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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소설] 라이브 카페,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4)

4. 아름다운 것들

 

마당
한켠에
느티나무하나

 

요즘 뉴스를 보면 참으로 무서운 존재가 인간이라며 섬뜩한 두려움을 넘어 치떨리는 공포마저 들지만, 그래도 인간의 손길은 아름답다는 믿음을 카페 앞마당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갖게 해준다. 느티나무는 원래 없었다.

 

다 허물어져가는 시골집을 어디부터 고쳐나가야 하나, 아버지는 고민으로부터 보수를 시작해야 했다. 주인도 거들떠보지 않던 허술하기 짝이 없는 버려진 집을 단지 고쳐서 써도 된다는 이 한 마디에 성큼 그 집을 떠안긴 했지만 사실 손을 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보면 볼수록 엄두가 나질 않았다. 평생 직장만 다닌 아버지는 무엇을 고치는 데는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이러니 경험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하고 싶은 일을 꼭 일 년만이라도 하자 하여 발을 들인 자발적인 선택이지 않았던가. 막막해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사흘째, 메모지와 연필을 들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돈은 가장 적게 들인다.
둘째, 이러니 모든 일은 손수 내가 다한다.
셋째, 가능한 한 부시지 않고 현재 상태를 유지한다.
넷째, 내부는 깨끗이 치우고 외부는 부분 부분 나무로 덧대되, 시골돌담집을 도시카페로는 만들지 않는다.
다섯째, 계단과 현관만은 꼭 나무로 만든다.
여섯째, 실내든 실외든 꽃으로 장식하되, 이 꽃들은 주변의 야산 또는 고랑에서 흙과 함께 채집하여 더 오래오래 장식할 수 있게 한다. 이듬해를 위해 씨를 꼭 받아둔다.
일곱째, 서두르지 않는다.
여덟째, ‘나는 돈 벌려고 이 카페를 차린 게 아니다. 오히려 적자로 손해 볼 수도 있다.’ 아침에 카페에 나와 이 말부터 하며 내게 최면을 걸고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첫째 원칙부터 깨야 했다. 메우고 덧대는 데 시멘트를 쓰지 않고 나무로 다 하려니 비용이 예상보다 더 들게 되었다. 다행히 결핍은 그것을 채우고자 하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비용절감을 위해 동네에서 트럭을 하나 빌어 헐리는 집을 찾아 나섰다. 버려질 쓰레기나무들을 받아와 마당에 부렸다. 흙을 털고 대패질을 하고 적당한 크기로 톱질을 하니 꽤 쓸모 있는 목자재가 되었다. 역시 궁핍하니 모든 것이 다 쓸모가 되어주었다. 땔감으로도 못쓸 건축폐기물이지만 잘만 솎아 골라내면 새것과 다름없는, 참으로 번듯한 건축자재가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었다. 아버지 손에서 엄연한 건축자재로 재탄생되니 이 기쁨도 만만치 않았다. 경비도 줄일 수 있지, 재활용해서 자원낭비를 줄일 수도 있지... 가슴 한 구석엔 뿌듯하기도 했다. 한번은 ‘아버지 손은 약손’이라는 메일을 내게 보내왔다.

 

‘내 아들 배 만져줘 낫게 해준 내 손이 이젠 별 볼 일 없는 쓰레길 별 볼 일 있게 만들지롱!’

 

 

나는 이런 메일을 받을 때마다 ‘아빠도 이러니 너도 돈 아껴 써라.’로 들리긴 했지만 하여튼 간에 ‘아버지 파이팅’ 이라고 격려의 답장을 보냈었다. 이러자니 시간은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일곱째, 서두르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차근히 카페개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쉰 살을 이미 넘긴 나이라 몸이 부치긴 했다. 이럴 때면 기타를 들고 나와 쓰레기더미 곁에 쪼그리고 앉아 기타줄을 퉁겼다. 남들이 보면 기타를 꽤나 잘 치는 줄로 착각하기 쉬우나 다시 말하지만 전혀 아니올씨다다. 악보 없이는 기타도 노래도 할 수 없는 어줍은 반쪽이가 바로 내 아버지이다. 코드를 외우고 있는 노래가, 가사를 외우고 있는 노래가 지금까지도 한 곡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이러니 꼭 노래책을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

 

“아빠, 자꾸 악보에만 의존하지 말고 그냥 불러봐.”

 

나는 노래책을 아버지로부터 빼앗은 적이 있었다. 한 소절 외우는가 싶더니 이내 다음 소절에서 막히고 만다. 노래책을 도로 되빼앗아간다.

 

“몇 번 하다보면 자연히 외워진다니까. 보고만 하려 하니 어떻게 외워지겠어? 나보곤 공부할 때 이해하고 넘어가라더니, 아빠는 노래 하나도 이해하기는커녕 그저 노래책을 보고 읽고 따라하는 데에만 급급하잖아. 노래는 말야, 아니 가사는 말야, 그 의미를 음미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외워지게 돼 있어. 또 이렇게 몇 곡 치다보면 기타 코드도 외워질 거구. 화음을 이해해야 하는데 아빠는 악보를 눈으로만 보고 따라서만 하려고 하니 외워지겠냐고. 무조건따라하기, 그거 무지 안 좋은 거라는 것은 아빠가 자주 한 말 아닌가?”

 

남들에겐 자연스러운 것이 아빠에게는 부자연스럽다. 결국 안 됐다. 아버지는 중학교 3학년 때 자주 불렀다는 가곡, 「장안사」 외에 가사를 다 외우고 있는 노래가 하나도 없다. ‘장하던 금전 벽 위...’

 

“그 노랜 어떻게 외웠어?”

 

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천 번은 더 불렀을 거라고 했다. 나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실제로도 들었다, 두 손 번쩍! 노래마다 천 번씩 불러서 외우느니 차라리 노래책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노래책에 개줄이라도 묶어두는 게 낫다 싶었다. 아버지의 노래책의 겉장에는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안을 펼쳐도 본드로 갈라진 틈을 메우느라 페이지마다 역시 누런 풀자국이 덕지덕지하다. 아버지의 넝마 같은 노래책은 내가 어렸을 적 10년 전이나 괌으로 떠나기 전 5년 전이나, 5년 뒤 돌아온 지금이나 여전히 그 책이다. 최신곡을 불렀을 리가 없다. 10년 전에 들은 그 노래를 여전히 치고 부르고 있는 데도 아직 못 외우고 있다니, 아무리 내 아버지지만 해도 너무하다.

 

 

나는 이 노래책에서 아버지의 게으름 같은 것을 느끼곤 한다. 동화의 베짱이 같은. 그 게으름은 대체로 박자가 늘어지는 옛날 가요 때문이기도 하지만, 옆구리, 앞대가리 다 터진 그 책을 끌어 안 듯 보듬고는 테이프를 붙이고 본드를 바르고 있는 아버지의 구부정하니 쪼그린 자세 때문이 더 크다 할 수 있다. 아무 급할 것 없는 느긋한 모습을 유일하게 거기서만 본다. 다른 일을 할 때는 지나칠 정도로 부지런한 편인 데다가 말도 빠른 편인데 이상하게 노래책 앞에서는 베짱이가 되고 마는 아버지. 그럴 땐 화도 덜 낸다. 아니 그 노래책하고 있을 때는 화를 낸 적이 없다. 엄마하고 헤어지기 전 가장 화목했던 때도 기타 앞에서였다. 이렇게 말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기타 앞에서만 우리 가족은 화목했었더랬다. 하지만 차츰 아버지 혼자 기타를 치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리고 우리는...

 

시골집을 카페로 조금씩 바꿔가면서도 쓰레기 같은 더미 속 마당에서 견디기 힘든 노동을 기타로, 노래로 대신 덜어낼 수 있었다.

 

“이 나무들이 다 치워지면 그 때쯤 가게 문을 여시겠네요? 노래도 불러주는......라이브카페라면서요?”

 

나이 사십쯤 된 아주머니는 언덕 아랫마을에서 작은 치킨가게를 꾸리고 있었다. 몸이 무척 야위었고 초봄에도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 나무들이 저 집 안으로 다 들어가고 나면 이 마당이 참 쓸쓸하겠어요.”

 

치킨가게를 열기 전 오후 4시쯤, 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의 카페 마당에 들렸다. 종일 나무와 흙을 털고 게딱지 같이 찰싹 붙은 시멘트를 망치나 끌로 치고 밀며 긁어내며 떨궈내다 보면 가장 힘든 시간쯤이 바로 그 때였고, 아버지는 그 때쯤이면 노래를 부르고 있을 즈음이기도 했다. 내가 봐도 워낙 숫기가 없는 아버지는 아주머니를 보자 이내 노래를 멈추고 다시 흙 묻고 녹슨 굵은 못이 박힌 허접한 나무더미로 서둘러 몸을 옮겨보지만, 그 아주머니가 아버지의 어눌함과 어색함을 먼저 보듬어주곤 했었다.

 

“연습이라 생각해주시고 불러주시면 안 되겠어요? 개업하시면 선생님이 직접 부르실 거라고 하던데, 맞지요?”

 

아버지의 궁색한 주변머리가 아주머니의 발걸음을 헛되이 한 지 보름 정도 지나서야 아버지는 그 어색함, 그리고 그 어눌함을 덜어낼 수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보름 동안 빠지지 않고 찾아왔다. 그리고 아직 문도 안 연 라이브카페「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마당의 개업도 하기 전 첫 손님이었다.

 

“꼭 한 곡만 듣고 내려갈게요. 들려주시면 정말 감사할 텐데......”

 

부탁이 아니라 호소였다. 청원이 아니라 애원이었다. 천성이 여린 아버지는 노래를 불렀다.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으음 어디로 데려갈까.」

 

아주머니가 듣고 싶다던 그 한 곡이다. 양희은의「아름다운 것들」 하지만 아버지는 이 노래를 아주 끔찍하게 싫어했다. 오래 전 나도 아버지에게 보물 같은 노래책-없으면 부를 수 없으니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가. 아버지에겐 보물이다-을 들추다가 제목이 눈에 띄어 불러달라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저어하며 끝내 내게 불러주지 않았던 노래였다.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으음 어디로 가야할까.」

 

내가 어렸었던 그 때, 엄마는 외할머니댁에 가 있었다. 아파서라고 했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 그 이유를 알고 있는데 그 이듬해 아버지와 엄마가 헤어졌다. 아버지가 내게 이 노래를 차마 불러줄 수 없었던 이유도 이젠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에겐 불러줬다.

 

“하필 그 노랩니까? 다른 노래라면 제가...”

 

아버지가 물었다.

 

“내가 아는, 가사를 외우고 있는 유일한 노래거든요.”아주머니가 대답했다.

 

“다른 노래도 외우면 되잖아요. 그걸 외울 정도면 다른 노래는 식은 죽 먹기겠는데......요.”

 

다 자기 기준으로 말한다. ‘나는 외우지 못하는 노랠 당신은 외우고 있지 않나요?’ 마음 속에선 부러워했을 것이다. 아주머니는 물었다.

 

“내겐 그 노래 하나면 족해요. 제 청을 들어주실 거면 이 노래로 불러주시겠어요? 제게 기다림이란 시간은 너무 짧아서요.”

 

그 뒤로 아버지는 카페를 열기 전부터 이미 확보한 고객을 위해 카페 문도 열기 전 벌써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 인기가수가 되어 있었다. 비록 한 여자에게서지만. 아주머니는 그 한 곡만 듣고 다시 언덕을 내려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통닭 한 마리를 오토바이에 실어 올려 보냈다.

 

‘아닙니다, 안 됩니다.’ 하면, ‘원가 얼마 안 돼요.’라고 했다. 아버지는 ‘원가?’ 하며 ‘내 노랜 원가조차 안 드는 건데.’라며 그냥 받기로 했다.

 

“아빠, 저 느티나무를 심었다는 아줌마는 왜 안 와?”

 

창가에서 느티나무가 서있는 마당을 내다보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한 달 가까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느티나무를, 아니 나도 듣지 못한「아름다운 것들」을 들려줬다던 아주머니를 볼 수 없어서였다.

 

“왔다 가신 건가? 내가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대답 대신 느티나무로 나갔고 나도 뒤따라 아버지 옆에 앉았다. 느티나무 줄기를 어루만지며,

 

“이 느티나무는 그 아주머니가 심고 갔고,”

 

앉은 의자를 쓰다듬으며,

 

“이 벤치는 아빠가 맞춰 남겨뒀지.”

 

그 날 늦은 밤, 마지막 손님을 배웅하고 아버지는 나를 낮에처럼 느티나무로 이끌었다. 아버지에게서 편지 한 장을 건네받았다.

 

『제게 노래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보답을 제가 나무로 선물하고 싶은데.
지금은 마당에 다른 나무들이 빼곡하지만
카페 문을 여실 때면 그 나무들은 다 쓰이고 없을 거잖아요?
그 자리에 나무 한 그루 심어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신지요?
마다 말고 받아주세요.
그 동안 제게 듣고 싶다던 노래 불러주신 고마움을 나무 하나로 갚을 순 없겠지만...
느티나무가 될 거예요.
옛 사람들은 수호신으로 이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하네요.
선생님의 카페를 잘 지켜드릴 것 같아서.
그리고 선생님의 건강도 잘 챙겨줄 것 같아서.
작은 거지만 제 마음을 받아주세요.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상화 올림』

 

 

평범한 글이지만 왠지 불안했다.

 

“그리고 안 오셨어? 문 연 뒤에 안 오셨어? 그 아줌마. 꼭 마지막 편지 같은 느낌이 드는 걸?”

 

“그랬단다. 오지 못하셨지. 올 수가 없었지.”

 

올 수가 없다니, 매일 왔다면서, 가슴이 이유 없이 저려왔다.

 

통닭 배달되듯 느티나무가 ‘.~나무시장’이란 상호가 붙은 짐차에 실려 마당으로 옮겨왔을 때는 아랫마을 새터 치킨 가게의 문은 닫혀 있었다. 며칠 뒤 이웃사람들로부터 그 아주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아버지는 그 이후로「아름다운 것들」을 그 아주머니가 없어도 불렀다. 늦은 밤 느티나무 아래에서 아버지는 처음으로 내게도 이「아름다운 것들」을 불러줬다.

 

「 ......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으음 이들을 데려갈까
......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나무들만 남아 있네
때가 되면 이들도 사라져 으음 고요만이 남겠네」

 

우죽 아래 깨에 느티나무의 가슴은 있을까. 손님에게는 그늘이 되어주고 우산이 되어주기도 하는 느티나무는 그 가슴에 한 여인의 슬픈 사연을 품고 있지만, 한 중년 남자의 가슴에는 짧지만 언제나 다사했던 여인과의 따사함으로 간직되고 있다.

 

헛헛한 기를 조금 면한 늦은 점심 뒤에 아버지는 종종 말동무 곁에 나와 나른한 말을 걸곤 한다.

 

“마주 앉아서는 하지 못한 말이 있어요. 모자가 참 예뻤어요. 연보라였지요? 참 어울렸어요. 오늘은 연두모자로 그새 바꿔 쓰셨군요. 모자가 다 어울리는가 봅니다. 혼자서만 그러지 마시고 이래 말 걸어오지 그랬어요, 내게. ‘모자 예뻐요?’ 그러고 보니 우린 그 노래 외엔 어떤 그 외의 말도, 나눔도 없었군요. 내가 늘 느려 터져서... 삶은 이렇게 늘 후회하는 건가 봅니다.” 글,그림=오동명 (다음 편으로 계속)
 

 

오동명은?=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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