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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소설] 라이브 카페-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2)

2. 홀로 아리랑

 


동업
하려다
의만 상하겠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 카페를 열기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기에 적힌 날짜도 내 기억과 엇비슷했다. 아버지는 마냥 쉴 수만은 없다며 여기저기 가게를 알아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메일로 내게,

 

‘아들만 없다면 난 더 쉬어도 되는데...’

 

라며 잠시 나를 우울하게 했다. 옹종해져 답했다.

 

‘이 아들, 돌아갈까요?’

 

아버지는 계산을 해본 게다. 따져본 게다.

 

‘그냥 거기 있거라. 여기 와도 그 돈은 써얄 테니까. 남들 다 해주는 것, 안 해 줄 수도 없고.’

 

 

사교육비, 그러니까 과외비를 염려한 게 분명하다. 이런 뒤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훌쩍, 정말 뜬금없이, 유일한 가족인 나와 상의 한 번 없이 제주도로 이사했다. 팔고 이사 간 후 서울의 아파트 값은 훌쩍 뛰기 시작했다. 더 올랐다는 제주도에선 집이나 땅을 사지 않고 세 들어 사니... 아버지는 돈과도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하는, 아버지를 이렇게 말하면 불효자식에 호로자식이란 말을 들을 테지만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으니, 정말 복도 지지리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안다. 나 때문에, 그래도 유학 보내 놓은 아들을 위해 아파트를 팔 수밖에 없었다는 것쯤은. 아버지는 이래도 헤벌쭉 웃는다.

 

“서울에 있으면 뭐 하냐? 실업자들끼리 모여 매일 술이나 퍼 마시며 신세타령, 세월 세상 탓만 하고 있을 텐데. 이 기회에 공기 좋은 섬으로 내려가 땅에 채소도 심고 나도 흙과 더불어 살란다. 하기야 아들놈 아니었으면 흙 밟고 살 생각이나 했겠니? 다 잘 된 거구 고마운 거지 뭐.”

 

또, 내가 보기에도 그렇지만 아버지 스스로도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느 누구한테도 부탁하는 일을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남들 흔히들 한다는 은행에서 돈 빌리는 일조차 못한다. 나도 알고 있는 마이너스통장도 없다. 그저 저축해서, 집 팔아서 남은 돈을 은행에 고스란히 넣어두고 그걸 조금씩 줄여가며 사는, 참으로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이다.

 

아버지 친구들은 대체로 은행이나 증권회사를 다니거나 그곳을 퇴사한 분들이 많다. 이런 친구들을 많이 뒀음에도 불구하고 저축예금이나 정기예금 정도로만 은행과 거래를 트고 있을 뿐이다.

 

“빚이 없으니 나만한 부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부자는 결코 아니었다. 가난 쪽에 가깝다. 이런 아버지가 돈을 벌어야겠다고 작심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아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가 보다. 취직을 할까? 먼저 나온 자리는 아파트 경비직. 친구 중에 자격증 따서 대기업을 일찍 그만 두고 큰 아파트단지의 관리소장하는 분이 있는데 그곳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단다. 그나마 포기했다.

 

 

“이것도 친구 빽 덕을 보는 거잖냐? 올바른 방법은 아닌 것 같다. 남이 나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서야 되겠니?”

 

아버지는 바보인 게 틀림없다. 남 입장을 걱정해줄 처지가 아닌데... 이쯤 되면 착한 게 아니라 바보다. 우리 아버진 바보. 내 아버지가 바보라니,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러나 맞는 걸 어떡하나.

 

“걱정마라. 이 나이에 쓸 데도 없지만, 어찌 됐든 내가 덜 먹고 덜 쓰면 하나 있는 아들 공부 뒷바라지쯤은 거뜬하다. 나랑 약속했잖니? 고등학교까지만 가르쳐주면 대학부터는 네가 학비를 벌거나 장학금을 타서든 모두 네 힘으로 다닐 거라고 했었지? 아빠는 네가 대학 들어가는 날부터 해방이다. 바로 그 날은 아빠가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세계일주무전여행을 떠나는 날이 될 거다. 알겠느냐, 아들아! 네 심장 속에 푹 박아 명심해두거라. 아빠의 이 자유를!”

 

나갈 일자리며 차릴 가게며,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절친한 친구 세 명이 동업하기로 일단 마음을 맞췄다. 은행에서 지점장까지 지냈다는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분은 안경을 쓴데다가 머리도 벗겨진 모습에서 풍기는 인상 그대로 무척 수리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무얼 하든 작게 차려서는 절대 몇 달도 견디지 못해. 가게의 입지조건으로 당연히 목도 좋아야 하고. 쩐이 웬만큼 있어서는 택도 없는데, 너희들 얼마나 내놓을 수 있는 거냐?”

 

아버지를 포함해 두 명의 친구는 금세 소침해지고 말았다.

 

“얼마나 있어야 되는데? 그러다가 그나마 조금 있는 거 다 날려버리면 어쩌냐?”

 

아버지만큼이나 소심한 친구가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이 아니더냐. 날려버릴 확률은 적게 들이면 들일수록 높다는 거지. 뒤집어 말하면, 많이 들이면 들일수록 성공할, 그러니까 돈 벌 확률은 더 높다는 거야. 요즘 세상엔 게꽁지만한 돈으론 택도 없어, 없다고.”

 

아버지도,

 

“그거야 알지. 그러나 발도 보고 뻗으라고 했어. 우리 분수에 맞는 만큼만 해야지 너무 무리했다가는...”

 

“답답한 친구, 정말 답답하네. 이건 욕심이 아니라 세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하는 적절타당한 대응책이라고. 봐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동네 구멍가게는 다 죽었지? 음식점도 작은 데는 망하는 세상이 됐어. 어마어마하게 큰 음식점에만 사람들이 버글버글 하잖아. 이건 추세야, 추세라고!”

 

“그것 정도는 우리도 아는데, 그런 걸 할 만한 많은 돈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거지.”

 

“은행에서 융자 받아서라도 해야지. 다들 집 한 채는 있잖아? 일단 내놓을 수 있는 액수를 먼저 말해봐. 내가 그것에 맞춰 대형 회센터든 하다못해 편의점이든 업종을 정하고 모자라는 나머지 자금은 내가 은행이든 어디든 알아볼 테니까. 너희는 슬슬 융자서류나 준비해.”

 

소심한 두 친구는 의기양양한 친구 앞에서 옹송망송했다.

 

“소주나 입에 털지 말고 그 입으로 다 터놓고 말해봐. 얼마씩이나 투자할 수 있는지. 안 되면 포기하는 거구. 이번에 명예퇴직금조로 더 좀 챙겼잖냐? 그 돈, 찔끔찔끔 쓰다보면 금세 없애고 만다. 그러기 전에... 그리고 말이야. 우리 이 나이에 그럴듯한 사업체로 세상에 보란 듯이 본때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우리라고 늘 이 타령으로 살라는 법 있냐구. 사기열전에도 이런 말이 있더라.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그래서 돈이 많은 자가 역시 돈을 더 모을 수가 있다는 거야. 옛 고전은 하나 틀린 말이 없다니까.”

 

 

하지만, 화합하기 위해 마련된 술자리는 아버지의 이 한 마디로 끝이 났고 결국 동업도 없던 일로 했다.

 

“ ‘이익에 사로잡히면 지혜가 흐려진다.’는 옛 말도 있던데...”

 

아버지는 아닥치듯 한 친구로부터 답답하다는 말 외에 꽉 막힌 놈이라는 말을 더 들어야 했고 덤으로,

 

“넌 맨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땅만 파다 살다죽어라. 참 너, 섬으로 이사 가려 한다며? 집 팔고 가면 돈 좀 잡아둔 것 있겠네. 이럴 때 그 돈 내게 맡기고 넌 흙을 파든 바다를 파든...”

 

또 다른 친구는 아버지가 포기한 아파트 경비라는 직장을 얻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정작 포기하지 않았다.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어느 날 또 메일로,

 

“인터넷에선 노래를 다운 받을 수 있다며? ‘홀로 아리랑’을 찾아서 아빠한테 보내줄 수 있겠니? 공부하는데 방해되지 않는다면. 아주 오래된 노래라 너희들은 모르는 노래겠지만, 이런 오래된 노래도 다운 받을 수가 있나? 서유석이란 옛날 가수가 부른 노래거든?”

 

아버지는 동업계획이 깨진 뒤 그 친구와는 우정마저 서먹해졌다. 대신 이 노래, ‘홀로 아리랑’을 종종 부르곤 했다.

 

“쉬운 코드라서 이 유행가는 아빠가 기타 칠 수 있겠네.”

 

“그래?”

 

무척 좋아한다던 노래를 태평양 넓은 바다 건너 내게로 전해왔다.

 

 

「가다가 홀로 섬에 닻을 내리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해 보자. ~~~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그리고 약 두어 달 뒤, 뜬금없이 아버지는 라이브카페를 차릴 거라고 했다.

 

“몇 년째 빈 채로 남겨진 허름한 창고인데 아빠 보고 고쳐서 써도 된다고 주인이 그러더라. 제주도에 내려와서 알게 된, 친구 같이 지내는 사람인데, 집은 사람이 살아야 한다며 그 집을 사람이 살게끔 만 해 달래. 수리비가 좀 들긴 하겠지만 전세금이나 월세 없이 수리만 해서 쓰라더구나.”

 

사람 모으는 수단도 없고 돈 벌 재주는 아예 재능 밖이라며 내놓은 지 오래 된 아버지가 무슨 수로 라이브카페를 꾸려가겠다는 건지. 난, 계속 공부나 할 수 있는 건지 여간만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중도에 돌아가면 검정고시를 또 봐야 한다. 중학교를 그렇게 마쳤듯이. 내 미래도 아버지와 더불어 막막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또 사람을 너무 믿는 경향이 있는 게 탈이다. 사람을 당신마음처럼 믿다가 후회하는 일을 자주 겪곤 했었다. 그 때마다,

 

“믿는 게 뭐 나쁘니? 믿지 않는 게 죄가 되지. 의심하다가 정말 믿어야 할 사람을 놓치는 수도 있지 않겠어?”

 

“근데, 라이브카페? 그냥 식당도 아니고? 어느 가수를 불러올 건데? 그런 카페는 인테리어도 잘 해놔야 손님이 찾아올 거구. 아빠, 돈 적게 들여서 할 수 있다고 해서 공짜는 아니잖아? 함부로 할 게 아닌 것 같은데. 이 어린 아들의 소견으로는, 나는 아니다, 아빠! 그런 데는 차를 몰고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미사리처럼 큰길가에 있어야 하는 걸로 나는 알고 있는데 시골 산길에 있다며? 그것도 제주도? 올레길 옆도 아니고?”

 

보통 바로 메일 답을 보내오던 아버지가 이번에는 며칠 뒤에야 내게 메일을 썼다. 심사숙고, 곰곰이 따져봤는가 보다. 그럼 그래야지. 따져보니 안 되겠다 싶었을 거야. 그럼 그렇지 뭐. 하지만 긴 칩거, 또는 침묵 끝의 대답은 간단했다.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니고 아빠가 해보고 싶은 일을 한번 해보고 싶구나. 지금 아니면 언제 해 보겠니, 아들아! 아빠 나이 이미 쉰! 여직 그렇게 살아왔는데, 우물쭈물하다가 후회하고 싶진 않구나. 내가 하고 싶은 거, 딱, 그래 딱 1년만 해보자!”

 

그리고 아버지가 혼자 나무 사고 못 박고 해서 손수 카페를 꾸몄다고 하는데...<다음 주 이 시간에

 

오동명은?=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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