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는 행복한 사람
꾸벅
이 아래
구두닦입니다
“바누아투라고 들어봤나? 난 처음 들어본 곳인데 그 나라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하는구먼. 남태평양에 있는 섬나라라는데, 1인당 국민소득으로는 2천 달러도 채 안 되니 극빈국에 속하지만 행복지수는 세계 1위라 이 말이지.”
구두를 옆으로 밀어놓자 구두닦이가 이를 받아들었다.
“죄송합니다만, 옆에 꿰맨 실이 풀리는지 벌어지려고 하는데 이것도 좀 수선해줄 수 있나요? 하도 오래 신어서 새 것으로 바꿀 때도 됐지만 아직......”
자기가 고칠 수 있는지 보겠다며 구두닦이는 아주머니에게서 운동화를 건네받았다.
“더 신어도 되겠는 걸요? 제가 더 꼼꼼히 만져보겠습니다.”
닦을 구두와 꿰맬 운동화를 제 가슴팍에 받아들고 구두닦이가 다른 자리로 옮겨가고 있었다.
“저도 들었어요. 뉴질랜드 옆에 있는 섬이라지요? 그곳 사람들의 사진들도 보았는데 검게 그을린 얼굴로 웃는 모습이 행복해보이긴 하더군요. 그런데 전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문명이라는 것을 몰라서, 세상물정에 때 묻지 않아서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비교할 무엇도 없고 경쟁도 없을 테니 욕심이 생겨날 일도 없을 것이고 이래서 행복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봤지요.”
방금 구두와 운동화를 받아간 구두닦이가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막 나가려 하고 있었다. 문 앞에서 그는 마치 기차의 승무원처럼 뒤돌아 안쪽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럴까? 맞아. 그럴 거야. 신문기사를 보니 외지인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산다고 하던데. 이민도 받아준다지 아마? 그래서 난 이게 걱정이 되더군. 그 순진한 사람들을 바깥세상에서 온 문명인들이 그들처럼 바꿔놓는 건 아닐까 하고. 거창하게 이렇게 비약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서양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에 침입해 들어오면서 조상 대대로 터 잡고 살아온 주인인 인디언들은 제 땅을 잃고 이러면서 웃음도 빼앗기고 말지 않았나. 제주도도 조만간 그렇게 되는 건 아닌지 몰라. 해군기지라든가 중국인의 고층빌딩이 들어선다느니 하는 개발 따위를 듣고 있으면 걱정되더라고. 제주도에 그래서 왔듯이 바뀌기 전에 미리 한번 꼭 가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공해 없는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곳, 바누아투?”
아주머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가시는 게 그들을 돕는 걸걸요?”
그래도 우리가 돈을 쓰고 와야 그들의 삶이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겠느냐, 우쭐했고, 돈맛을 알게 되면 그들의 행복은 줄어들 것이다, 며 말로 막았다. 남태평양 한 가운데의 섬이 화제가 되었다. 그 섬이 화제라기보다는 행복을 얘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런 질문을 하고 무언가 그 답을 얻고 싶었을 것이다. 행복의 답, 그 정답은 있는 걸까?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게 ‘당신은 얼마나 행복한가?’라 묻는 질문의 답이 되지 않을까.
“나는 이 카페에 올 때마다 방금 왔다간 구두닦이 아저씨를 찾게 되더라고요. 우리는 이제 그를 ‘아래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지만. ‘아래’라는 말을 아주 거리낌 하나없이 하는 그를 보면 왠지 그냥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아마 그 사람의 행복지수는 우리나라, 아니지 바누아투 국민들을 다 합친 전 세계인 모두 중에서 가장 높지 않을까 하고 아주 단정하고 싶을 정돈데... 냄새 풀풀 풍기는 남의 신발을 가지고 가면서도 항상 웃잖아요. 어디 들고만 가나요? 별 거 다 묻었을 더러운 걸 가슴에 콕 안기도 하던데, 방금 전에도 그랬지요? 우리 신발들을. 그것도 공짜로 닦아주면서 말입니다.”
아주머니는 또 카페 정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나가고 없지만 그를 다시 한번 더 보려는 듯.
내가 알고 있는 그 구두닦이 아저씨의 삶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순 없다. 오히려 불행에 가깝다. 아랫마을 남원의 한 다방 입구에서 구두를 닦으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교통사고로 아내가 몸져눕게 되자 회사원이었던 그는 직장생활을 온전히 할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는 거동을 전혀 못하는 아내 곁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해야 하는데 직장은 그러기엔 너무 멀었다. 경제적으로도 시간상으로도 좀 더 자유로운, 아내에게 더 신경 쓰기 좋을 일을 찾다가 구두닦이 직업을 시작했다. 구두닦기는 아내를 제 가까운 곳에 두고 언제라도 아내 곁으로 뛰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 큰 딸이 하나 있었는데 부모의 삶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을 만큼 딸이 성숙치는 못해 아마도 가출했다고들 했다. 들려오는 얘기는 이랬다.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 수 없는 소문에 불과하지만 보통의 기준으로 봐서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저 같은 구질구질한 사람이 들어가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기웃해보긴 했는데......”
아버지는 카페 문만 삐끗 열어 눈만 들여놓고 돌아서는 그를 몇 번인가 보았더랬다. 사람을 찾는가, 아님 원하던 곳이 아닌가 해서 발길을 돌리나보다 하고 개의치 않고 넘겼었다. 그가 처음 카페 안으로 들어오던 날, 그 아저씨는 또 문을 기웃거리고 있었고 이번엔 아버지가 마당에서 그의 그런 뒷모습을 우연히 볼 수가 있었다. 문 앞에서 마주쳤다.
“들어가시지요. 사람을 찾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들어오셔서 둘러보세요. 비록 좁은 가게지만 사각지대도 있어 문 조금 열고서는 안이 다 들여다보이지 않을 겁니다. 누추하지만 편하게 들어오셔서 찾아보세요.”
“저 같은 구질구질한 아랫것이 들어가도...”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구질하시긴요. 저는 어때요? 더 구질구질한데다가 꾀죄죄하기까지 하지 않나요? 이 옷 한 벌로 한 달은 버틸 겁니다.”
뭔 그게 자랑이라고. 이러면서 아버지는 피식거렸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 아저씨를 안으로 끌었다. 마주 앉아 보니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아, 남원 다방 앞에서... 아 그렇군요. 저희 손님 중에도 구두를 닦고자 하는 분들도 있을 테니 언제라도 들어오셔서 손님 구두를... 근데 여긴 너무 멀군요.”
“그게 아니고.”
그의 말도 몸도 머뭇머뭇 쌜긋거리고 있었다.
“소파를 더럽힐 것 같은데. 저도 차 한 잔 마시면서 노래 듣고 가면 실례가 되겠지요?”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며 오히려 펄쩍 뛰었다. 그 뒤 거의 매일 드나들었다. 그 아저씨가 카페에 들어서는 시간은 언제나 같았고 나가는 시간 역시 같았다. 저녁 8시부터 9시까지 딱 한 시간.
뜬소문을 듣고 있던 터라 아버지는 그와 얘기를 많이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왕래 시간은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인 데다가 아버지의 공연시간과도 겹쳤다. 올 때마다 이곳의 소비한도 최고액인 만 원어치 커피와 음료를 마시고 그는 공연 한창 중인 아버지에게 목례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문밖을 나섰다.
대구포나 땅콩 등 주전부리 안주를 사러 서귀포재래시장의 건어물 상점을 돌다 아버지는 아저씨와 맞닿았다. 아버지는 차가 있었고 그는 없었기에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남원으로 동행할 수 있었다.
“차라도 함께 하고 싶은데 오시는 시간이 하필 늘 제가 바쁜 터라, 언제 낮에 라면이라도 잡수러 오시지요?”
그는 차에서 내렸고 며칠 뒤 다섯 개 들이 라면봉지를 들고 카페 문을 열었다. 그가 늘 오던 저녁이 아니라 낮이었다. 아버지는 밥을 볶아 같이 먹었다. 또 말을 꺼내기 전에 머뭇거렸다. 평소 말 없는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시골동네에서 함께 장사하고 있는데, 이젠 편한 걸음으로 오시지요. 제가 매번 돈 받기도 정말 멋쩍습니다. 저를 위해서라도, 제 마음을 덜어드린다 생각하시고... 대신 제 구두를 닦아주시면 되지 않겠어요?”
구두 닦아 버는 수입보다 카페에서 차 마시고 간 비용이 더 컸으리라고 짐작하니 아버지 자신이 꼼바리가 된 듯도 하고 해서 언젠간 꼭 이 얘기를 해야겠다 했었다. 찻값을 몇 번 거절해봤지만 그는 만 원 지폐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급히 나가곤 했다. 관람료이리라. 무시한다, 오해할 것 같아 몇 회 거절 이후 더 이상 이 문제로 옥신각신하진 않았다.
“아내가 여길 오고 싶어합니다. 제가 다녀갈 때마다 오늘은 어떤 노랠 들었다느니 하면서 좀 좀살궂게 다 얘기했거든요. 헌데 아내는 걷지를 못해요. 늘 드러누워 있거나 벽에 간신히 기대어 앉아 있을 뿐이랍니다.”
소문의 반절은 틀리지 않았다.
“거의 1년 동안, 밖에 나가본 적이 없고요. 테레비로만 세상 외출한답니다.”
어눌한 아버지지만 이런 경우엔 눈치가 무척 빠른 편이다.
“집이 어딘가요? 가깝다고 하셨지요? 제가 제 차로 한번 모실게요. 차에는 타실 순 있으신지요?”
병원 갈 때처럼 부축하면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볶음밥을 먹고 바로 내려갔고 그날 저녁 때도 카페로 올라왔다. 들어오자마자 아버지의 구두를 찾았지만 카페에는 아버지 구두가 없었다. 아버지는 운동화뿐이었다.
“약속을 어기셨군요. 제가 차를 그저 얻어 마시는 대신 선생님의 구두를 닦아드리기로 했었잖습니까?”
표정은 울 것 같이 진지했지만 이건 그에겐 농담이었다. 정겨운 한 번의 농담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선뜻 말이 수월해지게 만들었다.
“대신 손님 구두를 닦아드리지요. 제 찻값을 받으려니 멋쩍다고 하셨던가요? 제 청을 거절하시면 저도 멋쩍어질 겁니다.”
그는 절대 멋쩍어하지 않았다. 거절해도 밀고나갈 태세였고 뜻을 굽힐 것 같지도 않았다. 손마이크를 만들어 입 앞에 댔다.
“안녕하세요. 이 아래 구두닦입니다. 오늘부턴 손님들 구두,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우리 카페를 찾아주신 손님에 대한 서비스라고 어여삐 여겨주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공짜구요. 저는 부담 없이 여러분의 구두를 빼앗았다가 10분 만에 곧 그리고 깨끗이 돌려드리겠습니다.”
꾸벅.
찻값을 안 받겠다고 했다가 그에게 더 짐을 씌운 꼴이 되어 아버지는 처음 황망했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스스로 잘 했다며 가슴에서 울컥 뜨거운 기쁨이 치밀어 올라왔다. 행복은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받아들인다. 이래서 행복하면 가슴에 먼저 안기는 건가?
“여기 카페 주인에게 듣지 않았나요? 저 분이 매일 한 시간씩 이 맘 때쯤 이곳에 들리는데 그 때마다 여기 공연 노래를 꼭 녹음해서 아내에게 틀어준다는군요.”
아주머니는 다시 행복지수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저 아저씨의 행복지수는 얼마나 될까요? 우리보다 높게 나올까요 아니면......”
맞은편 중년 남자가 등을 뒤로 저치고 얄기죽거리며 대답했다. 떠진 말투는 권위를 억지로 지어내는 듯했다. 이런 류들이 한결같이 그렇듯이 동의를 구하려 양 옆 사람들을 갈마본다.
“그건 행복지수라기보다는 체념지수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 같은데. 그렇잖아? 포기함으로서,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서 얻어진 생활의 방편 또는 좋게 말하면 지혜라고나 할까? 남이 인정해줄 수 없는 그들만의... 그리고 여기 노래가 들어줄 만이나 한가? 그걸 녹음까지 해서 들려준다? 거...”
체념지수라니요, 하며 아주머니는 손과 머리를 함께 가로저었다.
“말씀하신대로 지혜지수라고는 할 수 있겠네요. 제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지혜 말이에요. 이 지혜와 이 행복은 결국 같은 게 아닐까요? 한 번도 가식적인 웃음을 저분에게서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 시간에 이 카페를 들리는 게 전 아주 좋답니다. 저분 때문이지요.”
그러한 그들이 그러하듯이 중년은 아량이 넓은 양 허허허 하며 억지 너털웃음을 지어내고 있었다. 구두닦이 아저씨, 그러니까 이 카페에서 불리는 ‘아래 아저씨’는 꼭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남들처럼 집사람이라든가 안사람이라든가 애엄마라고 부르는 적이 없었다.
“혜민이가 오늘 꼭 여기 오고 싶다고 하는데, 선생님, 괜찮으시다면 함께 와도... 부탁합니다.”
“물론이죠. 언제 모시러 갈까요?”
아버지가 신바람이 나서 더 야단법석이었을 게다. 그는 그의 아내를 등에 업고 나와 차에 앉혔다.
“바깥 외출이 얼마만이지? 요즈음 병원도 뜸했잖수.”
그의 누런 얼굴은 웃음으로 함박꽃 같았다.
“죄송해요. 괜한 욕심을 제가 내고 있는 거지요? 이 사람이 어찌나 이곳 칭찬이 자자하던지. 매일 약을 올리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가뜩이나 약만 먹고 사는데. 이 사람의 극성이 아니어도 꼭 한번 와보고 싶었어요. 카페 이름이「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라지요? 카페이름도 쏙 맘에 들고...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 같구요.”
아버지는 나를 두고 한 말입니다, 라고 거침없이 응답했을 것이다. 짓는 함박웃음도 부부는 영락없이 닮아 있었다. 어줍은 개그까지. 아버지는 좀 더 푹신하고 긴 소파를 두 개 이어 붙여뒀다. 혜민 아주머니를 위한 특별석을 마련해둔 것이었다. 아버지가 남 배려하는 데에는 아들이 불편할 정도, 배려에 아들은 남 축에도 끼워주질 않는다.
“저희 카페가 문을 연지는 2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참으로 특별한 날이 되겠습니다. 특별한 분을 모시게 되었거든요. 아주머니, 아니지, 이혜민 님께 여러분의 따뜻한 환영의 박수, 어떻습니까?”
소파 등받이에 기댄 몸을 간신히 돌려 웃음으로 답례하자 아버지는 기타줄을 퉁기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이 전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노래에 나올 코드를 먼저 집어봐야만 했다. 이래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었는데, 이 날은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코드를 집고 또 집었다. 자주 부르는 노래면서도 말이다. 더 떨렸던 게다. 더 흥분되었던 게다. 더 기분이 좋았던 게다.
C-F-G7-Dm
<만남>은 고작 4개의 코드만 외우면 노래책 없이도 충분히 부를 수 있건만 이게 안 되다니. 이게 안 되는 사람이 내 아버지다. 그래도 기타를 치려고 하는 걸 보면, 욕심이라고 해야 하나 열정이라고 해야 하나, 둔감하다 해야 할지 순수하다 해야 할지, 용기랄 수도 없고 객기는 더 아닌 듯하고, 어떻든 수줍어하면서도 뻔뻔해보이기도 한 모습은 한 마디로 이것도 저것도 아니어서 보기에 어색하고 듣기에 어눌했다. 이를 보는 아들은 아버지가 늘 불안하다.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 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여느 때처럼 합창이 자연스럽게 울려 퍼졌다.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노래는 노사연에서 은희로, 박인희로, 송창식으로, 조용필로 이어나갔다. 또 배따라기로 갔다가 해바라기로 돌아왔고 트윈폴리오, 어니언스, 사월과 오월로도 노래는 끊이질 않았다. 아내와 꼭 붙어 있던 ‘아래 아저씨’가 무대 앞으로 불려나왔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당황하는 게 역력했다. 노래방에도 익숙치 못하다면서 노래엔 자신이 없다고 했다.
“이 손으로는 어느 누구보다도 삐까뻔쩍하게 광낼 자신은 있는데, 노래만은, 이 입으로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거들었다.
“나 같은 사람도 하는 걸 보고도 그런 말씀하십니까?”
좌중에선 ‘맞소 맞소’ 앵콜 하듯 터져 나왔고 이 때 그의 아내가 힘을 줘 큰 소리로 신청곡을 내놨다.
“그거 있잖아. 당신 십팔번, <나는 행복한 사람> 그 노래 듣고 싶어.”
그래도 무대 위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그에게 마치 짜놓은 각본처럼 모두가,
“노래하자 팜 라팜팜팜. 노래듣자 펌 러펌펌펌.”
노래책을 뒤지니 아버지가 마침 기타로 칠 수 있는 노래였다.
“자, 시작합시다.”
아버지가 자신 있게 응수했다. 노래하라, 하라 하는 좌중의 혼란한 틈을 타 이미 코드연습을 끝내놓고 있었다. 그의 아내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아내가 힘이었다. 서툰 남자에게 용기가 되어줬다. 흠흠...
「그대 사랑하는 난 행복한 사람
잊혀질 땐 잊혀진대도
그대 사랑 받는 난
행복한 사람
떠나갈 땐 떠나간대도
어두운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다가」
노래하는 그의 눈이 생각에 빠진 듯 어느새 감긴다.
「그 대를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
이 세상에 그 누가 부러울까요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모드레짚듯 율동까지... 온 몸이 흥겹다. 일단 입이 트인 그는 후렴도 빼놓지 않는다. 감정이입에 처음 떨리던 목소리는 바이브레이션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부러울까요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어두운 무대 위의 얼굴이 밝게 웃고 있었고 거울처럼, 마주 보고 있는 무대 아래 아내의 두 눈에선 눈물이 그렁거렸다. 그는 아내에게 돌아와서, ‘고마워’ 했고, 아내는 그에게 ‘미안해’하며 부부는 포옹을 했다.「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가족들은 이 카페의 주인을 닮아 때를 놓치지 않는다.
「그대 사랑하는 난 행복한 사람
잊혀질 땐 잊혀진대도
그대 사랑받는 난 행복한 사람
떠나갈 땐 떠나간대도
어두운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다가
그대를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
이 세상에 그 누가 부러울까요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이 세상에 그 누가 부러울까요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가족들이 어느새 부부 곁으로 모여 나는 행복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마치 시위대의 데모군중처럼, 서툰 자들의 반란이 시골 작은 카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다음 주 이 시간에)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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