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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소설] 라이브 카페,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17)

17.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항상
새로운
후회 후회 후회

 

문을 채 열기도 전에 손님이 찾아오는 날이 있는가 하면, 문을 열어놓은 지 꽤 오래 되었는데도 손님이 들지 않는 날도 있다. 아버지는 그대로 놔두면 되는 손쉬운 CD 플레이어 대신 LP판을 30~40분마다 손수 바꿔가며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고, 나는 책을 읽든가 손님용 테이블에 엎드려 졸면서 문 열리는 소리를 기다린다. 마음 편히 들을 수 있는 ‘캐논’이나 ‘하늘로’ 또는 ‘월광’과 같은 피아노곡은 더 졸게 만들곤 하는데, 이럴 땐 기연가미연가한 세상에서 헤매기도 한다.

 

“아빠, 오늘 밤 길에서 밤샐 거야? 정말 길에서 노숙할 거냐고? 농담이었지?”

 

아버지는 캔 맥주와 주전부리들이 담긴 비닐봉투를 들어보였다.

 

“정말이지 않고. 그러려고 사 놓은 거잖아, 이거!”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가 꿈처럼 졸음 속에서 가물가물 피어났다. 그 때 아버지와 나는 일본의 해변 도시, 니가타에 있었더랬다. 여름이었지만 바닷가 바람은 차가웠다. 밤이었다. 깜깜한 바다는 낮에 보던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물텀벙이라도 할 양 달려들었던 바다는 도망치고 싶은 바다로 변해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는 오직 소리로만 바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소리는 역시 낮하고는 달랐다. 무서움, 두려움, 공포였다.

 

“춥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난 도저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꼭 안았다. 그렇다고 추위가 가셔지진 않았다. 더군다나 무서움은 더 가려지지 않았다.

 

“저 앞바다가 동해야. 근데 이 나라 이 땅에서는 일본해라고 부르지?”

 

낮에 한 말을 또 했다. 이 말을 하고 나서 한참 동안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침묵도 낮에 하던 모습과 같았다. 나도 낮과 같은 말로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다. 볼을 볼록거리는 것만 달랐다.

 

“저 바다가 동해라고 불러 달랬어? 일본해라고 불러 달랬어? 바다는 그대로 똑같은데 동해·일본해 갈라놓고 싸움질을 하고 있으니... 당사자는 말 한 마디 없이 가만있는데 보는 자들이 야단이야.”

 

고개만 끄덕이며 아버지는 바다에서 눈을 더 떼지 못하고 있었다. 보이지도 않는 검은 바다를 아버지는 니가타 버스정류장에서부터 동해바다로 오는 길바닥에 100m 간격으로 일본해라고 새겨 박아놓은 쇠붙이판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물끄러미 한참 내려다보았다.

 

“강릉에도 이런 비슷한 거 있었던가?”
“아직 못 봤는데.”

 

난, 지금쯤 우리도 그 비슷한 걸 흉내 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삼켜버린 듯한 어두운 바다는 낮에도 건너편의 나라, 한국땅도 보여주지 않았다. 일본해를 바라보고 있는 니가타에선 바다 저 편은 아득했다. 너무나 아득했다.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속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건너려 했을까? 보이지도 않는 저 너머에 육지가 있을 거라고... 저 바다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니?”

 

팔을 뻗어 방향을 가늠하며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에 우리나라가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수중왕릉.”

 

경주 감포 앞바다의 작은 바위 속 신라 문무왕릉임을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결국 천 년 뒤에 빼앗기고 말았지 않았니? 지금 백 년 지났나? 그런데 다시...”

 

자정쯤 따자던 캔 꼭지를 미리 따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나중에 마실래?”

 

처음 마시는 술이었다. 무섭기도 하고 춥기도 하고, 하룻밤의 노숙에 자신도 없었다.

 

“도둑이 드는 집은 어떤 데일까?”
“부잣집이지 뭐.”
“문이 허술한 집이 아닐까? 문단속이 안 돼 있는 집일 것이다.”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 같이 작은 빛 하나가 다른 별들 사이로 흘러오고 있었다. 한국 쪽에서 날아오는 별이었다. 비행기도 없던 때에 남에게 우리 땅을 비워주고 말았던 적어도 세 번의 역사가 떠올랐다. 맥주를 이번에는 내가 울컥 삼켰다.

 

“내 아들은 요즘 자기 문단속은 잘 하고 있나?”

 

내게 이렇게 종종 물어오는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굳이 동해안의 도시이며 일본해의 도시이기도 한 일본의 니가타를 가보자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굳이 그곳에서 밤을 새우고자 하려 했던 이유를 돌이켜보니 알 듯했다.

 

 

“너를 세상에 내놓았지 한국에만 내놓은 것은 아니다.”
“알아. 그렇다고 한국을 잊으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라는 것도 지금 아빠가 더 할 거라는 것도 알아. 진짜 여기서 밤 샐 거야?”
“속초에선 오징어배라도 보이는데 여기선 아무 것도 안 보이는구나.”

 

우리는 터벅터벅 걸어서 니가타 시내로 향했다. 호텔을 잡을 줄 알았는데 벤치가 놓인 작은 공원으로 들어섰다.

 

“아빠가 돈도 없지만 호텔에 들어가면 씻고 바로 잠들 거 아니냐. 여기 있으면 그럭저럭 아들하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 아빠는 좋은데. 오랜만이잖아. 1년이나 우리가 떨어져 있었지 않았니?”

 

지나던 경찰차가 멈춰 섰고 신분을 확인했다. 싼 호텔을 알아봐준다며 경찰서로 우릴 데리고 갔다. 일본 경찰차를 다 타봤다. 경찰서의 야간 당직자들이 다 나와 우리를 에워쌌다. 두 사람이 3천 엔(당시 우리나라 돈으론 약 3만원에 해당) 이하에 묵을 수 있는 숙박지는 없다고 했다. 외국에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을 얼굴을 한 그네들이 서로 쳐다보며 낄낄 비웃어댔다. 경찰서에서 재워주려나 했지만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니가타 경찰서를 나오면서 우리나라 경찰이라면 재워주지 않았을까 라며 아쉬워했다. 결국 공원 긴 의자에서 밤을 새우고 말았는데, 잠자리가 없는 밤은 참으로 더 길었다. 아들을 노숙자로 만들어 놓은 아버지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가뜩이나 튀어나온 입술을 내밀며 하룻밤을 지겹게 새워야 했으니 밤은 더 길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연신 내게 무언가 말을 붙여왔지만 못 들은 척 했다. 뾰루퉁한 채로 자는 척 했다. 기껏 한 말은 이 하나였다.

 

“입이 얼어서 말이 안 나와!”

 

정말 굳어있었다.

 

“아들하고 밤 새워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데... 재밌잖니? 별도 보며, 달도 떴네.”

 

호텔에서는 못 하나? 하고 따지고 싶었지만 방 안에서는 못 보는 별, 달을 운운할 터이니 소용없을 줄 알고 입은커녕 눈도 빠끔대지 않았다. 가슴까지 굳어있었던 게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찾아볼까?”

 

건드리면 몸을 말아 죽은 척 하는 거미나 콩벌레처럼 두 팔로 얼굴을 감싸고 이마를 무릎에 박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새벽 2시. 이제 호텔 들어가서 뭘 하겠다는 건가. 들어가서 여기서 못한 얘기 더 하자고? 어림없다며 침묵으로 몸을 말고 콩벌레 시위를 계속해댔다. 등 위로 무언가 덮여졌고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졸음으로 옅던 잠이 꿈으로까지 깊숙이 빠져들어 아버지가 깨운 뒤에도 여전히 나는 일본의 지방도시의 거리에서 잠자고 있었다.

 

“피곤하지, 요즘? 이 가게에 묶여 있으려니 답답할 거고...”
“여기 어디야?”
“그 새 꿈을 꿨던 게로구나? 어디긴 카페지.”

 

눈을 비비면서 아버지의 목을 꼭 안았다.

 

“미안해.”
“뭐가?”
“아니, 그냥.”
“손님이 조금 후 올라오신다고 전화가 왔어. 그 동안 내실에 들어가 쉬렴.”
“아빠, 왜 그 때 노래를 안 불러줬어?”

 

악보가 없으면 어떤 가요도 부를 수 없는 아버지라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가곡은 외우고 있는 게 몇 있잖아. <그리운 금강산>이나 <청산에 살으리라>인가도 있고, 그거, ‘떡갈나무 숲 속에 졸졸졸 흐르는...’ 이 노래도 있고. 왜 그 때 노래를 불러주지 않았어?”
“어데다가 꿈을 두고 온 거니? 지금이라도 불러주렴?”
“아니. 손님이 곧 오신다는데... 그 때 노래를 불러줬더라면 어쩌면 졸지 않고 투정도 부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아빠랑 밤도 지샐 수 있었을 거구.”

 

더 자야겠나 보다며 아버지는 내 등을 도닥여줬다.

 

“꿈을 꾼 게로구나. 어떤 꿈을 꿨는지 모르나, 다시 자면 그 꿈이 드라마 연속극처럼 이어질지도 몰라. 어서 들어가렴. 손님 더 오면 그 때 깨우마.”
“아니야, 꿈이. 꿈 같은데 꿈은 아니었어. 이어가고 싶은 일도 못 되고. 아빠, 미안해. 지금은 아빠랑 거리에서 밤샐 수 있을 것 같은데, 언제 우리 한번 다시 도전해볼까? 노숙 말이야. 노숙자가 되어보자고.”

 

아버지가 무슨 일인가 황당해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마침 예약 손님들이 찾아왔고 나는 내실 대신 주방으로 황망히 돌아갔다. 힐끗 쳐다보니 마른 할머니가 노인을 부축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주방으로 건너와 마파두부가 가능하겠느냐고 묻는다. 재료가 하나도 없고 만들어본 적이 없는데 라고 솔직히 대답하려다가 방금 전 꿈 같이 되살아난 지난 일이 떠올라 내 깜냥껏 해보겠다고 했다. 요리는 정성이 가장 최상의 재료라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고.

 

요리책을 들춰보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양파와 후춧가루, 고추장이 보였다. 두부와 다진 쇠고기, 청양고추는 물론 홍고추도 없고 굴소스, 포도씨기름과 전분... 있어야 할 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재료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씩 웃어재꼈다. 정성이라고? 그리고 아래 동네 슈퍼마켓으로 자전거를 타고 냉큼 달려 내려갔다. 중국음식점에서 먹어봤던 마파두부를 음미하면서 연신 내리달렸다.

 

“맵게 해달라시는구나.”

 

 

두부를 깍두기 모양으로 썬 뒤 물기를 빼기 위해 채에 담았고, 음미해본 맛을 내기 위해 간장·설탕·굴소스·고추장 등을 고루 섞어 양념을 준비해뒀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메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 때를 기억하오」

 

홀에서 아버지의 노래가 들려왔다. 우리 부자는 함께 이 노래를 처음 들었고 그 때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빠, 재혼해라. 못 봐주겠다.”

 

나도 따라 울었던 기억이 났다. 청양고추의 맵싸한 기운이 눈을 자극해왔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 씨익 웃어보였더랬다.

 

“울다 웃으면 어디에 뭐난데. ... 엄마가 생각나?”

 

또 씨익 웃으며,

 

“벌써 났다. 하도 울고 웃고 하길 자주 해서인가?”

 

까르륵 웃고 말았고, 재혼 이야기는 우정으로 이어졌다.

 

“부부가 꼭 아니어도 손잡고 늙어갈 수 있는 우정을 가졌으면 됐지, 뭐.”
“아빠 친구 아저씨들은 다 부인이 계시잖아?”

 

고개를 끄덕이며,

 

“아니, 내겐 내 아들에게서 지금 가장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고 오래오래 더 나누고 싶은 걸?”

 

우정은 친구 간에 나누는 거 아니냐고 반발하려다가 멈췄다. 나의 첫 우정도 강아지였지 않은가. 아버지는 그 이후 <어느 60대 노부부이야기>를 듣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주방에선 그 노래가, 아버지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막내아들 대학시험 뜬눈으로 지내던 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 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양념에 두부를 넣고 끓인 뒤 물로 갠 전분을 넣으니 걸쭉해지며 마파두부다워졌다. 색깔도 붉은 게 모양은 일단 그전 식당에서 맛봤던 마파두부였다. 후춧가루를 뿌리려다가 쟁반에 따로 올려놨다. 들고 주방으로 나오니 좁고 어두운 무대 위의 아버지가 나를 보고 씨익 웃어 보인다. 울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세월이 흘러가며 흰머리가 늘어가며
모두가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 」

 

“할아버지가 좀 전에 웃었단다. 정말 오랜만이다, 여보, 그렇지?”

 

할머니의 손엔 이미 흰 손수건이 들려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아버지가 간이나 제대로 맞췄는지, 너무 싱겁거나 매운 건 아닌지 하면서도 나를 보고 밝게 웃어줬다. 한 술로 먼저 맛을 보며,

 

“아휴, 매워라. 너무 매운 거 아냐?”

 

이 때 아버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때, 처음 그 노래를 듣던 그 때 흘렸던 눈물이었다.

 

“하도 매워서 눈물이 다 나네.”
“보셨어요? 내 사랑스런 남편이 웃는 걸 보셨어요?”

 

할머니는 젊은이들이나 할 것 같은 포옹으로 남편을 꼭 안으며 볼에 입을 맞췄다.

 

“같잖지도 않아서 웃으셨을 거예요. 60살도 안 된 것이 나와서 황혼이 어떻고 인생이 어쩌구 저쩌구 하니... 그쵸, 할아버님?”

 

재청을 받아 아버지는 다시 무대에 올라섰다.

「 .......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째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 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오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손님 사이에선 ‘앵콜’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도 아버지는 앵콜소리가 들려왔다며 노래를 하나 더 부르기 시작했다.「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를 꾸려가면서 돈 말고 벌고 있는 게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넉살이다. 나이에 비해 유난히 수줍음도 많고 숫기 없이 얼굴이 금세 붉어지곤 하던 아버지가 넉살을 부릴 때 보면 난 마음이 얼마나 편해지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넉살이 자신감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가게 해서 얻은 것은, 그리고 벌어들인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넉살, 자신감.

 

「거리에 가로등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검붉은 노을 너머 또 하루가 저물 땐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무얼 찾고 있는지
......
사랑의 슬픈 추억은 소리 없이 흩어져
이젠 그대 모습도 함께 나눈 사랑도
더딘 시간 속에 잊혀져가요.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 」

 

<거리에서>였다.

 

“아빠, 오늘은 아빠랑 자고 싶다.”

 

나란히 드러누워 천정을 보며 내가 이랬다.

 

“아빠, 다시 일본, 거기 어디더라? 동해가 보이던 바닷가에 다시 한 번 가자. 이번엔 한 잠도 안 자고 밤을 새울 수 있어. 술도 전보다는 더 잘 마시니까... 가자. 밤새우면서 아빠랑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도 추지 뭐. ... 얘기 많이 할 거야. 갈 거지, 다시? 정말 그럴 거라니까, 거리에서 노숙할 거라니까.”
글.그림=오동명/ 다음 주 이 시간에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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