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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소설] 라이브 카페,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11)

11. 잃어버린 우산

 

비는
그쳤고
난 우산을 폈다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돈을, 돈벌이를 무시할 순 없었지. 하지만 아빠가 이것을 시작하면서 돈보다는 시간을, 내 시간을 돈보다는 더 소중히 여겨 오로지 내 시간만을 즐겨보자 했지만 말이다. 진짜 그랬다. 오십 평생 살아왔지만 정작 나를 위해서 쓴 날들이 며칠이나 될까 돌이켜 꼽아봤지. 대학부터 내가 가고 싶었던 미대는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아빠가 지레 짐작해서 포기하긴 했지만... 할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셨을 때 자식들을 모아 놓고 뭐라 하셨는지 아니? 배운 게 없어서 사업에 실패했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우리 보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시더구나. 할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신 때는 아빠가 중학교 2학년이었거든.

 

나는 아버지,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지? 배운 게 없어 실패했다는 그 말씀을 늘 새겨야 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잊지 못했단다. 그래서 결정한 과가 경제학이었지. 아빠가 고등학생이 되어도 할아버지는 다시 사업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고 결국 아빠가 고3될 무렵 다 포기하셔야 했어. 어린 나이에 아빠는 경제학과에 가서 공부해 아버지 사업을 다시 이어갈 수 있게 해드려야지 했는데. 그러나 막상 대학에 들어가 보니 경제학과는 일반적으로 은행원이나 대기업 등 기업체에 취직하는 데지 돈 벌게 해주는 곳은 아니었어. 당연하지만 그 땐 몰랐단다. 이러면서 대학 때 방황을 하게 되었고, 졸업 후 취직해서는 열심히 돈을 모았단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싶었던 거지. 전공도 바꿔볼 생각이었고. 아마 추석날 이른 아침이었을 게다. 가족들이 함께 아침 식사를 하기 전, 할머니한테 ‘회사를 그만 두고 미국으로 떠날 것이다, 떠날 비행기 삯과 그곳에서 1년간 체류할 경비는 그동안 월급으로 모아뒀다’ 했더니 할머니가 아빠 말을 듣자마자, ‘그러면 아버지가 쓰러지고 마실 거’라면서 우시더라구. 결국 할아버지한테는 말도 꺼내보지도 못하고 유학을 포기해야 했지. 그 뒤 회사 다니면서 결혼도 했고 그래서 이 앞에 있는 내 아들이 세상에 나온 거구. 결혼하고 나니 더 열심히 살아야지 어쩌겠어. 내가 책임져야 할 부양가족이 둘이나 더 생겨 장가들기 전처럼 나 혼자가 아닌데. 이렇게 해서 이 나이, 오십까지 온 거란다. 한 번도 내 자신을 위해서 쓴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 남들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물론 짧은 시간들이야 나를 위해서 썼지. 여자친구도 만나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여행도 하고 결혼도 하고 이렇게 나를 정말 행복하게 해주는, 가끔 화나게 만들긴 하지만, 자식도 하나 가지게도 되었고. 하지만 30년 전 아빠가 하고 싶던 그림을 이제라도 그리고 싶기도 해. 그러나 나이가 마음을 잡는구나. 1년간만 아무 생각 없이 나를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아보자 했던 것으로, 그림 그리고자 하는 욕구를 누르고 있지. 어떤 이유에서든 예상 밖으로 4년 넘게 이것을 꾸려나가고 있지만, 정말 예상조차 못한 뜻밖의 기쁨을 여기서 느끼고 살고 있단다.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예상 외의 즐거움을 이곳에서 만끽하고 있지, 지금. 삶의 재미는 엉뚱하게 찾아오는 건가봐. 바동바동 앞만 보고 달릴 때는 보지 못한 것을 이렇게 겉돌고 곁눈질하다 알게 되다니...”

 

 

아버지는 또 피식 웃는다.

 

“그림 그리고 싶은 마음은, 그럼 지금 다 없어졌어? 여기가 재미있어서?”

 

또 히죽 웃으면서 ‘그렇게 되었지, 그렇게 되겠지’ 애매하게 대답한다. 아버지의 미소 속에 어떤, 말 못할 회한 같은 걸 언뜻 엿볼 수가 있었다.

 

“아직 남아있구나? 남아 있는 게 분명해. 아빠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거야. 지금이라도 취미처럼 그리기 시작하면 되잖아? 설마 화가가 되겠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붓하고 그림물감 사줄게, 당장. 화가가 되고 싶으면 말해. 전문가용으로 사줄게. 오늘부터 그려라. 정말 하고 싶은 거 해, 아빠!”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찌 다 욕심을 채우고 살겠니. 여기가 너무 즐거워서 다른 생각은 아직 안 드는구나. 그래, 사줄 수 있으면 붓하고 그림물감, 사주렴. 이왕이면 전문가용으로 사달랄까?”

 

아버지는 허허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페 문을 일찍 열어놓고 첫 손님이 들기 전 아버지와 나는 자연스럽게 커피타임을 갖는데, 이 시간은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아주 신이 난다. 그 동안 떨어져서 못한 아버지와의 대화를 이제라도 다 채우려는 듯이.

 

“「이방인」읽어봤지? 카뮈의 소설 말이다. 줄곧 살아오면서 아빠는 늘 이방인이라는 의식을 떨쳐내 본 적이 없었어. 한국의 수도인 서울 태생에, 뭐 그리 나쁜 대학은 아니니까, 거기 나왔고 또 직장도 오히려 남들은 부러워 할만 대기업에서 근무 잘 했고...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평범하긴 하지만 보통 한국인으로서 이방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거야. 그런데도 늘 아빠는 그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어. 안정된 생활은 했지만 이 사회의 주류, 리더는 되지 못했다는, 또는 적어도 남들보다는 더 넉넉한 경제적 호황을 누리면서 살 수 없다는, 이런 것들이 아빠를 이방인으로 내몰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보다도 사람 사는 관계에서의 소외감이랄까, 다시 말하면 소통의 단절을 느낄 때가 많아서 일 거야. 학창시절에 마음이 잘 맞고 통하던 친구들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서먹해지고 관심 분야도 달라지고 또 무엇보다도 점점 더 현실적으로 돼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빠는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 돼 가는 것 같고... , 이런 데서 오는 소외감이 아빠를 이방인으로 여기게 하는가 봐.”

 

아버지의 어둡던 얼굴이 별안간 훤히 밝아졌다.

 

“그런데 말이다. 이것을 시작하면서 그런 이방인으로서의 소외 또는 외로움은 거의 다 사라졌단다. 이 조그만 가게를 하면서 얻은, 가장 큰 보람은 바로 이거란다. 거의 오십년간 느껴왔던 이방인, 아웃사이더 같은 감정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거야. 신기하지 않니? 제주도에서도 외진 골짜기인 이곳은 정말 아웃사이드 중에 아웃사이드일 텐데 말이다. 난 너무나 신기해. 이 가게를 열면서 이건 정말 상상조차, 상상이 뭐냐, 망상 공상조차 못한 건데. 덤으로 얻은 이 해방감? 아니다. 만족이라야 할 것 같다. 이 충만한 마음을 세상의 그 무엇으로 바꿀 수가 있겠니? 이래서 이곳에서의 시간을 자꾸만 연장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알지”, 하며 아버지에게 내 나름의 진단을 이야기했다. 아무리 작고 초라하더라도 여기선 무대에 매일 올라가며 아버지가 주연이 되고 여기 들어온 사람들이 이곳을 즐기면서 아버지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고 어울리게 되고, 이래서 아버지는 여기서만은 이방인일 수는 절대 없었을 거라고 내 소회를 아버지 앞에서 펼쳐보였다.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빨리 열 필요가 없는 데도 아침 일찍 매일 문을 열잖아, 그지?”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그럴 거야. 그랬을 거야. 하지만 그보다도 여기선, 여기서 만난 사람과는 무엇인가 공통의 소통거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아빠의 마음부터가 사회에서 하던 것과는 달리 매우 능동적이 되었다는 것, 아마 이래서가 아닐까? 이건 아빠만 느끼고 있는 건 아니란다. 손님 중에 여러 분이 아빠와 같은 느낌을 얘기하더구나. 이곳에선 주인아저씨가 주인이 아니라 바로 손님인 자기가 주인이라는 말을 말이다.”

 

아버지는 종종 혼자 찾아오는 나이 30대 후반의 아주머니를 기억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자전거 타고 오는 아줌마냐고 나는 대답했다.

 

“밖에서라면 감히 내가 그럴 수나, 아니 생각이라도 품을 수가 있었겠니?”

 

아버지가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고 했다.

 

“너희들이 말하는 그거 뭐지? 그래, 작업 거는 줄로 알 거라고 생각할 테니 말도 못 부쳤을 게다.”

 

‘말만 붙인 줄 아느냐, 무대 위로 올라오게도 했지 않았겠냐, 내가’ 하며 아버지가 의기양양, 자랑스러워한다.

 

 

그녀가 두 번째든가, 카페를 역시 혼자 와 커피를 시켜 마시고 있었다. 저녁 8시, 아버지의 공연시간이 되었다. 여느 때처럼 기타를 안고 온갖 감정을 섞어 몇 가지 가요를 불렀다. 대여섯 곡을 마치고 신청곡까지 팝송 포함 두어 곡을 그럭저럭 별 탈 없이 소화하고 있었고, 곡이 끝날 때마다 그녀는 조용한 박수를 보내왔다. 아버지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골라둔 노래를 부르려고 노래책을 펼쳤다. 다른 노래를 할 때와는 달리 ‘음음’ 목을 가다듬었다. 거드름 또는 능청스러움처럼 보이는 이런 행위를 아버지는 평소 꺼려했었다.

 

“이번 노래는 가수 우순실 님의 <잃어버린 우산>을 불러보겠습니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제대로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를 <잃어버린 우산>은 나 같은 우악스러운 남자보다는 우아스러운 여성분이 불러야 제격이라고,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나는 아니야’ 했었거든요. 노래마다 제 각각의 의미와 개성이 서려있기에 궁합이 맞는 가수가 불러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특히 이 노래가 갖게 합니다. 내가 부르면 노래 망치게 될 노래였던 거지요. 하기야 내가 불러서는 안 되는 노래는 모든 가요나 팝송, 모두 다겠지만서도. 하여튼 불러보겠습니다. 영 아니다 싶으면 노래 중에라도 그만 때려치우라고 해주시면 오히려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손님 중에서 ... 여자 손님 중에서 ......한 분...”

 

이렇게 뜸, 아니 암시를 관중 속에 내려놓았다.

안개비가 하얗게 내리던 밤
그대 사는 작은 섬으로 나를 이끌던 날부터」

 

단골 중에는 아버지의 의중을 간과하지 않고 간파하는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한 심적 동업자가 더러 있었는데 이 날도 마침 있었고, 아버지는 그가 나설 거라는 것을 계산해 두었던 것이다.

 

“듣기 간지럽다, 간지러워. 역시 이 집 주인가수는 이 노래만은 안 되겠어.”

 

아버지는 이 때다 싶었고 노래를 멈췄다.

 

“그렇지요? 나도 더 이상 목이 간지러워서 더는 못 부를 것 같습니다. 어때요? 제가 천거하는 분을 모셔 <잃어버린 우산>을 듣기로 하는 게. <잃어버린 우산>을 제 주인에게 되찾아줘야 하지 않을까요?”

 

짜고나 한 듯이 동시에 박수가 일기 시작했다.

 

“노래 궁합, 가수 궁합”

 

아버지는 늘 혼자인, 그래서 외톨이 같던 그녀를 가리켰고 손님들의 끊일 것 같지 않은 성화에 밀려 아버지 옆 무대로 나와야 했다.

 

“아시죠? 이 노래.”

 

“들어는 봤지만 불러보진 않았어요.”

 

“저도 방금 전에 불렀잖아요. 저까진 것도 부르는데 하물며......”

 

“그럼, 그까진 것이?”

 

“네? 아, 네에~~~”

 

농담으로 받아치는 그녀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며 해쓱 웃었다. 그리고 꼭 다문 입을 가진 얼굴로 아버지의 요구를, 손님들의 성화를 받아들였다.

 

Em-Am

 

“음이 맞겠어요?”

 

기타로 입을 맞췄다. 입에 맞춰진 기타도 입을 열었다. 반주 시작. <잃어버린 우산>은 주인을 바꿔 불려졌다.

안개비가 하얗게 내리던 밤
...... ......
...... ......
그대 내겐 단 하나 우산이 되었지만
지금 빗속으로 걸어가는 나는 우산이 없어요」

 

객석은 재판관의 최종판결을 내리기 직전과도 같이 침묵을 지키며 조용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집중했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고 노래는 더 촉촉해져가고 있었다.

「이젠 지나버린 이야기들이 내겐 꿈결 같지만
하얀 종이 위에 그릴 수 있는 작은 사랑이여라
잊혀져간 그 날의 기억들은
지금 빗속으로 걸어가는 내겐 우산이 되리라
잊혀져간 그 날의 기억들은
지금 빗속으로 걸어가는 내겐 우산이 되리라

 

 

객석에선 멀어서 목격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녀의 노래에 흠씬 빠져 너무나 황홀한 나머지 볼 수 없었을 수도 있다. 황홀경은 때론 눈을 어둡게도 하니까. 그러나, 가까이에서 아버지는 그녀의, 노래하고 있는 그녀의 두 눈에 맺힌 이슬 같은 눈물방울을 보았다.

 

“아들아, 근데 그 순간 아빠는 이런 생각을 했으니, 이걸 주책이라고 해야 하나? 이슬이 새벽이 아닌 밤에도 맺히네 이랬다니까?”

 

나는 주책이 아니라 주책바가지라고 하며 ‘정말? 아이구!’ 하고 아버지를 한 대 쥐어 박으려들 듯 깔깔 소리 내며 웃어댔다.

 

“왜 눈물이 났을까? 그 노래, 슬퍼? 아빠가 부르면 전혀 어울릴 노래는 아니라지만 그 아줌마도 없고 마땅히 불러 달라할 아마추어급 가수도 없으니 아빠가 지금 불러봐 줄래? 눈물이 나는지, 이 감수성 아들이 들어볼 테니까.”

 

아버지는 주저하지 않았다. 4년 사이 달라진 점이다.

「안개비가 하얗게 내리던 밤
그대 사는 작은 섬으로 나를 이끌던 날부터
그대 내겐 단 하나 우산이 되었지만
지금 빗속으로 걸어가는 나는 우산이 없어요
...... ......
...... ......
잊혀져간 그날의 기억들은
지금 빗속으로 걸어가는 내겐 우산이 되리라」

 

“어때?”

 

“눈물까지야... 아빠 노래도 들어줄만 한데 뭐. 노래가 워낙 좋은가 보다. 그 아줌마와 사연이 있는 노랜가? 감정이입이 되면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거야. 아빠의 <얼룩 고무신>처럼. 아님 우산하고 관련된 무슨 사랑을 남겨뒀든가.”

 

그 뒤 그녀가 불러주는 진짜 <잃어버린 우산>(아버지 노래가 꼭이 가짜라는 말은 아니다)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듣는 내내 그녀의 두 눈에서 내 두 눈을 떼지 않았다. 아버지가 봤다는 그 눈물을 놓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눈물은 훔치면 사라져서 한순간 방심하면 볼 수 없는 투명물체요, 이슬이 빛으로 사라지듯이 눈물이 꼭 손으로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눈물은 잊음으로서 비우고 채움으로서 사라지는 것이라고 아버지는 참으로 애매하게 얘기해줬던 적이 있다. 나는 한 번도 눈 깜빡거리지 않았지만 끝내 그녀에게서 눈물을 보지 못했다. 대신 옅은 미소는 볼 수 있었다. 그 날 함께 했던 손님 모두가 그녀와 카페 안에서 마주치는 동석의 날엔 그 날을 기억하며 그녀를 무대 위에 꼭 세우는 고집을 피웠다. 그래서 아버지도 그녀의 <잃어버린 우산>을 여러 번 들었지만 첫날의 눈물, 밤에도 맺히는 이슬은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녀가 하루는 아버지에게 이랬다.

 

“이곳에선 주인이 바로 내가 되네요. 주인 사장님껜 죄송스런 실례의 말이 되겠지만.”

 

이 말을 듣고 있을 때 아버지는 아버지만 알고 있는 묘하기 그지없는, 어쩜 해탈의 웃음을 띠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이 안에 들어오면 다 주인공이 되지요.’

 

비가 오면 그녀에게 주려고 하늘빛 우산 하나를 사뒀는데 아직 선물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 비가 안 오네, 한번도.”

 

가뭄이 유난히 길었다. 아버지는 그녀가 오지 않는 날 비가 오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사둔 우산을 주기 위해서, 그녀의 우산이 되어주기 위해서. 그러나 어찌 우산이 비가 올 때만 필요할까. 선물이 특정한 날, 어찌 용도로만 손에 쥐어주는 걸까. 선물이란 가슴에 안겨주는 것이지 않을까. ‘아직 비가 안 오네.’ 하며 비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도 조금 처량하다. 애처롭다고 해얄 것 같다. 비는 언제나 슬프다. 그래서 비는 눈물처럼 아래로 흐른다.

 

“아빠, 비오지 않는 날에 우산을 선물해도 괜찮아. 아니 더 좋아하실 걸? 올지 모를 궂은 날을 창창한 날에 미리 준비해두는 일이잖아. 아빠, 그 아줌마 좋아하지? 그러니까 주지 못하고 갖고만 있지. 마음도 우산도 둘 다 다!”<글, 그림=오동명/ 다음 주 이 시간에 이어집니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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