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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소설] 라이브 카페,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3)

3.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참자
하지마
웃어 더 웃자구

 

가게에 나온 지 일주일쯤 지나자 벌써 낯익은 얼굴이 몇이나 됐다. 처음엔 아버지 친구들인 줄 알았다. 나이도 엇비슷한 중년의 남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게를 열기 전 알고 지내던 친구는 아니었단다.「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정말 어설픈 라이브카페에서 처음 인연을 시작했으니「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가 맺어준 친구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다.

 

카페를 열기 전 몇 년째 빈 채로 버려지다시피 한 헌 집을 혼자 새로 꾸미느라 힘도 들었겠지만 문제는 카페를 열고 난 뒤였다. 아버지는 모든 일을 혼자 다 해야 했지만 이는 단순한 육체적 노동, 나아가 운동쯤으로 여기니 오히려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손님의 반응은 아버지의 낙천적인 성격을 감당할 순 없었는가 보다. 아버지를 '또라이'로 본 것이지만 사실 아버지 자신 외엔 누구든 그렇게 볼 게 분명했다. 아들인 나도 그러할진대. 아들이 아버지를 분석하자면, 아버지가 낙천적인 사고를 하고 또 그에 걸맞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소위 우리집 가훈에서 비롯된다.

 

‘시간을 내 것으로’

 

자기중심이 아닌 자기주체성을 늘 강조했더랬다. 정신이 올바로 서 있으면 어떤 일이 닥쳐도 흔들림이 없다는, 영국의 행동철학자 러셀, 독일의 실존철학자 니체 운운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어린 내게 하곤 했었는데 들을 때마다 눈 뜨고 졸았지만 이제 나이가 얼추 스물이 넘고 외국에서 남의 힘을 빌지 않고 혼자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서 아버지의 이 오래된 잔소리를 조금씩 이해할 것 같다. 흔들리지 않는 자기주체성은 주위의 시선에 연연해 정작 해야 할 일을 못하는 군중의 휩쓸림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게 했고 따라서 자기목표를 분명하게 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포기는 쉽게 하지 않는데, 이번에 미국의 대학에 떨어졌지만 군복무를 마치고나면 다시 그 대학의 그 학과에 도전할 거다. 사실 입학허가는 받았지만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가 없어 진학을 미뤘더랬다. 군대문제도 해결해야 하기도 하고. 미국서 혼자 공부하느라 정말 힘들었기 때문에 군대에서 좀 쉴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어차피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내 의무를 즐겁게 하자는 뜻이지 군대가 만만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해병대를 지원하곤 있지만 아버지 말고는 다 걱정이다. 나도 그래서 요즘 내 객기를 머리 대신 쥐어박고 있기도 하다. 참, 독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떨어진 줄만 알고 있으니 이 사실을 비밀로 해줘야 한다. 나와 아버지와의 약속, 어쩌면 일방적으로 아버지가 어린 내게 한 약속이긴 하지만, 나도 언제부턴가 주입이 되어 아버지가 뭐라 해도 그 약속을 내 스스로 지키고 싶었다. 그러니까 대학부터는 내가 홀로 벌어서 다녀야 한다던 그 약속을 나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아버지는 작년 고등학교 졸업반인 내게 이런 메일을 보내왔다. 참고로, 아버지는 메일쓰기뿐만 아니라 우표붙인 편지도 자주 보내곤 했다. 받으면 답장해야 하니 무지 부담되는데 이를 즐기는 것을 보면 남 부담 주는 게 아버지 취미인가 보다. 취미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곤 하지만... 그 메일에는,

 

“계획한 대로 대학입학 준비는 잘 하고 있느냐? 이곳의 부모들은 수험생 못지않게 대학입시에 박사가 다 돼 있던데, 나는 네게 전혀 힘이 돼 주질 못하는 무능한 아빠로구나. 하기야 영어를 모르는 내가 뭐 도움이 되겠냐만은. 다행히 예상했던 것과는 아주 어긋나게 여기 가게가 그럭저럭 잘 되고 있다. 어긋나도 좋을 때가 있구나, 그치? 넌 아빠가 이거 시작할 때 안 될 거라고 초를 친 데다 침까지 바른 놈 아니냐? 헤헤, 아빠가 이겼지? 하기야 아빠도 돈 벌 욕심은 추호도 없었다. 근데 하다 보니 벌리네. 장사 잘 되고 있으니까-작년부턴 저축까지 한다 이 말이다. 약 오르냐?-아무튼 사정이 나아지고 있으니 네 대학입학금 정도는 걱정 말고 마지막 최선을 다 하거라.”

 

아버지는 절대 약속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아버지 때문에 약속을 사소한 일로 여겼다가 나는 곤욕을 치르곤 했었는데, 약속을 잊을 리 없는 아버지가 내게 대학입학금을 주겠다고 했다. 돈벌이가 정말 괜찮긴 한가 보다. 이렇게 떠벌리는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5년 전 괌으로 떠나면서 난 아버지에게 내가 먼저 이랬었다. 지금 어렵겠지만 유학 보내주면 내가 팍팍 줄여 학교 다녀볼게요, 라 하긴 했었다. 아버지는 그럼 보내주마 했었고. 나는 단지 이걸 지키려고 한다. 군대 다녀오면 미국에서의 아르바이트도 수월하기도 하고. 바로 이런 것을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준 자기주체성이 아닌가 싶다. 이 주체성은 시간관리에 의해 더 공고해질 수 있는데, ‘시간을 내 것으로’, 이것은 시간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내가 만나고 겪는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서 소중함이 무엇인가를 늘 일깨워줬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늘 시간과 먼저 관계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아버지의 잔소리 같이 너무 딱딱한 내 얘기만, 자랑만 한 것 같다. 다시 손님 얘기로 돌아가면, 아버지의 첫 손님은 젊은 연인이었다. ‘첫’이라는, 처음의 의미는 참으로 남다르다. 첫 손님과의 첫 인연, 카페의 문을 연 날, 그러니까 아침 10시에 열었으니 무려 아홉 시간이나 지나서야 손님을 받았다. 저녁 무렵 첫 손님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좋아야 할 첫 인연은 아버지에겐 웃지만 슬픈, 바로 그것이었다. 삐에로, 어릿광대가 된 아빠.

 

커피를 내간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남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다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거친 말투였다. 조금 후,

 

“리필.”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커피 주전자를 들고 간 아버지에게,

 

“라이브라면서요? 가수 누가 나옵니까?”

 

“예. 곧 시작할 겁니다. 그런데 가수는 따로 없고 제가 으음... 제가 부릅니다.”

 

조금 전 여자친구인지 애인인지, 아무튼 옆에 끼고 앉은 여자에게 해대던 크기보다 더 크게 깔깔깔 웃어대며,

 

“아저씨가요? 노래를요? 카수라구요?”

 

아버지는 이마가 원래 넓었지만 흰 머리가 나고 숱이 줄면서부터 넓은 이마는 남에게는 대머리처럼 보였다. 나는 줄곧 보아 와서 분명 대머리가 아닌 넓은 이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겐 넓고 시원한 이마로 배려 받지 못할 만큼 이마는 대머리처럼 넓었다. 내게는 넓은 이마지만 남들에겐 까진 이마를 가지고 있는 게 아버지의 현실이다. 나이가 더 들어보였다.

 

“아저씨, 젊어서 카수였어요? 남진도 아이고 나훈아도 아이고... 거 누구지? 두만강 부른... 그 카순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구, 그 연배보다는 젊으신 듯싶은데. 그래, 젊네, 젊으시네. 참 젊디 젊으셔. 라이부라 커어! 어디 한 곡조 뽑아보시지, 젊은 아저씨!”

 

사실 저녁 8시 30분이면 공연을 시작할 시간이다. 그 시간도 마침 됐다.

 

“예. 막 공연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비록 서툴지만 예쁘게 좀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쁘게? 예쁘게요? 야야, 예쁘게 봐달라신다.”

 

고개만 떨구고 있던 여자동행이,

 

“그러지 좀 마. 나이 많으신 분한테...”

 

여자의 목소리는 데크레셴도로 죽어가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상대동행, 그 남자는 오히려 크레셴도로,

 

“그러지 뭐. 그래야지 뭐.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인데... 옛부터 포르노국가를 예상했던 선진된 조국! 또 예의하면 우리 아이가, 우리. 애정에 대한 의리, 죽어도 우린 남 여잔 안 건드린다 이거이다! 의리라카면 우리가 죽여주제.”

 

아버지는 이미 무대 앞에 나가 있었다. 무대라 해봐야 악보대와 그 뒤에 기타 기댄 접의자 하나, 그리고 그 뒤로 드럼이 놓여 있는 홀의 한쪽 벽에 불과했다. 돈벌이 시원찮던 처음이나 돈벌이 괜찮다는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마이크가 없으니 당연히 스피커도 없다.

 

“고맙습니다. 여기 누추하고 후진 데에 있는 저희「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를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 이 카페 문을 연 첫 날이고 앞의 두 분이 첫 손님이구요. 다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라이브카페라지만 그럴듯한 가수는 고사하고 음악학원 문전에도 가보지 못한 제가 그저 조금 치는 기타 들고 감히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가뜩이나 기타도 노래도 못하는데 나오니 무대라고 떨리기까지 하네요. 이곳은 라이브카페로도, 일반 다방으로도 다 부족하고 허술하기만 하지만 노래도 기타도 형편없는 수준인 제가 나와 부르듯이 여러분 누구나 저처럼 여기 나와서 함께 즐기자는 곳으로「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를 열게 되었습니다. 예, 우리 함께 즐기자고...”

 

“사회자유 카수유? 언제 시작할 거냐구유? 아저씨가 서툰 것 같지만은 않은디, 말 주변이 거시기 뺀지롬하신 걸 보니.”

 

예, 예 하며 아버지는「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에서의 첫 공연을 시작했다. 역시 첫 곡은<봉숭아>였다.

 

C-F-C-G7-C

 

왼손으로 코드를 한 번씩 고르고 나서 노래를 불렀다.

「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이 밤이 다 하면 질 터인데」

 

 

한 소절 지나 무대 매너를 익힐만할 즈음에,

 

“아저씨! 초롱한 별이 그럼 밤이 지나면 다 떨어지지, 그럼 대낮에도 별이 떠 있답디까? 그런 청승맞은 노랠랑 말고 신나는 거, 요즘 유행하는 빠삭빠삭하고 생생한 노래는 없냐구요. 이은미에 거, 그렇지, 애인있어요, 뭐 이 정도 안 되겄냐구요. 내가 카페 오픈날에 애인도 끼고 왔구만.”

 

“예, 예. 그러겠습니다. 이 노래는 시작했으니 다 끝내고 바로...”

 

아버지는 이어 불러제꼈다. 아마도 이쯤에서 내게 늘 하던 말씀, 그러니까 우리집 가훈을 떠올리며 가슴에 되새기고 있었을 게다. 가사와는 별도로.

 

‘시간을 내 것으로’

 

끝내 청년이 소파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랑 시방 장난하자는 거여? 아저씨, 손님하고 기 따잡숫기 하자는 거냐구. 오늘 개업 첫날이라면서? 사업, 그렇지, 이것도 사업은 사업이제. 사업을 하시려거든 기본은 알고 시작해야지, 거 상식 아니냐구. ‘손님은 왕이다’ 즈윽, 손님이 하라는 대로 다 한다, 까라면 까고 구르라면 구른다, 이 상업의 도덕적 상식도 모르고 시작했어? 뭘 알고나 해도 해야지. 개나 소나 다 장사한다구 저리 설치니... 에 퉷. 더구나 라이부? 지나가는 소도 웃겠다!”

 

아버지도 더 이상 노래를 이어갈 순 없었다. 워낙 청결한 사람이 아버지라 뱉은 침을 닦아야 했고, 뱉어낸 침을 허리 굽혀 휴지로 닦은 뒤에,

 

“이보시오, 젊은이. 아니 손님. 오늘 첫날인데 이 집 방식 좀 따라주면 안 되겠소? 그리고 난, 보시오. 이 나이에 젊은 가수를 부를 그럴만한 위인이 못 되오. 이 나이에 일찍 회사 짤려 이런 산 속에서 이렇게, 아까도 말했지만 이 곳은 어수룩한 곳이오. 그러니 어수룩한 사람끼리 모여 담소 나누고 쉬다 가는 곳으로 마련했소이다. 젊은 손님이 첫 손님이라 기쁘지만 이곳은 아무래도 우리 같은 늙수그레한 이들이 모여 구닥다리 한담이나 하는 그런 초라한 곳인 것 같소. 좀 이해해주소, 젊은이가. 내 다른 노랠 불러드리리다. 신나는 노랠 신청했었지요? 그러지요. 신나는 노래로 바꿔보겠소.”

 

<봉숭아>와 달리 이번에는 여섯의 기타줄을 엄지 뺀 오른손 네 손가락으로 훑어내리고 치올리며 전주를 시작했다.

 

G-Em-C-D7-G-D7-G

 

다시 돌아 왼손가락을 벌려 G코드로 줄을 꾸욱 누르며,

「장막을 거둬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 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 있었다. 목에 힘을 들이다 보니 소리도 커졌다. 기타줄을 튕기는 오른손의 위아래 놀림도 거침이 없었다. 이 노래는 신명나게 불러야 하는 건 맞지만 더불어 조금은 장엄하기도 해야 했다. ‘희망의 나라로’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악을 쓰고 있었던 게다. 악만 쓰고 있었던 게다. 나가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던 게다.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주.
나도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나도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미쳤군. 미쳐도 한참... 저래 가지고 장사해 먹겠어? 가자, 일어나 어서. 지 혼자 떠들고 놀라구 해. 저러니 회사에서 짤렸지.”

 

계산을 하는 여자 뒤에서 여자의 지갑을 기웃거린다.

 

“이러구 얼마나 받아 처 먹노?”

 

계산을 하고 나오는 여자가,

 

“커피가 삼천 원밖에 안 하네. 그래도 커피 맛은 좋던데, 난. 자기야, 화 풀어, 이젠.”

 

“싸? 싸지 않으면? 내 돈 주곤 안 사 먹는다, 내 돈 주곤 절대!”

 

그 이후 문을 연 첫 날, 손님은 더 없었다. 그들이 개업 첫날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이었다. 그들이 가고난 뒤에도 아버지는 계획된 공연시간을 손님이 없어도 꼬박 메우고 있었다. 아버지가 했을 손님과의 약속이니까. 참으로 우직도 한 우리 아버지. 휴식 30분 후 또 10시부터 한 시간을 혼자 기타 치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서 아버지는 내내 잡념에 사로 잡혔다. 화를 내는 게 아닌데, 그래도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건데. 아버지는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이래선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같은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마치 앵콜이라도 받은 양. 공연규칙이야 뭐 따로 있겠냐만은.

「빨간 모자를 눌러 쓴
난 항상 웃음 간직한 삐에로
파란 웃음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물
초라한 날 보며 웃어도
난 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모두들 검은 넥타이
아무 말도 못하는 걸
사람들은 모두 춤추며 웃지만
나는 그런 웃음 싫어
술 마시며 사랑 찾는 시간 속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살잖아
난 차라리 웃고 있는 삐에로가 좋아
난 차라리 슬픔 안은 삐에로가 좋아
난 차라리 웃고 있는 삐에로가 좋아
난 차라리 슬픔 안은 삐에로가 좋아」
(다음주 월요일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동명은?=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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