 

“여기서 보니까 제주도 집도 카페도 모두 북한산 아래네 뭐. 지금도 북한산은 우리 동네 뒷동산이라는 말이야, 그치 않아? 좀 멀어졌을 뿐이지. 크게 생각하고 살라고 했지? 아빠가.”

 

구기동 집을 떠날 때 아버지는 이내 떠나지 못하고 주저했었다. 이삿짐이 트럭에 다 옮겨진 뒤에도 텅 빈 방들을 둘러보며 아버지는 떠나기를 머뭇거렸다. ‘이제 그만 가자, 아저씨들 기다려’ 하며 손을 끌어봤지만 묶인 마음에 주저하며 머뭇거리던 아버지의 발을 떼 낼 순 없었다.

 

“아빠, 나중에 이 집, 우리가 다시 사자. 그러면 되지, 뭐! 지금은 잠깐 남에게 빌려준 거라고 생각하고. 아빠가 그랬잖아. 일체유심조라고.”

 

다듬잇돌들을 모아 소파 탁자로 대용하고 옆엔 방석 네 개를 깔아 소파의자로 쓰던, 이젠 다 비워진 텅 빈 거실에 앉아 아버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디, 이 집을 잃어서겠니?”

 

아버지는 벽화로 채워진 거실 한 면을 또 쳐다보았다. 지긋이 바라보았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도배를 할 때 비워뒀었고 그 자리에 아버지는 두 달 꼬박 걸려 그림을 앉혔다. 갖가지 들꽃을 모아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밀화 같지만 조금 떨어져 보면 추상화 같기도 한 그림이었다.

 

“종이나 캔버스에다 그리는 건데 그랬어. 그릴 땐 마냥 여기서 살 줄 알았지? 벽에다가 바로 그렸으니 떼 갈 수도 없고. 새로 이사 올 분들이 그랬다며? 저 그림 때문에 이 집이 더 맘에 들었다고. 우리가 이사 가도 그대로 놔둘 거라고 했잖아. 그 분들이 그림값을 따로 더 드려야 하냐는 농담까지 했었는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바로 저 그림을 두고 하는 말이네. 오래오래 사랑 받고 살 거야, 아버지의 저 그림. 그리고 좀 이따가 이 집 다시 사서 우리가 또 돌아올 거니까.”

 

나는 위로하려 했다. 안다, 아버지는 그림이 아니라, 이 집 때문이 아니라 그 여자를 두고 갈 수 없어서라는 것을.

 

“저 그림에선 하늘이 땅이야. 꽃들이 위에서 아래로 뻗어 있고 구름은 아래, 땅 위에서 떠다니구. 가까이서 보니까 개미도 그려놨던데, 아빠 그림 속의 개미들은 여기선 새가 되어 있고. 어떻게 저런 엉뚱한 상상을 할 수 있을까? 아빠는 예술 분야로 나갔어야 했어. 맞아, 그래야했다니까!”

 

“이제 나가자.”

 

진중한 표정의 아버지 대답이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었으니 식사부터 하고 떠나자며 이삿짐 아저씨에게 점심값을 건넸고, 우리는 아버지의 제안으로 짜장면을 시켜 빈 집 빈 방에 엉덩이를 깔고 짜장면도 깔고 먹었다.

 

“약속을 생각해봤단다. 약속이란 걸 뭐라고 생각하니?”
“지키는 것, 지켜야 하는 것.”
“그러니? 그래야겠지.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약속은 더 많을 거다. 약속을 할 때야 누구나 지킬 수 있을 거라 믿으니 하겠지. 악의가 없다면. 그러나, 처음의 마음과는 달리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 자기와의 약속도 그렇고 남과의 약속도 그렇고. 어느 약속이든 자기로부터 시작하잖니? 남과의 약속마저도. 아빠는 약속을 자기신뢰라고, 자기믿음이라고 생각해. 자기자신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에서 모든 약속은 비롯된다고 보거든. 자기믿음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 이게 아빠가 생각하는 약속이란다. 이래서 단지 지키지 못했다 해서 어긴 약속을 다 비난하고 싶지는 않아. 어떻게 다 완전할 수가 있겠니. 그러나 자각하는 것, 약속을 어기게 된 이유를 자기는 알 거 아냐? 약속은 모두 자기로부터 시작한다고 했지? 지키든 그렇지 못하든 자각하는 것, 약속은 자각인 거지. 또 자기기만이 되기도 하고.”

 

 

구기동 집은 아버지의 동료이자 친구며 동반자로, 내가 한 때 엄마라고 불렀던 한 여자를 위해 아버지가 마련한 집이었다. 그림이 완성되던 날, 방안 그 벽 앞에서 우리는 파티를 했었다. 마치 야외에 나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 엄마가 먼저 이런 말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생생한데 하물며 아버지야......

 

“이 그림에선 봄꽃들이 봄비처럼 쏟아지고 있어. 올 봄에 여기서 우리 다시 진짜 파티하자. 우리 세 식구가 가족으로 첫 출발하는 진짜 파티!”

 

나는 싱거운 마음이 들어 김밥을 단무지로 한 번 더 말아 아버지 입안에 넣어줬다.

 

“할머니 댁까지 가려면 서둘러 하산해야겠다.”

 

아버지가 먼저 엉덩이를 털었고 나도 뒤따랐다. 산을 내려와서도 우린 더 내려갈 것 없는 평지를 마냥 걸었다. 버스를 타야 할 거리에 전철역이 있었지만 걸어보자 합심을 해서다. 역으로 가는 길에「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와 달리 정식적일 것 같은 라이브 카페가 있었다. 들어가 볼까, 또 마음을 합쳤고 생노래가 나올 때까지 우린 그 안에서 더 기다려야 했다. 이러다가 오늘 중에 집에는 못 들어가겠다 했지만 나는 불현듯 아버지와 목욕하고 싶어졌다.

 

“찜질방이라는 곳, 가 봤어?”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돈데. 우리 거기 한번 가볼까, 오늘밤, 어때?”

 

공연이 다 끝나는 늦게까지 그 라이브 카페에 앉아있을 수가 있었다. 여자 가수가 나와, <끝이 없는 길>, <나뭇잎 사이로>, <내 마음의 보석상자>, <세노야> 등등 조용한 노래들을 들려줬다.

 

“잘 부른다, 그지?”

 

“기타도 잘 치네!”

 

아버지도 나도 아버지와 비교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선 구경만 해야 되잖아. 우리「나서고존」에서는 가수와 손님, 구별 없이 서로 어울릴 수 있는데. 우리가 더 낫네 훨. 나서서 고전을 면치 못할 수도 있지만 뭐 별 상관없잖아?「나서고존」에서는 말야!”

 

아버지를 띄웠다. 화장실에 다녀오자 그 가수가 귀에 익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요 바람 불면 바람 속을 걸어요
외로운 내 가슴에 남 몰래 다가와
사랑 심어 놓고 떠나간 그 사람을」

 

아버지 손에 볼펜이 쥐어 있었다. 아버지가 신청한 곡이었다.

나는요 정말 미워하지 않아요
그댄 낙엽지면 무슨 생각하나요
나는요 둘이 걷던 솔밭길 홀로 걸어요
솔밭길 홀로 걸어요」

 

노래가 끝나자 가수는 특별히 아버지에게 목례를 했다.

 

“아빠, 이 노래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지? 근데 화장실 간 사이에 불러서 난 봄은 못 듣고 가을만 들었네. 화장실에서 봄을 보내다니, 이런. 다시 내가 신청해 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공연을 다 마치고 마침 일어나려는 가수에게 ‘앵콜 앵콜’ 했다. 손님으로부터 짠박수만 받아왔던 지라-그렇잖은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박수에, 칭찬에 너무 야박하지 않던가. 2만 불 시대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도-여가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웃음을 띠며 다시 의자를 당겼다. 뻔뻔하다고 해야 하나. 괌으로 가기 전에는 난 이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나 역시 무척이나 내성적이어서 남 앞에 나서는 일을 무지 꺼려했었다. 그러나 괌에 가서는 뻔뻔하다고 느껴왔던 행동들이 거기선 자연스러웠다. 자기를 표현하는 데 있어 자기도 남들도 행동으로나 심적으로나 우리보다도 제약이 덜 했다. 고등학교 수업도 선생님의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수업의 상당 시간을 토론에 배당하고 있었기에 처음 부자연스럽던 어색함에서 차츰 벗어날 수 있었다. 자기표현을 못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는 곳이 그곳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앵콜을 외친 데는 더 다른 큰 이유가 있었다. 가수는 앵콜을 받아들였고 노래책을 뒤적였다.

 

“아니, 방금 전에 부르셨던 노래루 다시요. 제가 화장실에 간 사이라 앞부분을 듣지 못했거든요. 내가 무지 좋아하는 노래라......”

 

 

속닥속닥 자기네끼리만 얘기하며 몇 번 의례적인 박수만 보냈던 다른 손님들이 깔깔깔 웃어대며 박수를 보태 격려했다. 아마도 ‘화장실’이란 말이 그들을 웃게 만든 것 같았다. 어쨌든 가수에게 뿐만 아니라 가수 아닌 내게도 박수를 쳐주는 것 같았다. 나를 보고 손님들이 웃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서 있는 나를 올려다봤지만 웃진 않았다. 아버지의 그 표정을 보자 머쓱하게 웃고 있던 나는 웃음이 지워지고 가슴이 울컥거렸다. 그리고 조용히 앉았다. 아버지가 더 좋아하는 노래를 아버지에게 한 번 더 들려주고 싶은 아들의 마음을 눈치 챈 것인가.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나는요 비가 오면 추억 속에 잠겨요
...... ......
...... ......
외로운 내 가슴에 남 몰래 다가와
사랑 심어 놓고 떠나간 그 사람을
나는요 정말 미워하지 않아요
...... ......
나는요 둘이 걷던 솔밭길 홀로 걸어요
솔밭길 홀로 걸어요」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라이브 카페를 나와 소금방인가 황토방인가, 아무튼 뜨거운 열로 인해 땀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을 때였다. 그 엄마는, ‘올 봄에 여기서 우리 다시 진짜 파티하자. 우리 세 식구가 가족으로서 첫 출발하는 진짜 파티.’ 이 약속을 먼저 꺼내면서 아버지에게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를 불러달라고 했었다. 봄이 오기 전에 그 엄마는 우리 곁을 떠났다. 내 가슴에서 엄마는 사라지고 아버지의 지난 여자친구로, 엄마가 아닌 한 아줌마로 나의 기억에 그저 남아 있을 뿐이다. >>> 글.그림=오동명/ 다음 주 이 시간에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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