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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소설] 라이브 카페,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16)

16. Don't forget to remember

 

너희
요놈들
감히 날 무시해

 

장소와 시간이「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에 묶인 관계로 나는 친구들을 여기서 만나곤 한다.

 

“정말 아버지 맞냐?”

 

한 친구는 자기 아버지와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공부 잘 하고 있지?’ 라든가, 조금 더 관심을 갖는다면, ‘군대는 언제 가니? 신검은 받았느냐?’ 고작 이 정도의 대화, 일방적인 질문밖에 없었던 아버지와의 서먹한 관계의 존재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내가 어렸을 땐 정말 나랑 많이 놀아주셨는데...”

 

또 한 친구는 아버지와의 지난 시간을 추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들이 불쌍해.”

 

친구의 아버지를 통해 나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너희 아버지야 높은 자리에서 할 일이 아직 많으시지만, 보다시피 우리 아버지는 잘리고 달리 하실 일이 없으니까 저러고 계시는 거지.”

 

나는 솔직한 내 속을 털어놓으며 한편 친구들을 위로했다.

 

“밖에서 너희들을 만나지 못하고 여기서나 봐야 하니, 나는 아버지 때문에 갇혀 있는 꼴이지.”

 

사실은, 아버지와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고 또 입대하게 되면 곧 헤어져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하기도 했지만, 혼자 외국에서 택도 없는 영어로, 태어날 때부터 술술 영어를 입에 달고 나온 아이들과 경쟁하며 수업 따라 가기 바쁜 생활을 몇 해 동안 죽 해 왔던 터라 아버지의 카페는 나에게도 자유를 알게 했고, 역동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 갇히는 게 나쁘진 않았다. 순전히 자발적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 아버진 정말 낯이 두껍긴 하시다. 저 정도 기타실력으로 어떻게 이런 라이브를 차릴 생각을 다 하셨다냐? 원래 너희 아버지, 두꺼우셨니?”

 

나는 웃음으로 대답하니 친구들은 그 웃음소리까지 아버지를 닮았구나 했다. 아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착해 주변머리 없어 보이는 아버지에게 불만이 없던 건 아니지만, 아직 손해 보지 않고 이 카페를 꾸려가는 것을 보면 그 불만이 그래도 다행이다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아버지를 견디게 해주는 그 낙천성이랄까? 남들에겐-나에게까지도-단점으로 보이는 상대에 대한 지나친 배려나 믿음도 그 낙천성에 포함된다. 그나마 오십 나이를 넘어가는 아버지에게「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가 위안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주니 고마움마저 들었다. 아버지가 비록 1년 쉬고자 하며 이것을 열었다지만,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손실을 보고 어려워졌다고 하면 아버지의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모를 그 낙천성도 얼마나 유지되고 가능했을까, 걱정이 앞섰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

 

아버지와 나는 특별한 어떤 종교를 가지고 살진 않지만 우리 사이엔 늘 달이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쳐다볼 수 있는 달. 그리고 동시에 같이 바라볼 수 있는 달. 보고 있는 동안 떨어져 있어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는 달이어서 우린 그 아래서 만났고 그리고 그 달을 우러러보며 무언가의 소망을 얘기하고 빌곤 하기에, 달은 아버지와 나에겐 종교와 같은 존재이다. 달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요즘은 두 손까지 모아 매일 절을 한다. 달을 보면 절로 두 손이 모아져 가슴 앞으로 올라갔다.

 

“나도 나가서 불 순 있겠다.”

 

친구는 서툰 실력의 아버지를 보고 용기를 얻었는지, 아님 아버지를 깎아보자는 심산이었는지 모르나, 자기가 최근 색소폰을 배우고 있다고 털어놨다. 창피한 수준이다, 남 앞에 나설 실력이 못 된다 했지만, 이 놈의 자식이 이러면서도 꼭 토를 덧댄다.

 

“그래도 너희 아빠 실력 정돈 돼!”

 

결국 색소폰을 가져오게 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더 성화였다.

 

“나 혼자 매일 이 밤을 책임져야 하니 참 힘들다. 리사이틀도 하루 이틀이지!”

 

으쓱댔지만 어색했다.

 

“혼자 하긴 힘에 겨우니 나 좀 도와준다 생각하고 색소폰 가지고 오렴.”

 

친구는 음악학원에서 석 달째 색소폰을 배우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청탁과 나의 협박을 거절하면서도 그 날부터 연습에 들어갔던 게 분명하다. 그는 공부할 때도 그랬다.

 

“나? 어제 10시에 잤어.”

 

하면서도 새벽까지 공부했고 이렇게 거짓을 쳐서 친구들 중 학급 등수가 가장 높았던 놈으로, 이런 속임의 전력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어느 날, 불어 봐도 될까 하며 색소폰을 꺼냈다. 그가 연주한 노래는 <Don't forget to remember>였다. 들을 때 케니 G나 루이 암스트롱을 연상만 하지 않으면 제법 듣기 좋았다. 그는 연주가 끝나고 앙코르 박수를 받았지만 겸손한 척 손사래를 치며 우리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 노래밖에, only that song이라는 것을 우리 친구들은 다 알고 있었다. 시험에 대비해 그랬듯이 그 노래만 죽어라고 팠을 것이다. 이런 친구가 우린 전혀 밉지 않았다.

 

“사실 말야. 나, 학원 선생님한테 아까 부른 팝송만 가르쳐달라고 해서 배웠거든. 다른 진도는 덕분에 하나도 나가지 못했지 뭐냐.”

 

그는, 우리가 중학생일 때도,

 

“사실 말이지. 10시는 좀 더 넘게 공부하긴 했지. 너희들도 잘 알겠지만 내 이 우둔한 머리로 그 짧은 시간 투자해서 그 등수 나오겠냐?”

 

늘 이렇게 솔직히 토해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우리는 그 친구를 ‘귀여운 사기꾼’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끝내 숨기지 못하고 실토하는 친구였다.

 

계속 ‘앵콜 앵콜’ 했고, 그는 다시 나가 우리에게 했던 그대로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노래밖에 못해요, 라고. 이러면서 그는 다음엔 케니 G의 <The wedding song>을 배워 다시 나오겠다고 약속하고는 위기를 면할 수가 있었다. 좌석에선 ‘앵콜 앵콜’ 대신 ‘다음 다음’하며 더 큰 박수와 더 큰 성원을 보내줬다. 그의 공명심은 우리보단 더 해, 일주일 뒤, 불었던 <Don't forget to remember>와 약속한 <The wedding song>을 연 이어 연주했고 이번엔 앙코르까지 대비했다. 정말 귀여운 사기꾼, 아니 얄미운 재주꾼이다. 앙코르곡은 <봉숭아>였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걸 어찌 알았지? 눈치도 빠른 친구다. 이 노래는 아버지와 협주를 해서 카페는 더 신명나게 들떠 가고 있었다.

 

“야, 우리도 군대 가기 전에 한 악기쯤 배워두도록 할까? 너는 베이스, 넌 드럼, 그럼 넌?”
카페에는 악기 다 갖춘 그럴듯한 합주단이 생겨날 것 같았다. ‘이름을 뭐라 할까?’ ‘당연히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지 인마! 너무 어렵나? 지나치게 철학적이고 현학적인가?’

 

 

미리 마셔보는 김칫국물은 정말 지금 마시고 있는 듯 속이 다 시원했다. 친구를 정기연주자로 맞아들였고, 나 정도의 일급을 받아갔다.

 

“야, 인마, 넌 10분 연주하고 내가 하루진종일 일해서 번 돈을 벌어가잖아? 이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냐?”
아버지 귀에 들릴 수 있게 큰 소리로 나는 친구에게 따져댔다.

 

“막일과 예술과 같냐?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친구는 개똥철학을 내깔리면서 껄껄껄 웃어재꼈다. 한 곡을 부르기 위해 연습시간과 노력이 어쩌구저쩌구, 이런 얘길 하고 싶었던 게다.

 

아버지는 이 날부터 내 일당도 2천 원 더 올려줬다. 2천 원보다 10% 인상을 거듭 강조했다. 돈맛 좀 보더니 악덕은 아니더라도 짝퉁 악질 기업가를 벌써 닮아가려는가. 어쨌든,

 

“좋은 연주자를 소개한 소개비다!”

 

나도, 친구들도, 아버지도, 손님들도 아마 이래서 더「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를 잊지 않을 것 같다. 서툴러도 전혀 주춤할 일 없고 서툴다 하며 머뭇거릴 이유가 하나 없는 곳이 이곳이었다. 서툰 자들이 주인인 곳, 바로 우리가 지금 누리고 누려야 할 이곳이었다. 허상이고 허깨비인 우상이나 영웅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 글.그림=오동명/ 다음 주 이 시간에 계속

 


***알림

 

9월 29일 오후 7시,

 

제주시 산지천 공원 특설야외무대에서

 

<울지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의 저자 오동명의 북콘서트(사회 오 순희, 제주시 간드락소극장 대표)

 

제주 민예총 주관 행사

 

저자와의 대담과 중간중간에 저자의 서투른 노래( 역시 서투른 기타와 함께)도 들려줄 예정임.

 

'서투른 자와 서투른 자들의 작은 혁명!!!'
와서 함께 즐겨요!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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