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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소설] 라이브 카페,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18)

18.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이제
아버진
울보가 아니다

 

아버지는 이제 거의 울지 않는다. 그전엔 드라마를 보다가도 눈물 흘리던 모습을 자주 보았더랬는데 이제는 거의 눈물보기가 힘들다. TV보다가도 조용하다 싶어 돌아보면 여지없이 아버지의 볼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집에 TV를 없앤 이유도 그 중 하나였다. 아버지의 눈물을 말리기 위해.
“군대 가는 날 울지 않으려면 미리 연습해둬야지.”

 

이러면서 헤헤 웃는다.

 

울기도 웃기도 잘 하는 아버지가 울음은 걸러내고 웃기만 하면 좋겠다.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에 혼자 들리곤 하는 여교수가 있다. 40대 초반의 꽤 품위 있어 보이는 미모의 중년여인인데 꼭 양주 한 잔에 물을 섞어 마시면서 전혀 어울리지 않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언제나 신청한다. 아버지가 이 노래를 처음엔 심수봉처럼 트로트답도록 청승맞게 불렀다. 가능한 천천히, 충분히 늘어지게, 역시 심수봉이듯 비음을 섞어서 코 막힌 코맹맹이처럼 부르면 되었다.

 

언제나 찾아오는 부두의 이별이 아쉬워 두 손을 꼭 잡았나
눈 앞에 바다를 핑계로 헤어지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보내주는 사람은 말이 없는데 떠나가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해
뱃고동 소리도 울리지 마세요 하루하루 바다만 바라보다
눈물지으며 힘없이 돌아오네 남자는 남자는 다 모두가 그렇게 다
아아 이별의 눈물 보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남잔 다 그래

 

 

여교수는 울고 있었다. 여자는 울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나면 나를 불렀고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다시 한 번 불러줄 수 없냐고, 아니 다시 한 번 더 불러달라고 했다. 그녀가 늘 입고 오는 회색 가디건에는 칸초네나 샹송이 어울렸다. 트로트는 전혀 아니다. 뽕짝에 눈물이라, 신파극이 라이브 카페에서 공연되고 있는 것이었다.

 

“오빠 십팔번이었어요.”
“오빠 때문에 우시는 거예요?”

 

아버지보다 난 더 궁금했다.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되는 얼굴 같아서였다. 형제로 인해 울 수 있다는 사실에도 의아해 했다. 동생도 누나도 형도 없는 나로서는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른들 사이에 끼어든다고 눈총을 받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여교수와 아버지, 어른들만 남겨놓고 돌아서야 했다. 궁금했다. 오빠 때문에 우는 여자의 속사정을 엿듣기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여동생 또는 형이 있었으면 했다. 저렇게 예쁜 여동생을 울게 하는 오빠는 참 나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선생님이 미국에 유학 가 있는 중에 오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가 보더라.”

 

여교수가 카페를 떠난 뒤 아버지가 궁금해 할 나를 위해 들려준 한 마디였다. 사연치곤 너무나 짧았다.

 

“어른이 누구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었겠니. 그래서 자리를 비키라고 한 거란다. 왜 울어요? 물으면 누구나 당황스럽지 않겠니? 아들은 그 분 생각해서 물어본 거지만. 섭섭히 생각 말거라.”

 

그러나, 어른들의 대화는 적어도 ‘오빠의 교통사고로~’, 이렇게 짧지는 않았다. 그 여인의 입은 무언가 더 많은 것을 얘기하고 있었고 나는 그날 밤 잠자리에서 짐작과 상상에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눈물은 사람을 잡는다. 아버지도 그랬고 여교수도 그랬다. 왜 울까?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던 때 나도 운 적이 있다. 그 때 나도 많이도 울어댔다. 떨어져 있음에 울었고 울면서 아버지를 더 그리워했더랬다. 매일 전화를 걸어 울먹였다. 보고 싶어 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말을 한 것과 다름없었다. 눈물은 보이면서 말은 솔직하지 못한 게 사람인가 보다. 여교수도 그랬을 것 같다. 하여튼 울먹이며 성화였기에 아버지가 필리핀으로 내쳐 달려왔다. 보름간 나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는 내내 나를 웃기고 서울로 돌아갔다. 한참 뒤에 들었는데 아버지는 나와 헤어진 직 후 필리핀 수빅공항에서 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아들과 헤어져야 했기에 울었고 공부에 정진하는 아들이 든든해서도 눈물을 흘려야 했다.

 

청년의 짐작과 상상은, ‘오빠 때문에~’ 라던 어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게 하진 않았다. 청년에 비친 고운 여교수의 눈물이 한없이 더 슬프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필리핀에서 남자인 내가 운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노래에서는,
「보내주는 사람은 말이 없는데 떠나가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해」
라고 했다.

 

함께 떠나자던 유학은 함께 떠날 수가 없었다. ‘결혼도 않은 여자가 어딜?’ 부모의 반대가 심했다. 남자친구가 우선 떠나기로 했다. 그 친구는 오빠의 고추친구이기도 했다.

 

“먼저 가서 자리 잡아둘게. 오히려 잘 됐는지 몰라. 가서 처음 무지 고생한다잖아. 내가 그 고생 다 해두고 형편 나아질 때 우리 합치자. 그 때쯤이면 부모님도 수그러지시겠지. 기다릴 수 있지? 근데 보고 싶어 어쩌지? 자주 연락할게.”

 

「언제나 찾아오는 부두의 이별이 아쉬워 두 손을 꼭 잡았나」

 

노래처럼 그들도 그랬다. 비행기를 태워 보낸 공항의 이별 후 수 개월 동안 친구는 수도 없이 편지를 보내왔고 전화를 걸어왔다. 보고 싶다고, 빨리 올 수 없느냐고.

 

 

대학원으로 진학해 재회의 날을 고대했다. 회자정리 후 이자정회는 젊었을 때라고 예외일 순 없다. 그 반대도. 5개월쯤 되었을까? 그 뒤 연락이 줄어들었다. 한참 만에 걸려온 전화는 오랜만에도 불구하고 짧았다. ‘논문 쓰느라 바빠서’ 라 했고 믿었다. 하지만 여자란 기우를 현실에다 제대로 맞추는 초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바빠도 전화 정도야 못할까. 그녀는 공부에 치이고 쫓길 때 오히려 유럽으로 먼저 떠난 그 사랑이 더 그리웠고 더 애절했다. 답답하고 막막한 현실은 그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부모님의 완고함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는 것 같다.”

 

곧 볼 수 있겠다고 했다.

 

“아직 오기엔 일러. 여기서 내가 준비해둘 게 아직 더 있거든. 좀 더 형편이 나아졌을 때 그 때 와도 늦지 않아. 멋진 우리의 보금자리에서 널 맞아들이고 싶어서 그래. 보고 싶어 미치겠다. 사랑해.”

 

믿었지 뭔가. 이렇게까지 얘길 해오는데 믿지 않으면 나쁜 사람인 거 아닌가. 그러나 내용은 그랬지만 들려오는 말투는 그전과 사뭇 달랐다. 목소리엔 애절함이 없었고 다분히 황급했다. 그 전화가 마지막이었다. 편지 역시 답장도 없이 무소식이었다.

 

「보내주는 사람은 말이 없는데 떠나가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해」

 

그 뒤, 오빠가, 남자의 친구이기도 한 오빠가 어느 날, 여동생 앞에서 무르춤하며 짤막하게 말했다.
“나쁜 놈”

 

「아주 가는 사람이 약속은 왜 해. 눈멀도록 바다만 지키게 하고」

 

멋진 우리의 보금자리?

 

「사랑했단 말은 하지도 마세요. 못 견디게 네가 좋다고 달콤하던 말 그대로 믿었나」

 

여자는 유학을 떠났다. 그 남자가 있는 독일이 아니라 미국으로 떠났다. 이 때는 부모님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 혼자 공부하다 보면 잊어질 거야.”

 

그녀의 아버지는 딸과의 공항의 이별에서 뒤늦게 후회했다.

 

“그럴 놈이라면 애시...”

 

「잘 가요 쓰린 마음 아무도 몰라주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그녀는 여자의 항구를 남자의 배를 타고 떠났다. 2년 뒤 오빠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불의의 교통사고였고 장례식에 와보지 못했다. 오빠의 십팔번은 남자친구를 떠올리게 했고 그 후로 그녀의 눈은 슬프게 변해갔다.

 

「쓸쓸한 표정 짓고 돌아서선 웃어버리는 남잔 다 그래」

 

돌아서서도 웃지 못하는 여자가 되었다.

 

“아물지 않으면 흉터도 상처로 남아있는 거란다.”

 

아버지는 오래 전 엄마와의 이별 후를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었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 안에 가득한데
이렇게 홀로 누워 천장을 보니 눈 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
잊으려 돌아누운 내 눈가에 말없이 흐르는 이슬방울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 」

 

“미련이 아니라, 아직 사랑이 남아서도 아닌 믿음이 깨진 게 아쉽고 억울한 게지. 그래, 믿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사는 거라고. 미련하다 하더라도... 그래서 눈물이 났을 거야.”

 

눈물을 위한 아버지의 변명이다.

 

“그 믿음마저 없는 지금은 정말 더 삭막해.”

 

손님은 여교수밖에 없던 날, 유학 문제로 상의할 겸 아버지와 셋이서 어른들 자리에 끼일 수 있었다. 젊은 내게도 고운 그 여교수를 가까이에서 보고 있었다. 그녀가 아버지한테 무덤덤하게 말했다.

 

“옆에 그래도 가족이라고 남편이 있으니까 결혼이란 게 편한 게 있긴 해요.”

 

그날 밤, 그녀가 떠나고 아버지는 혼잣말로,
“아직 아물지 않았어. 자조는 아직 옛 애인을 남겨두고 있다는 거거든. 현실을 과거에 묶어두고 그런 말을 어떻게? 그래도 남편이 있으니까 편하다고? 그래도 라니? 가족이란 게 얼마나 소중한 건데...”

 

그 뒤에도 여교수는 여전히 양주 한 잔에 물을 섞으려 했지만 아버지가 그녀의 손에 들린 물병을 잡으며,
“섞지 말고 스트레이트로 마셔보세요.”

 

이렇게까지 명령조의 말을 하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특히 여자 앞에서. 이러면서 무대로 나가 그녀가 아직 주문도 않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불러재꼈다. 이번엔 흐늘흐늘한 뽕짝조가 아니었다. 고고리듬 같기도 하고 디스코풍인 듯도 한, 어쨌든 심금을 울리는 늘어지거나 코맹맹이 소리는 전혀 아니었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기타를 마치 드럼처럼 두들겨댔다. 연주자 스스로 흥이 났고 관객 역시 흥에 겨워 어깨가 절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흥이 지나치면 화를 내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아버지의 모습이 그랬다. 노래가 다 끝나도록 여교수의 눈에선 여느 때와 같지 않게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독주를 물이든 뭐로든 희석시켜 마시면 더 머리가 아파요. 당장은 마시기 편할지 모르오나 더 오래 골치가 지근거리지요. 기억도 그렇겠지요. 지울 수 있는 것은 깨끗이 지워버리는 게 낫지 않겠어요? 골치 아픈 거, 남겨두지 마시고 스트레이트로 스트레스를 씻어내세요.”

 

마이크를 붙들고 뜬금없이 이러는 아버지가,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저 중동의 옛 법률이 있었다지요? ‘아픔에 아픔, 눈물엔 눈물’로 바꿔 말하고 싶네요, 지금. 완전한 치유는 원인퇴치부터라잖아요. 눈물을 다 말리고 나니 이제 울 일이 있어도 눈물은 안 나오더라고요.”

 

 

     
 
너스레는 짓궂음이며 이런 짓궂은 행동을 하는 50대 중반의 아버지가 이럴 땐 아이 같다. 전혀 주눅 들지 않아야 아이답고 짓궂고 때로는 경망스럽다 해도 말썽꾸러기여야 아이인 것이다. 이래서 아이들은 모두 자신감이 넘친다. 자신감이 넘치기에 장난도 심하고 엉뚱할 수밖에 없다.「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가게에서 보는 아버지는 천생 개구쟁이, 그대로다.

 

“우세요, 맘껏. 오늘 다 흘려보내세요. 아니 안엣것 다 쏟아내 버리세요. 눈물을 다 말려버리세요.”

 

「당신은 울고 있네요. 잊은 줄 알았었는데
찻잔에 어리는 추억을 보며 당신도 울고 있네요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을 그 누가 알았던가요
옛날에 옛날에 내가 울듯이 당신도 울고 있네요
한 때는 당신을 미워했지요 남겨진 상처가 너무 아파서
당신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나 혼자 방황했었죠
당신도 울고 있네요. 잊은 줄 알았었는데
옛날에 옛날에 내가 울듯이 당신도 울고 있네요」

 

“카페 사장님 덕분에 ‘남자는 항구 여자는 배’가 되었어요.”

 

훗날, 여교수가 고맙다고 했을 때,

 

“그럼, 앞으로는 이렇게 개사해서 불러도 되겠습니까? 「이별의 눈물 보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여잔 다 그래」로 말입니다.”

 

아버지의 너스레가 또 시작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청승풍의 심수봉과는 전혀 다른 신바람풍의 <백만 송이 장미>를 불렀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던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오라는
진실한 사랑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이젠 모두가 떠날지라도 그러나 사랑은 계속될 거야
저별에서 나를 찾아온 그토록 기다려준 사람이 있네

 

“여교수님 어디에 뭐 많이 낫겠다, 아빠. 울다가 웃다가... 어떻게 된 게 아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짓궂어지냐? 나이를 거꾸로 먹어.”

 

이런 말을 하는 나는 즐겁다. 글.그림=오동명/ 다음 주 이 시간에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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