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대부분 민간 신앙 습속에서 기원한다. 역으로 여러 가지 민속 형태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중국 전통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유교, 도교, 불교다. 재미있는 것은, 이 세 종교 모두 사회의 비정상적인 문화인 거지와 역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공자(孔子)는 진나라에서 식량이 다 떨어져 굶게 되었을 때 범염(范冉)에게 먹을 것을 빌렸다고 한다. ‘궁가항(窮家行)’이라는 별칭을 가진 거지는 이런 밑도 끝도 없는, 황당무계한 말을 가지고 부잣집에서 구걸하였다. 유교주의 사회에서 거지가 자신들이 구걸하는 행위에 정당성이 있다는 무형의 근거로 삼았다.
그래서 거지들은 범염을 자신들의 조사로 삼았다. 공자와 범염의 생애를 보면, 몇 백 년이라는 거리가 있어 결코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없지만 유교의 교주를 거지의 조사와 억지로 연결시킨 것이다.
도사와 승려는 어떤가? 실제 몸을 낮추어 동냥하면서 수행하지 않던가. 직접 걸식하면서 징을 울려 길을 열어주 듯 닥쳐올 일에 대비해 길을 알려주면서 사회 풍조에 잠재적인 영향과 효과를 자아내지 않던가. 먼저 불교를 보자.
묻혀있던 부처가 나타나다
모든 세상 사람이 불교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도 행각승에게 보시할 여력이 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떤 ‘걸사(乞士)’는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교묘한 수법을 이용해 탁발했다. 청대 용납(慵納)거사의 『지문록(咫聞錄)』 3권 「불종토출(佛從土出)」의 기록이다 :
휘주(徽州)는 땅이 기름지고 탄성이 있었다. 행각하던 승려 한 명이 신령(新嶺) 양정(凉亭)에 3일 머물다가 신령의 정상에서 빛이 난다며 분명 신기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하루가 지나자 공교롭게도 흙 속에서 금불상 하나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부처의 머리가 먼저 보인 후 나중에는 얼굴이, 삼일 째에는 전체가 완전히 흙 속에서 나왔다.
승려는 살아있는 부처가 강생했다며 밤낮으로 염불하면서 사람들에게 보시하라고 권했다. 활불을 위하여 사찰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수만 명이 소식을 듣고 몰려들어 금불상이 흙을 뚫고 나오는 상황을 직접 보았다. 실제로 금불상이 흙을 뚫고 나와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은가.
그 승려는 나뭇가지를 가지고 여의 비녀를 만들어 마음이 있어 은자를 보시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건네주면서 연년익수할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20일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탁발승은 만금을 보시받자 말끔히 거두어서는 사라져 버렸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한 편의 사기극이었다.
원래 탁발승이 낡은 사찰에서 나무불상 하나를 훔쳐서는 신령 아래에 구멍을 파서 묻어 두었다. 먼저 아래에 황두 몇 두를 깐 뒤 그 위에 나무불상을 올려놓고 양 옆으로 다시 황두를 묻은 후 위에 흙을 깔아두었다. 황두가 물을 먹어 팽창함에 따라 나무불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사람 손 하나 움직이지도 않고 불상이 흙을 뚫고 나오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불상이 혼자서 서서히 현신하는 기적(?)을 친히 보게 됐으니, 경탄하며 보시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보시한 것을, 탁발승은 힘들이지 않고 모두 가지고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납팔죽(臘八粥)
어떤 때에는 사찰에서 ‘좋은 인연을 두루 맺기’(廣結善緣) 위하여 많은 선남선녀를 다투어 모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옛날 강소성 남경 성내 창창(倉蒼)의 와불사에서는 음력 12월 초여드렛날마다 사람들에게 납팔죽을 나눠주었다. 죽은 쌀로 만들고 안에 대추, 밤알 등을 넣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납팔죽을 나눠주면서 부처님의 보우를 빌었다.
그런데 그 비용은 사찰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모두 민간에서 얻은 것으로 만들었다. ‘납팔’(臘八, 음력 12월 8일. 석가가 35세 되던 BC 648년 12월 8일 불도를 이룬 날) 며칠 전에 와불사 승려들은 붉은 옷을 입고서 손에 발우를 들고 시정에 나아가 구걸하였다. 그것을 가지고 나중에 납팔죽을 만들어 다시 보시하였다.
그야말로 ‘백성에게서 거두어 가서 백성에게 쓰는’ 셈이었다.
탁발승이 재물을 탐하여 살생하다
명대 왕윤교(黃允交)의 『잡찬삼속(雜纂三續)』 기록이다.
‘거지가 횡재하다’는 말은 ‘밖의 기쁨을 누리다’는 뜻을 가진 당시의 민간 속담이다. 청빈한 탁발승이 ‘횡재’하면 역시 ‘기쁜’ 일임은 분명하다. 어떤 때에는 ‘횡재’를 얻기 위하여 거지와 같은 수단을 동원하여 목숨을 빼앗으면서까지 재물을 탐하기도 하였다.
청대 의휘(儀徽)현의 A씨의 처가 대단히 예뻐서 상인의 아들이 한 번 보고는 하룻밤을 만나 즐기려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매파에게 주선케 하였다. 그 부인에게 금을 보상으로 주고 몰래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날 저녁에 남편은 자리를 피해주었다. 부인은 촛불을 켠 후 문을 열어두고 기다렸다. 보상금인 금도 촛불 옆에 놓아둔 채로 기다리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때마침 탁발승이 탁령(鐸鈴)을 울리며 그곳을 지나다가 야밤중에 문이 열려 있는 집을 보고는 이상하다 여겨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견물생심이라지 않는가. 욕심이 생겼다. 주방에 들어가 칼을 들고 나와서는 부인의 머리를 자르고 촛불을 끈 후 금과 머리를 들고 떠났다.
밀회를 즐기려던 상인의 아들이 뒤늦게 나타나 침대 위를 만져보니 피가 흥건하지 않는가. 놀라 황급히 자리를 떴다. 한 발 늦게 도착하면서, 만남도 이루지 못하고 그런 참상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튿날 돌아온 남편은 대경실색하였다.
“그렇게 좋아했으면 좋아하기만 하면 됐지 어찌해 죽이기까지 한다 말이냐. 내 따져 물어야겠다.”
상인 집을 찾아가니 문이 잠겨있었다. 대문에는 피 묻은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남편은 울면서 말했다.
“내 아내를 죽인 자는 분명 상인의 아들이다!”
곧바로 관부에 고발하니, 상인의 아들은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아들을 사랑하는 상인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고 아들에게 캐물었다. 아들은 사실대로 부친에게 알렸다. 상인이 말했다.
“그 부인의 머리를 찾아야만 네가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상인은 포리를 두루 찾아다니며 뇌물을 주고 무마시키려 하였다. 살인범을 잡는 데에 막대한 금액의 현상금도 걸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 어부 한 명이 새로운 머리를 바쳤지만 현상금을 노리고 친 누이동생을 살해한 것이었다. 관부에서 조사한 후 사실을 밝혀내고 현장에서 장살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상인에게 알려주었다.
“그 살인범은 어떤 사찰의 승려입니다. 사람 머리는 마른 우물에 던져 넣었습니다.”
조사해 보니 우물에서 남녀 머리 대여섯이 나왔지만 살해당한 부인의 머리는 없었다.
승려에 대한 법 집행은 없는 일로 되었다. 상인의 아들은 계속 감옥 생활을 하였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탁발승이 시골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도시에서 온 사람이 어떤 사찰의 승려가 살인을 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고 알려왔다고 전했다. 그러자 부녀의 목을 자른 승려가 실색하고는 울면서 말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면 하늘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평생 한 사람을 죽였을 뿐이다.”
다시 캐묻자 탁발승은 말했다.
“나는 재물이 탐나 부인을 죽였을 뿐이다. 머리는 마른 우물에 던져 넣었다.”
시골사람들이 관부에 알리자 탁발승을 붙잡았다. 죽은 부인 집에서 멀지 않은 우물에서 부인의 머리와 칼을 찾아내었다. 남편에게 확인을 시키니 죽은 부인이 맞았다.
죽은 부인의 머리가 있고 칼도 있으며 자백도 받았으니 범인은 탁발승이 틀림없었다. 관부는 탁발승을 사형에 처하고 상인의 아들은 석방시켰다.
탁발승을 관부로 이송하는 도중에 시민 모두가 그를 알아보았다.
“저 사람은 매일 밤에 길에서 탁령을 울리며 탁발하던 고행승이 아닌가?”
‘걸사(乞士)’도 어떤 때에는 거지와 같이 ‘횡재’에 유혹을 받고 심지어는 재물을 탐내어 사람을 해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